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신의 힘이 사라졌다.
이 믿기지 않은 사실을 인간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수십 날 동안 기도를 올렸고, 또한 수백 날 동안 잃은 힘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인정해야 했다.
신의 권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나도 몰라.”
페넬로피는 마주 앉아 있는 아힌과 케셰트를 향해 말했다.
아힌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그 아포칼리타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는 걸 아는데.”
“그러니까, 정말 모른다고.”
페넬로피는 단호히 대꾸했다.
“카리나가 내게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그녀는 쯧, 혀를 차며 입을 모았다. 괜한 서운함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뭐,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은 사라졌잖아. 마물도 없고, 아포칼리타도 없으니까.”
“그들이 살아 있지 않습니까.”
케셰트의 말이다.
그는 텅 빈 왼쪽 소매를 매만지며 눈을 번뜩였다.
“그들이 살아 있는 이상 평화는 없습니다.”
바르쥔 오른손은 매우 단단해 보였다. 힘을 준 두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고. 마치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페넬로피는 픽 비소했다.
“뭐, 복수라도 하려고?”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케셰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신의 힘이 사라진 마당에 아포칼리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만.”
“어차피 그들은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니. 확신해.”
이것만큼은 확답할 수 있었다. 페넬로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카리나 아포칼리타.
그리고 그녀를 따르던 또 다른 아포칼리타와 르네거.
그들은 모두 다 사라졌다. 그러길 수십 일이었다. 대륙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들이 힘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페넬로피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의 권능이 사라진 것.
오직 인간만의 힘으로 살게 된 것.
이것은,
“그녀는 이걸 바랐을 테니까.”
카리나가 바라는 것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살아가겠지. 불멸하는 존재로 영원을 살겠지.
그렇다면 어쩌면,
그녀가 신이 아닐까. 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 인간계에 군림할 수 있는 강력한 존재는 그녀뿐이었으므로.
피식.
페넬로피는 실소를 뱉었다.
“나는 사실 우리가 힘을 잃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명멸하는 시야 너머, 천천히 숨을 들이켠다.
“우리 스스로 설 수 있게 된 거잖아. 신의 힘을 빌려서가 아니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 부정할 수도 없다.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으므로.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페넬로피는 젖혔던 고개를 되돌렸다. 그리고 케셰트를 쳐다보았다.
“너는 안 되고.”
케셰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의 입이 열리기 전에 페넬로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같이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무식한 놈이 무슨. 그러다 칼 맞아 뒈지고 싶으면 네가 군림하든가.”
“…….”
케셰트는 혀를 찼다. 그리고 왈칵했던 어깨를 가라앉혔다.
죽음이라는 것을 비슷하게나마 겪어 본 그로서, 생명은 놓칠 수 없는 금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제아무리 권력자의 자리를 얻고 싶다고 한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는 잠자코 침묵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 아힌이었다.
“난 빠진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페넬로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투스와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그는 그 뒤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몸을 사리고 칩거하기에 이르렀다.
그 역시 목숨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신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그때부터 모두가 신을 저버린 게 아니었을까.
페넬로피는 의미 없는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럼 캄바이트의 수장과 나만 남아 있는 건데…….”
피에라는 어떻게 말을 할지 잘 모르겠다. 페넬로피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중얼거렸다.
“나를 말하는 것이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문가에 서 있던 피에라는 고개를 까딱이며 빙그레 웃었다.
“나 역시 기권하겠소.”
“당신이라면 자격이 있을 텐데요.”
아힌의 말이다. 그러나 피에라는 단호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화를 만끽하고 싶소. 나의 아이들을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도 들고.”
나의 아이들. 그녀의 밑에 있던 어린 마법사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페넬로피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짝, 손뼉을 치며 입술을 들어 올린다.
“그럼, 나밖에 없는 거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 새 길어 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팔짱을 낀다.
아힌, 케셰트, 그리고 피에라를 한 번씩 쳐다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평화롭게 모여 있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카리나.’
페넬로피는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찾는 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인간은 인간만의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정 바라는 것일 테니까.
“그럼 왕관이라도 만들어 와 봐. 허수아비라고 해도 기분이라도 좀 내게.”
어긋난 운명이었지만, 페넬로피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앞날에 무엇이 펼쳐져 있든,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 * *
“아, 싫다고!”
피에톤은 기겁을 하며 몸부림을 쳤다. 샐러딘을 떨쳐 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야, 아니. 다시 생각해 봐. 너한테 좋은 거라니까?”
