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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는 그림자-48화 (47/100)

48화.

본디 인간과 다를 바 없던 피부에는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그의 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본신으로 돌아갔다. 망거산 한쪽에 거대한 이룡이 그 모습을 보였다.

현음은 못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가능한 한 많이, 몸에 물을 품었다. 물을 머금은 몸을 불에 던질 셈이었다.

이것이 먹힐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마치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산이 타들어 가는 것을, 영물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볼 순 없었다.

있는 대로 물을 머금은 그가 못 밖으로 나갔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룡이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신 앞에선 한낱 이물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영묘주도 가지지 않은 이룡이었다.

그러나 현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불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온몸이 상처로 뒤덮여 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금의 불이라도 더 끄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이 닿아서였을까.

순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물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백화였다. 그런 백화가 조금이나마 비에 사그라져 갔다.

‘신께서…….’

현음은 신을 떠올렸다. 신이 망거산을 지켜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필시 불을 끌 수 있으리라. 죽음과 같은 고통 앞에서도 현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재차 불을 향해 몸을 던졌다.

불에 달구어진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현음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졌다. 현음의 노력에, 그리고 굵어지는 빗방울에 불은 점차 기세가 꺾여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망거산 전체를 삼키던 불은 어느새, 그 자취를 모두 감추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현음이 쓰러지듯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산신이 현음에게 달려왔다. 현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현…… 현음 님.”

산신은 현음 앞에서 절규했다.

“현음 님의 외양이…….”

어찌 그리 변하셨나이까…….

외양이 변했다니. 간신히 몸을 일으킨 현음이 못으로 다가갔다. 가지고 있던 물을 대부분 잃어 작아진 못에 그는 얼굴을 비추었다.

현음의 얼굴이 굳었다.

흑단 같던 그의 머리카락은 희게 센 채였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과 속눈썹까지 모두 희게 세어 있었다.

“백화를 끈 것치곤 값이 싸구나.”

현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목숨을 내던진 채 백화를 모두 끄고, 망거산을 구했다. 머리카락 색 정도는 충분히 내어 줄 수 있었다.

“현음 님…….”

누군가가 현음의 이름을 불러 왔다. 현음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호연이었다.

화마를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것인지, 호연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현음은 급히 호연에게 다가갔다.

기력이 다한 호연은 힘없이 쓰러졌다. 현음은 몸을 내려 차갑게 식은 호연의 손을 잡고서 급히 체온을 나누었다. 그러나 호연의 몸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것처럼.

“저와…… 범소의 아이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호연이 팔의 힘을 풀었다. 품 안에서 어린 백호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백호는 연기를 많이 마신 것인지 작게 기침해 댔다.

“부디…….”

“내 이 아이를 거둘 것이니 걱정 말거라.”

현음은 조심스레 어린 백호를 품에 안았다. 백호는 재차 기침해 댔다.

“이름을…… 설…… 이라 지었사온데…….”

호연은 아이가 설처럼 유하게 크길 원했다. 그랬기에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제 이름을 붙여 달란 설의 요청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그토록 선하다 믿은 설에게 이리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호연은 섧은 미소를 지었다.

“현음 님…… 부탁드리옵니다…….”

“……그래. 잘 알겠다.”

“감사…… 하옵니다…….”

간신히 인사를 전한 호연은 빙그레 웃었다. 가늘던 숨이 서서히 멎어 갔다.

그제야 눈을 뜬 어린 백호는 제 어미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잔뜩 발톱을 세우고선 소리를 높였다. 현음은 그런 백호의 등을 토닥였다.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백호의 검은 눈동자에 굵은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가, 괜찮다. 걱정하지 말고 이리 온.”

산신은 어린 백호를 달래었다. 본능적으로 제 어미의 죽음을 확신한 어린 백호는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부짖었다.

“현음 님, 괜찮으시다면 이 아이를 제게 잠시 맡기시옵소서. 하실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어린 백호가 현음의 품에서 산신의 품으로 옮겨 갔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어린 백호를 달래며, 산신은 범소와 호연의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현음은 망거산 밖으로 향했다.

설이 어찌 되었는지 여간 염려되는 게 아니었다. 불을 땅에 떨어트리자마자 쓰러지지 않았던가. 신의 노여움을 산 것이 분명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터인데.’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간절히 바라며, 그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망거산 앞, 소운을 비롯한 영물들은 이제나저제나 현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현음 님……!”

