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혼자 머리를 굴려 봐야 별 소용도 없었다. 답을 줄 사내는 자신과 말을 잇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보다 중한 일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어찌 내년 봄까지 비를 내릴 수 있을까. 가능한 한 산주님과 빨리 친분을 쌓아, 부탁을 드리는 방법뿐일 테지.’
노인이 두고 간 걸레를 집어 들었다. 몸이라도 바삐 움직이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질 것 같았다.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니 다른 것은 생각지 말자.’
방 안을 깨끗하게 닦은 뒤, 화로 옆에서 불을 쬐었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놓이니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간신히 잠기운을 떨친 서화는 문을 살짝 열었다. 벌써 주위는 어둑해진 채였다.
산속의 해는 달에게 잡힐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꼭대기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다. 날이 꽤나 어둑해져 왔지만 사내도 노인도 서화를 찾지 않았다.
무엇을 어찌하면 좋을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지 혹은 노인을 찾아야 하는지. 낯선 곳에서의 낯선 시작이 아니던가. 서화는 걱정스레 방 안을 맴돌 뿐이었다.
“석반 들러 오시게.”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급히 마루로 나갔다. 노인은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노인이 서화에게 이리 오라 손짓을 해 댔다. 재빨리 신을 신고선 노인에게 향했다. 노인은 느릿느릿 옆채로 향했다. 그의 거처로 보이는 또 다른 별채 마루에는 소박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얼마 만에 말동무를 앉혀 놓고 밥술을 뜨는지 말이야.”
먼저 상 앞에 앉은 노인이 서화에게 앉으라 턱짓했다. 눈치를 보던 서화가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굴 가득 미소 지은 노인이 탁주가 든 잔을 건넸다.
“밤은 길고 추우니 한잔 마시고 몸을 덥히는 게 좋다네.”
노인은 두 개의 잔을 한가득 채웠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들게.”
노인은 잔에 든 탁주를 한숨에 들이켰다. 힐끔 눈치를 보던 서화 역시 탁주로 목을 축였다. 술의 쓴맛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처럼 혀끝에서 맴돌았다.
“이곳에 발을 디딘 인간은 자네가 처음일세.”
술잔을 몇 번 더 비운 노인이 불현듯 말을 꺼냈다. 아무 말 없이 찬과 국으로 배를 채우던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대충 눈치를 챘겠지만, 산주님께서도 나도 인간은 아니라네.”
“……인간이 아니면 무엇이시란 말씀입니까?”
“나야 예전에는 인간이었다만, 이제는 인간이라 하긴 그렇지. 설이 저 아이는 범피를 뒤집어쓴 영물이고.”
노인이 마루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설이를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산주님께서는…….”
흠흠 목을 가다듬던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건 내가 말하는 것보다 산주님께 직접 듣는 것이 나을 것 같구먼. 내가 괜한 입방정을 떨어서는 아니 될 테니.”
술기운이 도는 것인지 노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중얼거리던 그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네 이름이 무언가? 한 지붕 아래 지내는데 이름은 알아야지.”
“서화라 합니다.”
“서화면 눈이란 뜻이 있긴 하다만, 풍년을 부르는 꽃으로도 쓰이지 않는가.”
“제가 태어날 때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께서 풍년을 간절히 바라셨는지 이름을 이리 지으셨습니다.”
“어찌 되었건 눈이란 의미구먼. 우리 설이도 눈 설을 쓴다네. 이것도 다 인연이겠지. 배는 좀 채웠는가?”
연신 술만 들이켜던 노인이 서화에게 물었다. 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마지막 잔을 들이켜고 상을 정리했다.
“나는 매일 새벽에 약초를 캐러 간다네. 아침에 내가 보이지 않아도 심려치 말게나.”
“제가 도울 일은 없을는지요.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자네가 산주님께 약을 가져다드리겠는가?”
서화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술기운에 무뎌진 혀로 말을 이었다.
“아차차, 오늘 밤에 설이를 좀 재워 주게. 어제도 무엇이 그리 걱정되는지 밤새 잠을 설친 아이야.”
부드럽게 미소 지은 노인이 서화의 다리 위에 설이를 올려 주었다.
가볍게 상을 든 노인은 서화에게 어서 쉬라 재촉했다. 여전히 졸고 있는 설이를 조심스레 안아 든 서화가 별채로 향했다.
주인 없는 방에 먼저 자리 잡은 찬 기운이 서화를 반겼다. 설이를 침상 위에 올리고선 화로에 불을 올렸다.
둥그런 놋쇠 화로를 청동 용이 굽이굽이 싸고 있었다. 마치 푸른 용이 붉은 불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화로를 바라보던 서화가 손을 가까이 대 온도를 확인했다.
