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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33화 (133/135)

133화

우웅.

르네거는 진동하는 반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반지는 요동칠 뿐 아니라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르네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빛이 자신의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걸.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자.』

“…….”

『신의 힘을 가지고 있으나 신이 아닌 자.』

반지는 다른 성물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수다스러운 검과 지팡이에 비하면, 반지야말로 진정한 신의 성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선택하겠느냐?』

반지는 공명하며 물었다.

“무엇을 선택하라는 말입니까?”

『선택하겠느냐?』

르네거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역시 직감적으로 알았다.

반지가 말하는 ‘선택’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상하는 결말과 같은 결이라는 것을.

르네거는 손을 들어 올려 반지와 눈높이를 맞췄다.

“선택하지 않겠다고 하면, 무어라 하실 겁니까?”

반지는 점멸하며 반짝였다.

『선택하겠느냐?』

여전히 같은 말.

성물이란 건 뭐가 됐든 다 미친놈들이로군.

르네거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혀를 찼다.

『선택하겠느냐?』

“하겠습니다.”

『……힘을.』

붉은빛이 솟구치며 쏟아졌다.

그 힘은 르네거가 차고 있는 검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새하였던 검신이 붉게 물들어 갔다.

과거, 자일과 싸웠을 때 겪었던 현상이다.

그러나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보다 더 강해지고, 더 정교해진 힘.

르네거는 차분히 눈을 내려 감았다.

검신을 뒤덮고 있던 빛이 올라와 그의 손을, 팔을, 어깨를, 몸을 휘감았다.

“꿰에엑!”

그의 주변에 서 있던 마물들 모두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진 마물들.

달려들려던 마물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물 주제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저 근처에 간다면 빛에 휘말려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종말의 선택을.』

반지는 더욱 거센 빛을 뿜으며 요동쳤다.

그리고.

파앗!

주변으로 엄청난 빛이 쏘아졌다. 반경에 있던 모든 마물들이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

르네거는 감았던 눈을 올려 떴다.

초점 없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카리나가 있는 그곳이었다.

* * *

퉤.

카리나는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아포칼리타 따위, 자일을 제외하면 별 게 아니라 생각했건만.

그 생각은 오만이었다.

‘이게 부활의 힘인가.’

카리나는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털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팔이 잘린 아멜과 얼굴 반쪽이 날아간 제이슨이 보였다. 그들 모두 몸이 만신창이였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싹.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패배하게 된다면, 정말 자일의 손에 죽게 된다면,

‘저 꼴이 내가 되겠지.’

저런 인형 같은 꼴로 평생을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다.

“후우.”

카리나는 숨을 고르며 턱을 들어 올렸다.

아멜과 제이슨이 거듭해 달려든 덕분, 자일에게는 티끌만큼의 상처도 내지 못했다.

그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꼴이 못내 불쾌했다.

하지만.

챙!

“윽!”

달려드는 아포칼리타를 막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터. 카리나는 베인 날개를 부여잡으며 눈을 찡그렸다.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 좋니?”

그녀는 자일을 직시했다.

“나와 싸울 자신이 없는 거라면 숨어 있으렴.”

자일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카리나.”

펄럭, 자일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휘잉!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도발한들, 여기까지다.”

“윽……!”

곧장 날아온 자일은 카리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카리나는 그의 손등을 할퀴었으나, 힘에 부쳐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까닭이라.

콜록.

카리나는 마른기침을 뱉으며 눈을 찡그렸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것은, 자신과 항상 함께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자일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죽음은 선택하는 것이지, 강요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간신히 날개를 휘저어 몸을 띄웠다. 턱 막히던 숨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왜.”

그녀는 그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너는 왜 이러니?”

그의 손에 힘이 사붓 풀렸다. 카리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왜 너는 싸우고 있니?”

“…….”

“이렇게 싸운다 해도, 네게 돌아갈 것이 없을 텐데.”

이는 과거의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했다.

발버둥 치며 싸워 봤자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히론을 잃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후회가 됐다. 과거의 자신을 때리며 말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터. 그녀는 해야 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일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의 멸망은,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저 학습되어 온 것일 뿐.

“네가 이리 행동하는 건 아버지가 시켰기 때문이잖니.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죽었어. 너는 더 이상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카리나.”

자일의 붉은 눈이 아주 조금 침전되었다.