현음의 도착을 알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현음의 외양을 본 그들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마지막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모습은 저렇지 않았건만. 몇몇은 입을 틀어막고, 또 다른 몇몇은 탄식을 자아냈다.

“설은 어디에 있느냐.”

그는 영물들의 반응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설을 찾았다.

“여기 계시옵니다. 여전히 의식은 없으시옵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소운이 재빨리 답했다. 현음은 급히 영물들의 사이를 헤쳤다.

설이 보였다. 그들의 말대로 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였다.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고, 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마치 죽은 자처럼.

“무슨 연유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게야.”

도대체 왜…….

현음은 설의 옆에 몸을 내렸다. 그는 눈물 자국이 흥건히 남아 있는 뺨을 쓰다듬었다.

“……현음 님.”

신이 도운 것이었을까. 애절한 현음의 손길에 설이 기적처럼 의식을 차렸다.

“그래, 그래. 내가 왔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현음은 설을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사라질 것을 염려하듯.

“현음 님…… 어찌하여…….”

설은 현음의 변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분명 검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희게 센 채였다. 머리카락뿐일까. 눈썹과 속눈썹, 게다가 피부까지 하얘진 상태였다.

“별일 아니니 아무 염려 말거라.”

현음은 한사코 모른 척, 말을 돌렸다. 설은 그의 눈빛에서 거짓을 읽었다. 별일이 아니라는 건 결코 말이 되지 않았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설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현음은 되레 설을 토닥였다. 그는 그저 설이 제 변한 모습으로 인해 많이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외양이야 어찌 되든 그에겐 하등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염려하는 건 오직 설의 안위뿐이었으니까.

“제가…….”

설이 현음의 손을 잡아 왔다. 그의 손에는 반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은 미련 없이 버리고 왔거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현음은 설의 손을 감싸 쥐고서 온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이냐고, 그가 자신을 비난했다면 마음이 가벼웠을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건만. 현음은 이전과 같이 한결같기만 했다. 그래서 슬펐다. 그리고 괴로웠다.

“제가…… 욕심을 부렸습니다.”

설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현음 역시 그러한 설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몸을 더욱 깊이 안아 왔다.

“아무 말 말거라. 그 어떤 것도 너의 잘못이 아니다.”

현음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설은 분명 선한 성품을 가진 이였다. 절대로 타고나길 악한 게 아니었다. 주변이 설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설을 이리 만든 것은 그녀를 학대한 다른 이룡들이었고, 또 무엇이든 허용해 준 자신이었다.

설에게 죄가 있다면 자신 역시 그 죄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

어차피 다 끝난 일이었다. 망거산의 불은 사그라들었고, 설과 자신 역시 목숨을 구했다. 그는 설을 위해 망거산에서 수많은 영물이 속절없이 죽어 갔음을 애써 무시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설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리도 이기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설아, 혹여 아프더라도 조금만 참거라.”

……무엇을.

설이 현음에게 답을 하기도 전, 그는 입을 맞추어 왔다.

필시 나쁜 것들이 몸 안에 잔뜩 들어가 있을 터였다. 설의 몸을 괴롭히는 것들을 한시라도 빨리 빼내어야만 했다.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설이 다시금 현음의 손을 잡아 왔다. 현음 역시 그런 설과 손을 맞잡았다. 두 손이 하나라도 된 듯 엮이고 얽히었다.

설의 볼가가 살짝 붉어졌다. 가만히 입술을 떼어 설이 숨을 쉴 수 있게 해 준 현음은 재차 입을 맞추었다.

기나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맺은 이는 현음이 아닌 설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직 빼내어야 할 것이 많다. 잠시만이라도…….”

“현음 님……!”

소운이 급히 외쳤다. 그는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소운뿐 아니라 모여 있던 영물 모두 사색이 되었다.

현음의 입가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운은 급히 현음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현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태연한 반응과 달리 그의 낯은 파리해져 있었다. 단 한 번도 다치거나 병치레를 한 적 없는 그였다. 그런 현음이 누가 봐도 사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음은 개의치 않았다. 망거산의 불을 끌 때부터 포기한 몸뚱어리였다. 어차피 내다 버린 몸, 독을 조금 더 먹는다 한들, 별문제야 있겠나 싶었다.

“조금만 더 빼내면 될 것이다. 염려 말거라.”

현음은 설에게 재차 입을 맞추었다. 염려 말라는 그의 말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맞잡은 그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독을 중화하지 못한 채, 몸에서 퍼져 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설은 어렴풋이나마 제 목숨이 끝에 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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