“설이야, 착하지.”
작은 짐승은 둥그런 배를 드러낸 채 늘어져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잘 수 있도록 설이를 이불 안으로 옮겼다.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흰 꼬리가 꿈틀거리며 서화의 손을 간질였다.
몇 번 쓰다듬어 주자 설이의 숨이 고르게 변했다. 서화는 침상에 몸을 눕혔다.
길고 긴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전과 다른 하루가 시작되겠지.
설이를 쓰다듬던 서화는 서서히 잠들었다.
* * *
“벌써 일어났는가.”
마루에 앉아 있던 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화의 품에는 설이가 안겨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인지, 도롱도롱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설이가 자네를 잘 따르니 내 맘이 다 편하구먼.”
설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를 잃은 아이라네. 마음이 쓰일 때가 많아.”
이곳에서 부모 없이 홀로 머무는 것을 봐 대충 예상은 했던 바였다. 그러나 노인의 입으로 확인받은 것은 또 달랐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앞으로 여기 계속 머물 터이니 산주님께 자주 얼굴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노인이 서화에게 반질반질한 나무 쟁반을 건넸다. 쟁반 위엔 검은 액체가 담긴 사기그릇이 올려졌다.
“산주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설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서화가 물었다.
“장지문 앞에서 약을 가지고 왔노라 고하고 기다리면 문이 열릴 걸세. 지금쯤 책을 읽고 계시거나 글을 쓰고 계실 테니 상 위에 올려놓고 나오면 된다네.”
잘된 일이었다. 지금 바로 비를 내려 달라 말을 꺼내긴 시기상조임이 분명했다. 사내를 설득하기 위해선 친분을 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서화가 조심스레 부엌 밖으로 향했다. 혹여나 약을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발걸음은 느리기만 했다.
원래도 넓디넓은 저택이었다. 몇 개가 되는지 모를 중문을 수없이 지나쳤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지던 차, 이윽고 낯익은 마당에 닿았다.
목소리가 작으면 장지문을 뚫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쟁반을 확인한 서화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산주님,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장지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리가 너무 작았나? 목을 가다듬은 서화가 소리를 높여 한 번 더 고했다.
“산주님, 약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지문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천천히 열렸다. 문을 열어 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놀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선 잔뜩 굳은 얼굴로 돌계단을 올랐다.
문 안에는 긴 복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 빛이 밤처럼 어두운 복도를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서화는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복도 끝엔 굳게 닫혀 있는 붉은 문이 자리했다. 필시 저곳이 그가 머무는 곳일 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서화는 앞으로 향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복도가 끝을 보이자 붉은 문이 마치 방문객을 알아챈 듯 조용히 열렸다. 문 안쪽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화는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저절로 열린 것에도 적잖이 놀랐는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으니까.
느릿느릿 타고 있는 세 개의 초가 풍등처럼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공간을 어렴풋이 비추는 불들은 마치, 칠흑 같은 밤에 뜬 세 개의 태양 같았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채 불을 바라봤다.
이윽고 불덩이가 조금 아래로 움직여 기다란 탁상 위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화가 시선을 돌렸다.
탁상 끝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사내였다.
그는 서책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짓, 고요한 눈빛, 느린 숨결. 가는 흰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도 은하수처럼 길게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또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서화는 자리에 박힌 양 가만히 사내를 바라봤다.
“글을 배운 적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낮은 목소리가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당히 읽을 줄은 압니다.”
“그럼 먹을 갈 줄도 알 것이고.”
그는 여전히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오른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앞으로 나아간 서화가 약이 담긴 사기그릇을 사내 옆에 내려놓곤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서화와 약을 번갈아 보던 사내는 작게 실소했다.
영문을 알 길 없는 서화가 사내를 조심스레 응시했다. 웃음을 거둔 그가 사기그릇을 들었다. 옅은 한숨 끝, 향만 맡아도 쓰디쓴 약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대는 내 옆에서 먹을 갈아.”
서책을 치운 그는 탁상 위에 모포를 깔았다. 새까만 모포 위에 선지와 문진이 올라왔다. 서화는 제 앞에 자리한 연적 위로 손을 올렸다.
먹이라면 여태껏 수없이 갈아 왔다. 약한 몸으로 태어난 탓에 무예에 능한 대부분의 북방인들과 달리 글공부에 능한 서화였다. 그런 서화에게 먹이란 너무도 익숙한 것이지만 혹여 실수할까 걱정되었다. 서화의 손끝이 작게 떨려 왔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물끄러미 서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손 떨림을 애써 누르며 벼루 위에 물을 올렸다. 천천히 연적을 내려놓고선 조심스레 먹을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