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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32화 (132/135)

132화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태양이 넘어가는 저 끝까지 마물들이 빼곡한 탓이라.

거친 바람에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묻어 있다. 날카로운 피 냄새도 함께 풍겨져 왔다. 이 기운의 끝은 분명히도,

‘자일.’

그였다.

카리나는 창틀을 잡은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모두 힘을 회복한 후에 자일을 뒤쫓으려 했는데, 이렇게 그가 직접 찾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마물 군단을 이끌고.

‘……아니.’

마물뿐만이 아니다. 최전선에서 달려오고 있는 이들은 분명…….

“아포칼리타.”

그들은 카리나가 익히 알고 있는 아포칼리타였다. 그녀와의 전투에서 죽은 제이슨도, 아멜도 함께였다.

카리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자일이 저들을 되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들을 보게 되면 그녀가 동요하리란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미친 새끼.’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뒤를 돌아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

“내가 앞장서 나갈 거야. 샐러딘과 르네거는 날 엄호해.”

촤악!

그녀는 접어 놨던 날개를 활짝 폈다. 검은 날개는 3차 각성의 흔적인 비늘로 뒤덮여 있다. 이 비늘은 자일의 힘을 충분히 막아 줄 수 있으리라.

“자일은 내가 죽일 테니까.”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샐러딘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거는 무심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카리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반쯤 열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카리나는 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분명 자기가 대신한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자일은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반드시.

“르네거.”

그가 말을 하기 전에, 카리나가 먼저 말문을 틔웠다.

“내가 위험해지기 전까지 자일에게 달려들 생각은 하지 마.”

르네거의 미간이 사붓 좁혀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카리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넌 다른 마물과 아포칼리타를 없애는 데에만 집중해.”

“…….”

“대답.”

“……노력해 보겠습니다.”

뜨뜻미지근한 답이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르네거는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이였으므로.

카리나는 애써 지은 미소를 머금으며 끼고 있던 데이펜의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이거.”

르네거의 손바닥에 쥐여 준다.

“가지고 있으렴. 쓸 수 있으면 쓰고.”

그는 반지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 후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쓸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대답이야.”

카리나는 턱을 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피오스를 거쳐,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는 페넬로피를 잠시 바라보다,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피에라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즉시 피에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피에라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초조함,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

“인간들은 빠져야지.”

카리나는 피에라의 얼굴에 묻어 있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더듬으며 피식 조소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녀는 하늘 높이 비상했다.

* * *

거센 바람을 맞으며 공중에 떠 있는 자일은, 가득한 마물 떼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양껏 찢어 올렸다.

본래 이 정도의 힘을 쓸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이상 전력을 다해야 하는 터.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샐러딘의 목을 쥐어짜고 건방진 인간 놈의 사지를 자른 후 카리나의 마나핵을 가져오리라.

그들만 없다면, 그들만 사라진다면 자신의 계획은 모두 성공할 수 있는 터.

자일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새까만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퍼져 나온 검은 힘은 진군하는 마물과 아포칼리타들의 몸을 감쌌고, 그들은 기세를 높이며 발을 굴렀다.

쿵, 쿵.

대지가 무너질 것처럼 격하고 무거운 발걸음이다. 자일은 그들을 보며 비죽배죽 비소했다.

이때였다.

“너는 왜 이렇게 급하니.”

피융!

자일은 제 어깨를 겨냥한 힘의 화살을 피하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내가 찾아갔을 텐데 말이야.”

카리나.

그녀는 날개를 펄럭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일은 곧장 그녀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있잖아, 자일.”

카리나는 그런 자일의 발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내가 했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잖니.”

-나를 좋아하니?

그 질문을 떠올리자마자, 자일의 미간이 보란 듯이 찌푸려졌다. 그는 간신히 냉정함을 부여잡았다.

“답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나.”

“글쎄.”

카리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피식 조소했다.

“이렇게 날 쫓아온 걸 보면, 날 너무 좋아해서 미쳐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자일의 손이 말렸다. 퍼져 있던 검은 기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정말 날 죽일 생각이니?”

카리나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도 괜찮겠어?”

자일은 그런 카리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양분된 명제에서, 아포칼리타는 언제나 후자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렇기에 자일은 당연히 선택했다.

“나는 너를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다.”

죽음 후의 부활을.

이것이야말로 신에 필적하는 영생이 아니던가.

자일은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안에 새까만 어둠이 가득 들어찼다.

피융!

수십 갈래로 갈라진 힘이 카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일.”