“너는 우리가 악한 존재라 생각하겠지.”

느닷없는 말이다. 더불어 자일에게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카리나는 숨을 멈춘 채 눈을 크게 올려 떴다.

“세계의 악이 우리고, 세계의 선이 인간이라 생각하겠지.”

그는 씁쓸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허무함은 찰나였다.

“하지만 말이다.”

그는 카리나의 목을 붙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언제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 왔다.”

“윽…….”

“승기를 잡는 이가 선이 되는 것이다.”

희미해지는 시야 너머, 자일의 얼굴이 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자일은, 결코 슬퍼하는 이가 아니니까. 슬퍼할 수 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나는.”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명확하지 않지만, 그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선이 되고 싶다.”

자일의 반대 손이 올라갔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카리나를 향해 번뜩였다.

그의 힘이 카리나의 목덜미를 파고들려는, 그때였다.

“커헉!”

자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울컥 피를 쏟는다.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가슴을 꿰뚫고 나온 검이 보였다.

저 검은 분명.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르네거.”

쓰러지는 자일의 몸 너머, 르네거의 얼굴이 보였다.

* * *

“아이씨, 왜 이렇게 많아!”

샐러딘은 끊임없이 팔을 휘두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물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마물을 다 끌고 온 것만 같았다.

그뿐이랴. 아포칼리타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개중 샐러딘이 봉인했던 안타레스도 있었기에, 그는 묘한 찝찝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아씨, 아무리 한 번 뒈졌던 놈들이라고 해도 또 죽이는 건 기분이 이상한데.”

하지만 그래도 달려드는 그였다.

부활한 아포칼리타는 본래의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야, 넌 괜찮냐?”

샐러딘은 제 등 뒤에 서 있는 피에톤을 향해 말했다.

“말, 시키지 마라.”

“목소리가 다 죽어 가는데.”

“그러니까 말 시키지 말라고!”

“와, 이젠 나한테 화도 내냐. 너 구하려고 온 건데.”

샐러딘은 피에톤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던 마물의 목을 자르며 그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넌 왜 기어 나왔냐?”

피에톤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얌전히 탑에 있을 것이지, 왜 기어 나왔냐고.”

샐러딘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희 같은 인간들이 나와 봤자 도움 되는 건 없어. 알고 있잖아?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때까지 잠자코 있으면 될 텐데.”

“지랄하네.”

“지, 지, 뭐?”

샐러딘은 움직이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벌리며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피융!

피에톤의 손끝에서 나온 힘이 샐러딘의 등 뒤에 서 있던 마물의 아가리를 찢었다.

“우리가 동맹을 맺고 있어서 잊었나 본데 말이다. 원래 우리는 너희와 끊임없이 싸웠었다.”

“알아.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야. 그렇게 싸우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죽었는데.”

“죽는 걸 각오하고도 싸우는 거다.”

피에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영창하며, 마법을 쓰고, 달려든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네놈 말대로, 잠자코 숨어 있으면 평화가 올 수 있겠지.”

피에톤은 베인 팔을 뒤로 빼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쟁취한 평화가 아니지 않나. 무어가 됐든 인간의 손으로 얻고 싶은 거다.”

샐러딘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피에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멸망하게 된다면?”

“말하지 않았나? 무어가 됐든 인간의 손으로 얻고 싶은 거라고.”

단호한 답에, 샐러딘은 기가 찬 양 헛웃음을 뱉었다. 다시 손을 들어 달려든 마물의 배를 가르곤 자세를 정돈한다.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냐? 다른 인간들은 아닐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럴까?”

피에톤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 멀리, 인간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저래도, 나 혼자만의 생각 같은가?”

언제 달려 나온 것인지, 수백의 마법사들이 마물과 대치하고 있었다.

개중 피에라도 있었으며, 페넬로피도 존재했고, 스치듯 얼굴을 보았던 인간들도 있었다.

하, 참.

샐러딘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는 비스듬하게 미소를 걸어 올렸다.

“나름 도움이 되네.”

피융!

샐러딘은 다시금 힘을 내 마물들을 베며 달려 나갔다.

협공을 한다면 마물들을 보다 빠르게 물리칠 수 있으리라.

그는 그리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리나와 자일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뭐야, 저 새끼?”

추락하는 자일과, 그런 그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르네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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