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52화 (51/100)

52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서화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극약을 마셨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서화의 손톱엔 독이 가득 찬 채였다. 손톱에도 독이 저리 찼을 정도면 몸 안은 어떠할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현음이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대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

서화가 상황을 파악도 하기 전, 그는 서화에게 입을 맞추었다.

얼마 만에 닿는 고운 이던가. 현음은 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어 서화의 뺨을, 목을 감싸 쥐었다.

머릿속이 희게 탈색되어 갔다. 저와 이리도 깊이 닿았지만, 서화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음은 미칠 것만 같았다.

길고 긴 입맞춤은 끝나지 않을 듯 이어졌다.

조잡한 뱀독 따위는 짧은 입맞춤으로도 쉽게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현음은 제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서화와 닿고 싶었으니까.

“당분간 이 시간에 오도록 해.”

그는 욕심을 조금 더 부리기로 했다.

“이제 돌아가거라.”

축객령을 내리고서도 현음은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

또다시 설과 닿을 수 있단 사실이 머릿속을 깊게 잠식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매 저녁, 둘은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서화의 입술에 제 입술이 닿을 때면 현음은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세상에 서화와 자신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어쩌면 곧 닥쳐올지도 모를 고난을, 이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그래서 참으로 좋았다.

보름이 찾아왔다.

열은 평소와 비교할 바 되지 않게 높이 올랐다. 아마도 서화를 거둔 제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벌이리라, 현음은 짐작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서화를 거두지 않고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볼 바에야, 제 몸의 고통이 더해지는 것이 비할 데 없이 나았으니까.

열이 오르자 시야가, 정신이 흐려졌다. 과거와 현재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는 제 옆에 자리한 서화를 붙잡았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이별로 허비했던가. 이번만큼은 떠나지 못하도록, 서화를 꼭 붙잡았다.

열이 내리고 난 뒤, 그는 서화에게 단호히 선을 그었다.

혹여나 서화가 과거를,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번 생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마음이 기우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현음은 제 마음이 가는 대로 따랐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화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고운 낯에 입을 맞추었다. 독을 중화한단 핑계는 멀리 치워 버린 지 오래였다. 독이 아니었더라도 목숨보다 소중한 서화에게 절로 입을 맞추었을 테니까.

그렇게 별다를 것 없는, 그러나 너무도 귀한 하루하루가 고요히 흘러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화는 조금씩 기억을 되찾아 갔다. 꿈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서화는 어리석지 않았다. 제가 꾸는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다.

꿈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또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서화는, 모든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 * *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것이냐.”

서늘한 체온이 뺨에 닿아 왔다. 서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현음이었다.

제가 자는 내내 옆에서 자리를 지킨 그였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침상 옆에 앉은 채였다.

“어찌하여 낯이 이리도 어두울까.”

현음이 서화의 뺨을 감싸 쥐고선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엔 깊은 염려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현음 님.”

말을 잇고자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화는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나쁜 버릇이 들었구나.”

그가 서화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고선 옅은 미소를 보였다.

“버릇을 고칠 때까지 이리할 생각이다. 이것이 싫다면 빨리 고치도록 해.”

서화는 아무런 답도 내어놓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부터 말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고. 당신의 혼으로, 아니 망거산에 있는 모든 혼으로 영묘주를 만들려 했던 악독한 기억을 모두 떠올려 버렸다고.

그런데도 당신은 어찌 나를 이리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냐고. 내가 밉지도 않냐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수십 개의 말들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순서를 정해 댔다. 그러나 서화가 뱉을 수 있었던 것은.

“……피곤치 않으십니까.”

그저 그의 안부를 묻는 것뿐이었다.

“염려치 않아도 된대도.”

“여태껏 한 번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상에 누우셔요. 이번엔 제가 현음 님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서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선 제 옆자리를 작게 두드렸다. 잠시간 서화의 손을 바라보던 현음이 침상에 몸을 눕혔다.

“좋은 꿈만 꾸시도록 제가 잘 지키겠습니다.”

“나쁜 꿈이 오면 내쫓을 셈이더냐.”

서화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서화가 현음의 손을 잡았다. 제 손보다 배는 큰, 그리고 서늘한 손을 잡고선 그의 낯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는 현음 님이 참 좋습니다.”