“싫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나!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싫어!”
“와, 진짜. 네가 뭘 좀 모르네.”
샐러딘은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아포칼리타가 되면 불멸이라니까? 절대 안 죽는다니까? 그냥 평생 살면 되는 거라니까?”
그는 피에톤을 아포칼리타로 만들길 원했다.
마나핵은 제 몸에 박혀 있는 것을 이용해도 되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에톤은 거부했다. 샐러딘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좋고 나 좋은 거잖아. 응? 안 죽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그러니까! 난 죽어도 된다고!”
“거짓말. 인간은 모두 다 안 죽길 원하는데. 정말 생각 없어?”
“없다고, 미친 새끼야……”
피에톤은 지친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본래 전투가 끝나고 마탑으로 돌아가려 했던 그였다. 하지만 마탑에는 그 마법사들이 있었다. 누이를 괴롭혔던 이들.
그들을 죽이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들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피에톤은 그들의 곁으로 갈 수 없었다.
더불어 마력까지 사라졌으니…….
좋지 않은 꼴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여 길을 떠나려 할 때,
-야. 같이 가자.
샐러딘이 그를 붙잡았다. 승낙도 거부도 할 수 없었다. 피에톤은 너무도 당연히 샐러딘에게 끌려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세계의 끝.
황량한 대지와 황폐한 바람만이 가득한 곳.
하지만 마물의 기운이 사라진 덕분인지 곳곳에선 작은 잡초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년이 지나면 이곳도 푸르게 변하리라.
마법사인 그는 변화하는 자연을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변화하는 자연과 함께 자신도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싶었다.
불멸 같은 건, 결코 원하지 않았다.
저 미친놈 같으니라고. 피에톤은 욕설을 읊조리며 샐러딘을 노려보았다.
“르네거가 없어서 내게 집착하는 건 알겠는데 말이다.”
“뭐? 누가 그래? 아니거든? 절대 아닌데?”
피에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봐도 자신이 말한 이유가 맞았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을 거다. 불멸은 원하지 않아.”
그는 샐러딘이 말하기 전 빠르게 입을 열었다.
“하늘에서 내 누이를 만날 거다. 그것만 바라고 있으니.”
샐러딘은 커다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과거였다면 가족, 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만약 카리나가 죽었다면? 그리고 그녀를 죽음 끝에서나 만날 수 있다면?
자신도 따라 죽었을 거다.
피에톤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럼 그 누이인가 뭔가를 부활시켜 주면?”
샐러딘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부활시켜 줄게. 그럼 다 같이 영원을 사는 거야. 어때?”
“좀 닥쳐……. 제발.”
피에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재차 내뱉었다.
“너는.”
그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카리나가 그걸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테라스에 앉아 있는 카리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이가?”
샐러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사냥에 실패한 개처럼,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나도 알아. 아는데.”
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나가 너무 조용하단 말이야. 아무것도 안 해.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아니, 애초에 우리는 밥을 안 먹지만. 어찌 됐든 아무것도 안 해.”
이곳에 온 순간부터, 카리나는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다.
근근이 테라스를 통해 얼굴만 보일 뿐, 그 외에 그녀와 마주한 순간은 없었다.
카리나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슬퍼.”
슬펐다. 그래. 마음이 슬프고 몸이 슬펐다.
훌쩍.
샐러딘은 코를 들이마셨다.
“르네거가 죽은 것도 슬퍼.”
그가 죽었기 때문에 누나가 저러는 걸 테니까.
-카리나를 잘 부탁합니다.
르네거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샐러딘은 뜨거워지려는 눈가를 손등으로 벅벅 비볐다.
“헛소리.”
피에톤은 그런 샐러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죽긴 누가 죽나?”
손수건을 받아 든 샐러딘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올렸다. 피에톤은 핀잔 섞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놈은 안 죽었을 거다. 죽을 놈이었다면 진즉 뒈졌겠지.”
“……정말 그럴까?”
“그래. 그러니까 좀 떨어져라. 언젠간 그놈이 올 테니까.”
샐러딘은 커다란 눈을 껌뻑이다가, 손수건으로 눈과 코를 닦으며 떨어뜨렸던 어깨를 들어 올렸다.
그래. 이대로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내려진 동아줄을 붙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맞아. 살아 돌아올 테니까…….”
샐러딘은 피에톤의 팔을 붙잡았다.
“너도 쭉 살자. 같이.”
“아! 좀 꺼지라고!”
“왜, 좋으면서.”
“안 좋다니까!”
