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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의 첫사랑을 타락시켜 버리면-134화 (134/135)

134화

“크흑!”

자일은 왈칵 피를 토하며 가슴을 들썩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습을 당하다니, 그리고 그 기습에 이렇게까지 치명상을 입다니.

꿰뚫린 가슴은 그 특유의 회복력으로도 회복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쿨럭, 자일은 재차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인간……! 개자식……!”

자일은 주먹을 바르쥐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숨을 헐떡이는 것뿐이었다.

이때였다.

탁.

무언가가 지면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엇인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카리나와 그 인간 놈이겠지.

자일은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코앞이었다.

제 목적의 달성이 코앞이었단 말이다.

한데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의 기운이 홧홧했다. 이렇게까지 생명이 희미해진다면, 아포칼리타의 관을 쓸 수도 없었다.

쿨럭, 그는 기침을 쏟아 냈다.

“자일.”

그런 그에게 다가온 카리나의 말이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자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 있는 눈동자에는 어떠한 빛도, 뜻도 없었다. 그저 무정할 뿐. 아니, 그렇기에 혼잡할 뿐.

“이제 그만할 때가 됐잖니.”

으득.

자일은 이를 갈았다.

“너는……!”

그는 몸부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성공했을 것이다.”

“아니야.”

“너만 우리의 뜻을 따랐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야.”

“너만 도망치지 않았다면.”

“아니라고 했잖아!”

카리나는 두 손을 바르쥐며 외쳤다.

하아, 하.

그녀는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어떻게 했건, 무엇을 했건, 설사 너희의 곁에 있었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죽었어.”

우리. 그 단어가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리나는 말을 뱉은 입술을 씁쓸하게 매만지며 숨을 들이켰다.

“선이 되고 싶다고 했지?”

자일의 붉은 눈은 차차 흐려지고 있었다. 솟구친 검은 기운이 그의 목덜미를 뒤덮고 있다.

“거짓말하지 마. 애초에 선이 뭔지도 모르면서.”

카리나는 조소했다.

“선이라는 건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아니, 무형의 산물일 뿐이지.”

“…….”

“애초에 선과 악은 정해지는 게 아니야. 우리가 정할 수 없어.”

악인에서 벗어나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선인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버리고 또 버려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카리나는 행동했었다.

인간일 적 양심에 따라, 도덕에 따라…….

그러며 인정받길 원했다. 자신은 다른 아포칼리타와 다르다고. 악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돌이켜 보았을 때, 어떠한가?

정말 자신은 악인이 아니었던가?

애초에 선악이라는 것은 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

저의 행동에 당하는 자가 결정하는 것일 뿐.

이 당연한 사실을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자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하.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기 힘든 헛숨이 울려 퍼졌다.

카리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손 끝이 가리키는 곳은 자일의 뻥 뚫린 가슴이었다.

우웅, 그녀의 손을 따라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검처럼 날카로워진 빛은 잘 벼려진 채 자일을 조준했다.

“나는.”

자일은 끝을 직감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죽음의 강에서 널 기다리겠다.”

“글쎄.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너를, 반드시 기다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카리나가 담겨 있다.

오래전부터 보았던 이.

태초부터 탄생까지 지켜보았던, 하나뿐인…… 나의 것.

저 검은 머리칼도, 새하얀 얼굴도, 진녹색의 눈도, 붉은 입술도, 모두 다 나의 것인 줄 알았는데.

자일은 허무한 웃음을 내뱉었다.

-나를 좋아하니?

이제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있을 듯했다.

“이번에는, 너의 곁에…….”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피융!

카리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자일의 몸을 지배했다.

-좋아했다.

구현되지 못한 말이 허공에 흩날려 사라졌다.

* * *

“우욱…….”

카리나는 몸을 웅크리며 구역질을 했다.

자일의 흔적은 더 이상 없다. 오직 반짝거리는 마나핵만이 남아 있을 뿐.

그의 몸은 가루가 돼 흩날려 사라졌다. 모든 것이 휘발된 것이다.

“하아, 하…….”

속이 좋지 않았다. 아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인가. 무어가 됐든 평안하지 않았다.

자일을 죽인다면 모든 게 개운해질 줄 알았는데.

그 역시도 내게는 악인이 아니었던 걸까.

카리나는 이젠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리나.”