그러나 카리나는 그 힘을 가뿐히 피했다. 퍼져 사라지는 힘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느리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넌 내가 나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잖니.”

“…….”

“부활을 해 보았자 지금의 내가 아닐 텐데 말이야. 그런 마리오네트 인형 같은 걸로는 만족 못 하지 않니?”

자일은 그녀에게 닿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힘을 회수했다.

휘잉, 한 바퀴 날아오른 후 카리나와 마주 선다.

“카리나.”

그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너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쿵!

대지를 채우고 있던 아포칼리타 중 하나가 끌려 올라왔다. 카리나는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건, 제 앞에서 죽어 가던 아멜이었으므로.

자일은 아멜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카리나를 직시했다.

“어떠한가? 네가 죽인 형제를 마주한 소감은?”

그는 아멜의 얼굴을 카리나에게 들이밀었다.

“너의 형제를 또 죽일 생각인가?”

카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아멜의 축축한 눈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하, 진짜.”

그녀는 으득 이를 깨물며 자일을 노려보았다.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거대한 힘을 방출했다.

“네 꼭두각시로 사는 것보다 내 손에 죽는 게 낫겠지.”

쿠웅!

그녀가 소환한 언데드 와이번이 자일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 * *

“윽!”

르네거는 베인 어깨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몸을 굴렸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는다. 곧장 일어난 그는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야, 괜찮냐?”

샐러딘의 말이다.

르네거는 그와 등을 맞댄 채 다시금 검을 내리그었다.

“저보다는 당신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만.”

“아니라고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힘들기는 해.”

샐러딘은 퉤,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손톱 끝에는 마물 수십의 피가 묻어 있다. 개중 아포칼리타의 피도 있으리라.

제 형제를 죽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샐러딘의 얼굴은 평온했다. 부활한 생명은 본연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야이씨.”

샐러딘은 제게 달려든 마물의 배를 걷어차며 욕을 읊조렸다.

“저 새끼는 목숨 아까운지도 모르고 나와 있네.”

챙!

르네거는 어깨를 노리던 마물의 목을 내리그으며 고개를 들었다.

샐러딘이 가리킨 곳에는 피에톤이 서 있었다.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는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게 꽤 힘에 부쳐 있는 것 같았다.

“피에톤 말입니까?”

“그래. 잠자코 탑에 있으라 했건만.”

샐러딘의 다리가 달싹였다. 피에톤에게 날아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르네거는 피식 조소했다.

“꽤 아끼시나 봅니다.”

“내가? 누굴? 왜?”

샐러딘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거든! 저놈이 죽으면 카리나가 내게 화낼 것 같으니까 그렇지! 아냐! 안 아껴!”

“……짧게 부정해도 충분합니다만”

르네거는 다시금 검을 휘두르며 샐러딘과 거리를 벌렸다.

“가고 싶으시면 가셔도 됩니다.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래?”

샐러딘은 르네거와 피에톤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날개를 활짝 폈다.

“너, 적당히 해. 아직 힘에 적응하지도 못했을 텐데.”

“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넌 죽을 놈은 아니니까.”

말을 마친 샐러딘은 바로 날아올랐다. 바쁜 날갯짓은 그의 급박한 마음을 오롯이 드러냈다.

저렇게 걱정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곁에 있을 것이지.

르네거는 다시금 조소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물의 수가 많아 힘에 부치긴 했다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리나만이 걱정될 뿐…….

위를 올려다보던 르네거의 눈이 커진 건 그 순간이었다.

“윽!”

방심한 찰나, 르네거는 어깨를 베였다. 그는 바로 검을 휘둘러 달려든 마물의 목을 잘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하늘에 둔 시선은 떼지 않는다. 그곳에는,

“카리나!”

아포칼리타 수십에게 둘러싸여 있는 카리나가 있었으므로.

젠장.

르네거는 발을 굴렀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날개가 없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지금,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때,

“카리나! 조심하십시오!”

카리나의 날개 한쪽이 깊게 베인 게 보였다. 르네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빌어먹을!”

챙!

그는 마물들을 끊임없이 베며 카리나의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혹 그녀가 떨어진다면 받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임시방편인 것을 알고 있었다. 날 수 없는 그는, 카리나를 도울 수 없었다.

무력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깊은 좌절을 이끌어 냈다.

이때였다.

우웅.

손이 진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손가락이 진동했다.

르네거는 바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야.』

데이펜의 반지가, 눈이 부실 정도로 크게 빛나고 있었다.

『신의 힘이 필요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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