“그러하더냐.”

“하나, 현음 님께서 저에게 주신 마음의 크기가 너무도 커 제 것은 작게만 느껴질 따름입니다.”

다시금 숨을 내쉰 서화는 등불을 껐다. 객실 안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잠시간 헤매던 눈은 금세 달빛을 잡아내어 현음의 낯을 응시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저 때문에 본디 색을 잃고 희게 바랜 속눈썹이 가지런히 모였다. 어찌하면 좋을까. 기이하다고만 여긴 그의 외양이 제 욕망으로 인한 결과물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의 낯을 바라보기만 해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서늘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전생에선 언제나 따뜻하던 손이었거늘. 병색 짙은 서늘한 체온의 원인도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품어 준 그.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깊고도 깊은 마음.

미칠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온몸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 * *

“편히 주무셨습니까.”

“그대가 내 옆을 지켜 주는데 어찌 편치 않을 수 있을까.”

그의 흰 속눈썹, 흰 머리카락 위로 햇빛이 부서졌다. 서화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이리하면 내가 어찌한다고 하였지.”

현음은 장난스레 서화와 입을 맞추었다. 잠시간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그 순간도, 서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혹여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현음의 낯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의 곧은 시선이 서화에게 향했으나, 서화는 차마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저, 현음과 맞잡은 제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와 계속 함께 있고 싶건만. 이기심이 자꾸만 차올랐다. 저만 모른 척하면 끝이다. 현음은 과거의 일을 그대로 묻으려는 것 같았다. 자신만 이대로 모른 척 그와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정말 괜찮을까.

노인의 팔에 남겨진 화상 자국과 수백 살을 먹고도 아직 어리기만 한 설이가 떠올랐다. 설이 역시 자신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리고 현음은…….

그토록 강한 이룡임에도 백화로 인해 큰 내상을 입었다. 온몸이 희게 변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매 그믐 고열에 시달려야만 했다. 서화는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망거산을, 수많은 생명을 앗은 제가 무슨 염치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겠는가.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자신은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서화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희디흰 사내와 눈을 맞추었다.

“……현음 님.”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보태었다. 조금의 용기라도 더 얻어 보려는 셈으로.

“제가 꾼 꿈을 그저 꿈으로 여기라 하셨지요.”

그 역시 서화와 맞잡은 손에 힘을 보태었다.

“기억이…… 전부 돌아온 듯합니다.”

서화는 한숨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젠 도무지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었다. 급히 고개를 숙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아마 염치없는 눈물이 밀고 나오고 있으리라.

“……그게 정녕 사실이더냐.”

언제나 고요하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갔다. 아마도 큰 동요를 하고 있을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겐 그럴 자격도 없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간신히 답을 한 서화가 고개를 주억였다.

현음이, 그가 급히 서화를 안아 왔다. 제 품 깊이 서화를 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거라. 다 지난 일이다.”

현음은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이라고 수십, 수백 번을 반복했다. 그의 옷깃이 서화의 눈물로 젖어 갔다. 현음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서화를 더욱 깊이 안아 왔다. 평소보다 빨라진 그의 빨라진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그의 품에 안길 자격이나 있을까. 자신은 그를 죽이려 들었던 이다. 목숨을 거두어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건만. 현음은 서화를 여전히 정인처럼 대할 뿐이었다. 이래선 아니 되었다. 자신은 죗값을 치러야만 했다.

서화는 마음을 굳혔다.

“……현음 님.”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은 서화가 현음의 이름을 불렀다.

“저 하나로 너무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마 그 수를 세지도 못할 것이다. 서화는 섧게 웃었다.

“설이도, 어르신도 다 저의 과욕으로 크나큰 상처를 얻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현음 님께서도…….”

서화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색이 곱다고,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듯하여 좋다던 그의 흰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서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리석게 눈물을 흘리며 때 묻은 과거를 반성하는 것뿐이었다.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아무런 말 말아라.”

그가 서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이마를, 코끝을, 뺨을 거쳐 입술로 다가왔다.

그러나 서화는 그의 입맞춤을 피했다. 받을 자격이 없었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