피에톤은 샐러딘을 뿌리치며 도망쳤다. 그런 그의 뒤를 쫓는 샐러딘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 보였다.
* * *
“또 저러네.”
샐러딘과 피에톤을 내려다보고 있던 카리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는 항상 히론이 곁에 있었기에 생긴 습관이다.
히론이 사라진 지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카리나는 습관을 지울 수 없었다.
타인에 의해 생긴 습관을 지운다는 건, 그를 잊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후우.
카리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으며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괴었다.
다소 메마른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양 뺨을 스쳐 지나갔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샐러딘과 피에톤이 떠드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들려왔다. 카리나는 가만히 눈을 내려 감았다.
알고 있다.
이 방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샐러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 간의 거리는 한없이 멀다.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 아직까지는.
히론이 곁에 없고, 르네거가 곁에 없다는 사실은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라도 손을 뻗으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을 뻗다가도 깜짝 놀라 되돌리기가 수십 번.
그럼에도 그녀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 당신은 죽지 못한다고.
각인된 그 말은 거듭해 떠올랐다. 눈을 뜨고 있을 때에도, 감고 있을 때에도.
처음에는, 화가 났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르네거가 미웠다. 미워 미칠 것만 같았다.
너는 왜 나의 안식을 빼앗아 가냐고, 왜 또 네 멋대로 나를 살려 두냐고, 너는 왜 내 선택을 무시하냐고. 그리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분노에 의한 눈물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그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혼자 남는 것이라는 걸.
언젠가는 잃어버릴 그들, 아무리 불멸이라 한들 헤어질 수도 있는 그들.
그렇게 헤어지고 잃어버려 슬퍼할 바에, 나 혼자 먼저 죽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말로는 영원한 안식을 바란다고 했으나,
마음으로는 영원한 회피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죽길 바라지 않는 걸 알고 있습니다.
르네거는, 그렇게 말했던 것일까. 나의 마음을 알고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며 동시에 눈이 뜨거워졌다.
너는 알고 있으면서, 내가 혼자 남는 걸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혼자 가 버린 것인가.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올려 떴다. 그리고 제 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손. 맹약의 증표 따위야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이 모든 감각이 허황된 것인 줄 알면서도, 카리나는 이따금씩 이렇게 손을 내려다보았다. 르네거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아 있을까.’
그녀는 피식 실소했다.
알고 있지 않은가.
죽었으리란 것을.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 돌아와 내 손을 잡아 줄 것만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서도.
‘나는 이제…….’
그녀는 수평선 너머를 내다보았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사랑하는 샐러딘이 남아 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그와 무엇을 하고 그와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언제나 죽음이었으니까.
죽음이라는 목표를 저버린 삶.
이는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지독히도 히론이 보고 싶어졌다. 르네거를 안고 싶어졌다.
‘그들을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든 일은 속단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카리나는 확신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을 지울 수 없으리라고.
평생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살 줄 알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녀는 사랑하고 있었다. 언제나.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탓이지.
카리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오늘은 나가 볼까.
나가서 샐러딘을 만나 볼까.
한 걸음씩, 차분하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을 지울 수는 없더라도 마음속에 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날개를 활짝 펼 때였다.
휘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눈이 감길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살갗이 까질 정도로 결이 남달랐다.
윽.
카리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때였다.
“…….”
무언가가 등에 닿았다. 무언가, 체온이 느껴지는 무언가. 따뜻한 무언가.
샐러딘인가.
아니, 그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저 아래에서 여전히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카리나는 그대로 굳었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이 멎었다.
“카리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온.
익숙한 품.
카리나는 아주 천천히,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
르네거가 눈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무해한 얼굴을 한 그가, 여전히 새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가, 눈앞에 보였다.
카리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천상인가 싶어 손을 뻗었으나, 손 끝에 살이 만져졌다.
뺨을 만지고, 눈을 만지고, 코를 만지고, 입술을 만진다. 감촉이 느껴졌다.
“르네거.”
네가 대체 어떻게.
입안에 말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나온 건 행동이었다.
카리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르네거 역시 당연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힘이 들어간 팔이 느껴졌다. 절박함이 와닿았다. 그리움이 배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숨이 닿는 거리에 와서야, 그의 음성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우리는 함께, 바깥으로 나갈 거라고.”
입술이 포개졌다. 역시 익숙한 감촉이었으나, 또한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 하는 입맞춤처럼,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붙들었다.
쩌적.
르네거의 품에 있던 새하얀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