그런 그녀의 몸을 감싼 건 르네거였다. 카리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좋지 않아 보입니다. 조금 앉아 있는 것이…….”

“너.”

그녀는 르네거의 뺨을 붙잡았다.

“어떻게 한 거니?”

말대로, 카리나는 궁금했다.

르네거가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이나, 자일의 날개를 베고 가슴을 뚫은 것이나 모두 다.

“…….”

하지만 르네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평소와 같이 무해한 얼굴로.

“저도 이제 아포칼리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는 제 뺨을 만지고 있는 카리나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조금씩 옮겨졌다. 자일이 있던 그 장소로.

“자일은…….”

“죽었어.”

아. 르네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다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얼굴과 안색을 차분히 살핀다.

“괜찮으십니까?”

카리나는 입술을 말았다.

무어라 해야 할까.

괜찮지 않다 하기에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괜찮다 하기에는 괜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에서 치달았다.

카리나는 르네거의 가슴에 이마를 대었다. 느리게 숨을 뱉으며, 지금의 시간을 더듬어 본다.

……이 순간은, 앞으로 다신 없을 테니까.

그녀는 천천히 이마를 떼어 냈다. 뒤이어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누나!”

샐러딘이었다.

뛰어온 그는 카리나의 팔을 붙잡으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안 다쳤어? 아니, 다쳤네? 왜 이렇게 다쳤어!”

그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시름을 토해 냈다. 카리나를 살피는 눈에는 걱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재차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오늘로써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일은, 어떻게 된 거야?”

“죽었습니다.”

“……그렇구나.”

르네거의 답에, 샐러딘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그 역시 복잡한 감정이 치미는 듯했다.

그러나 그건 찰나였다.

“그럼, 이젠 정말 끝이네.”

한껏 해방감이 담겨 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테다.

자신들을 뒤쫓던 자일이 죽었으니, 자일도 죽고 카오스도 죽고 모든 아포칼리타들도 죽었으니.

하지만.

“아니.”

카리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녀는 저 멀리, 밀집돼 있는 마물 군단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죽음의 산물. 죽음의 신이 만들어 낸 것들.

신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이상 저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 이곳은 인간만의 땅이 되지 않으리라.

후우.

카리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르네거의 손을 붙잡았다.

“데이펜의 반지와 라템의 성검.”

그녀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를 내게 주렴.”

* * *

아버지, 카오스가 성물을 모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이는 성물들이 각기 엄청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는 성물들을 모았을 때 비롯될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쨍그랑.

카리나는 바닥에 모든 성물을 내려다 놓았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뭐야, 뭘 하려는 건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샐러딘은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나는 대답 대신 성물들 위에 손을 올렸다.

파앗!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힘이 성물 모두를 감쌌다.

데이펜의 반지, 캄바이트의 지팡이, 라템의 성검, 그리고 아포칼리타의 관.

이 모든 성물을 한데 모으게 되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힘을 없앨 생각이란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의 힘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

우웅.

바닥이 진동했다. 검과 지팡이, 왕관, 반지 모두에서 색색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빛은 곧 나의 몸을 덮으리라. 그리고 나의 생명을 토대로 능력을 발휘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더 이상 인간들이 신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신이 인간계에 개입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원작이었다면 페넬로피가 모든 아포칼리타를 죽인 후 했을 일이다.

그 후에 평범한 인간이 된 자들 위에 군림하며 왕으로 살게 되지.

하지만 그것은 페넬로피가 살아 돌아온 덕분이다. 그녀는 전쟁신의 아이였으므로.

하지만 카리나, 그녀는 아니다.

아포칼리타인 카리나는,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몸을 숨기며 살아야 돼.”

카리나는 제 뒤에 서 있는 르네거와 샐러딘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인간들은 이제 평범해질 테니, 너희 같은 존재를 무서워하지 않겠니.”

샐러딘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르네거는 달랐다. 그는 카리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이런 선택을 하시는 겁니까?”

그는 노후하는 짐승처럼 뜨거운 숨을 뱉으며 눈을 번뜩였다. 핏발이 선 흰자가 보였다.

“이래야만 하니까.”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이래야만 모두가 평안해질 테니까.”

“그럼 당신은요?”

“나도 평안해질 거야.”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영원한 안식을 찾을 테니까.”

르네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카리나의 행동이 먼저였다.

그녀는 르네거의 팔을 뿌리치며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아!”

그녀는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저가 만든 빛인데도 불구하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빛에 닿은 살이 따끔 거리며 아파 왔다.

“이게 무슨…….”

카리나는 새까매진 손을 내려다보며 황망한 시선을 내보였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당신이 이러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걸.”

“그래서, 무슨 짓을 했니?”

“제가 선택을 했습니다.”

르네거는 카리나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며 그녀를 보살핀다.

선택.

성물이 말한 ‘선택’

- 『…… 종말의 선택을.』

그것이 무엇인지, 르네거는 알고 있었다. 이미 레피오스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르네거는 카리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제 손이 거칠어 그녀의 살에 상처를 낼까, 두려웠다. 목전에 다가온 죽음보다야 그것이 더 겁이 났다.

“당신은 죽지 못한다고.”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카리나는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소에 담겨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르네거.”

그녀는 르네거의 팔을 붙잡았다.

“싫어. 안 돼.”

손이 달달 떨렸다. 학습된 공포가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르네거는 그런 카리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제가 죽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면서…….”

그는 고개를 숙여 카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왜 당신은 스스로 죽으려 했습니까?”

찰나의 따뜻함. 사라지는 체온. 그 온도를 붙잡으려 했으나 휘발된 흔적은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죽음을 계획했어. 네가 죽는 건 안 돼. 그럴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샐러딘.”

르네거는 샐러딘을 향해 눈짓했다. 이미 말을 해 둔 상태였다.

머뭇거리던 샐러딘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리나를 붙잡았다.

“샐러딘! 이거 놔!”

“싫어.”

부상으로 인해 힘이 빠진 그녀를 잡고 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어려웠다. 르네거가 죽는 걸, 제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샐러딘은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

르네거는 웃었다. 그저 입술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아래로 흘러내린 눈꼬리는 쌓인 슬픔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거대해진 빛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부디 이곳에서 안식을 찾으시길.”

파앗!

빛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르네거는 사라졌다.

* * *

“대열을 맞춰!”

“젠장! 부상자들을 뒤로 옮겨!”

“조심해!”

마물과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함을 치며 싸우기 바빴다.

마법사들은 끊임없이 영창하며 힘을 쏟아 부었고, 페넬로피와 뒤이어 달려온 정령사들도 모두 마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부상자는 속출했으며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이대로는…….’

페넬로피는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죽을 수도 있어.’

그녀는 텅 빈 손가락을 매만졌다. 반지가 있었다면, 그 힘을 조금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수세에 밀리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카리나에게 반지를 준 건 후회되지 않았다.

그녀는 할 일이 있으니까.

그래. 페넬로피는 믿고 있었다. 카리나가 이 세계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페넬로피는 다시금 이를 깨물었다.

이때였다.

“어, 어!”

“저기 보십시오!”

사람들이 한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페넬로피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저게 무슨…….”

새하얀, 그러면서도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거대한 기둥이 솟구쳐 있었다.

위험한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저 기둥을 보자마자 평안함이 몸에 스며들었으니까.

그렇다면 저건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기둥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빛은 마물들을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마물들이 사라집니다!”

“뒤로 물러서!”

마물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증발하는 것처럼, 희미해지는 그것들.

쨍그랑.

페넬로피는 들고 있던 화살을 떨어뜨렸다.

수천의 마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뿌옇던 공기가 깨끗해진다.

시커멓던 하늘이 밝아진다.

“아…….”

이렇게 끝이.

페넬로피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려다본다. 이제는 정령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제 몸을 관찰한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 *

“…….”

마탑에 서, 모든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레피오스는 짧게 탄식했다.

솟구쳐 있는 빛의 기둥은 천천히 빛을 사그라뜨리고 있었다.

저 빛에 들어간 이는 누구던가.

예지에서는 카리나였으나,

실제로는 그녀가 아니었다.

미래는 불변한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결과는 언제나 실존한다고 판단했다.

하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오만이었음을.

“이렇게 되는 것이었군요.”

그는 주름진 눈가를 살풋 접으며 미간을 좁혔다. 무의식중에 제 팔을 쓰다듬는다. 제 친우, 히론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하면 이제 네 곁으로 갈 수 있겠구나.”

그는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한참을 뻐끔거리던 그는, 이내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뒤로 눕혔다.

뒤이어 올라온 그림자가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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