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68화 (67/100)

68화.

멀리서 볼 땐 그저 노리개 몇 개만 있는 줄 알았건만. 자세히 가서 보니 노리개뿐 아니라 온갖 장신구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반짝이는 패물에 설이는 시선을 전부 뺏겨 버렸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원래도 이리 예쁜 것이 많습니까?”

설이가 놀라움을 담아 서화에게 물었다.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장신구를 많이 팔지.”

“산 아래는 어떤 곳인가 했더니, 참으로 좋은 곳이에요.”

장신구들을 살피던 설이가 노리개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러고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것으로 할까?”

“네, 이것으로 하고 싶어요.”

설이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던 서화가 노리개값을 치렀다. 서화가 값을 치르는 동안 설이는 냉큼 노리개를 달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설이가 선택한 노리개는 백호인 제 본신의 색과 같았다. 흰색과 검은색. 두 색이 알맞게 섞여 있는 노리개를 달고 나니, 기분이 이리도 좋을 수 없었다.

“다른 갖고 싶은 것은 없고?”

“네, 이걸로 충분해요.”

애당초 무언가를 살 생각도 없던 설이였다. 노리개를 받은 것만 해도 큰 선물인데 다른 것이 필요할 리 만무했다. 가장 좋아하는 서화와 이렇게 바깥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뿐이었다.

“그럼 책방으로 가 보도록 할까?”

서화가 설이의 손을 잡으며 말해 왔다.

“책방이요?”

책방이면 책을 파는 상점일 터인데. 설이의 낯에 의문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제가 알기론 이미 저택에는 아주 커다란 서고가 있다. 서고의 규모에 맞게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데. 어찌하여 책방을 가는 것일까.

“서고에 없는 책이 있어서 사 보려고 해.”

서화가 궁금해하는 설이에게 다정히 말해 주었다. 그 큰 서고에도 없는 책이 있구나. 내심 놀란 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책방은 번화가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했다. 게다가 크기도 작지 않은데, 상당히 붐빌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이미 책방 안에 있었다. 혹여나 서화를 놓칠세라, 설이는 서화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데 서화 님. 어떤 책을 사실 건가요?”

설이가 서고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이런 책.”

서화가 몇 발자국을 옮기더니,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이어 설이에게 건넸다. 책을 받아 든 설이는 냉큼 책장을 넘겼다.

“…….”

책장을 넘기면 무엇 할까. 설이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책을 들여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이다. 설이는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지어 댔다.

“서화 님, 이게 무슨 책인가요?”

“아이에게 읽어 줄 때 사용하는 이야기책이지.”

“아이에게 읽어 준다고요?”

“이제 아영도 말을 배울 때가 되었으니, 책을 읽어 줄까 해서.”

그제야 서화의 뜻을 알아챈 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어리지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영이 좋아할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설이는 냉큼 서고에서 책을 꺼냈다. 이미 상상 속의 자신은 아영에게 온갖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제 무릎에 아영을 앉혀 놓고 이야기책을 읽어 주면 참으로 좋으련만.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설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화 님.”

잔뜩 실망한 설이가 울상을 지으며 서화를 불렀다.

“글을 익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글공부를 할 마음이 생긴 것이니?”

노인이 그토록 글공부를 하라고 말해도 들은 척하지 않던 설이였다. 그런 설이가 제 입으로 먼저 글공부 이야기를 꺼내자 서화는 반색했다.

“네. 저도 아영에게 책을 읽어 주고 싶어요.”

설이가 솔직한 제 심정을 내비쳤다. 그러자 서화는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꼬리가 휘도록 웃음을 만들어 냈다.

“저택의 서고에도 책이 많긴 하지만, 아무래도 네가 읽을 책을 더 사 가는 게 좋을 듯해.”

서화가 이야기책 몇 권과 아이들이 처음 글을 배울 때 쓰는 책을 서고에서 꺼냈다. 책만 읽을 줄 알면 할 수 있는 놀이가 늘어나는 셈이 아닌가. 설이는 세상을 다 가진 양 미소 지었다.

책값을 치르고 나서 다시 번화가로 들어섰다. 혹여나 누가 제 책을 빼앗아 갈까 걱정되는 듯 설이는 책을 품에 꼭 안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주변에 있는 것들이 그리도 눈에 많이 들어왔건만. 이제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책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글을 익히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 달? 아니면 두 달?’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글공부를 좀 할걸, 후회가 막심했다. 뒤늦은 후회를 한 설이가 품에 안긴 책을 바라봤다.

‘빨리 글을 익힐 거야. 한 달 안에는 이야기책을 다 읽을 수 있도록.’

어차피 넘치는 게 시간이었다. 열심히만 하면 한 달 안에 책 한 권 정도는 술술 읽어 낼 수 있으리라, 설이는 그리 믿었다.

세상일이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이는 제가 글을 금세 배울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공부를 한다는 기쁨에 침상에 누울 때도 책을 옆에 두고, 식사할 때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 말이다.

이 정도의 열정이면 책 한 권쯤은 줄줄 읽어 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설이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열정이 크다고 지식의 폭이 함께 넓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이는 울상을 지었다. 분명 어제 익힌 것이 맞긴 한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글공부가 진척된 지, 세 달 그리고 보름. 서화와 현음까지 제 글공부를 도와주었지만, 결국 설이는 책 한 권을 떼지 못했다.

‘도대체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설이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눈에 익은 글이고, 어제 자기 전까지 달달 외웠건만. 어찌하여 이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지금쯤이면 아영에게 온갖 이야기책을 다 읽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거위를 너무 많이 먹어서 머리가 새처럼 아둔해진 걸지도 몰라.’

그래. 거위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걸 테야. 설이는 제 머리의 아둔함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괜스레 거위를 탓한 설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라면 오늘, 아니 내일도 글공부에 진전이 없을 게 뻔했으니까.

설이가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스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설이는 저도 모르게 장지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러곤 인상을 쓰고 말았다.

장지문 밖, 설이 그토록 미워하는 제운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제운 님이 어찌 여기에 오셨습니까.”

설이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선 제운을 바라봤다. 제운의 낯 역시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오고 싶어 온 줄 아느냐.”

“오기 싫으시면 아니 오시면 될 것을, 왜 굳이 오셨습니까.”

설이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제운에게 답했다. 그러자 제운이 코웃음을 쳤다.

“아둔한 너에게 글을 가르치라 형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셨다.”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너에게 글을 가르치러 왔다고 했다.”

자신에게 글을 가르치다니.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었다. 설이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저는 제운 님과 글공부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어찌 저런 이와 글공부를 하겠는가. 설이는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장지문으로 다가갔다.

“아영에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이 네 목표라 들었다. 아니더냐.”

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이는 제운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제가 아영에게 책을 읽어 주든 말든 그게 제운 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없을 리 있나. 아영은 내 조카인데.”

제운의 눈빛 역시 곱지는 않았다.

“나인들 시간을 뺏겨 가며 너와 글공부하고 싶은 줄 아느냐.”

제운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설이는 이미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열흘 뒤에 다시 내려올 생각이다. 그때까지 마음을 정하도록 해.”

열흘이라니. 그렇게 긴 시간을 줄 필요가 있을까. 열흘을 준들 열 달을 준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자신은 제운과 글공부를 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 * *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이 흘렀으니 글공부에도 진척이 있어야 하거늘. 안타깝게도 설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설이도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제운 그자가 글을 잘 가르치는 이면 어쩌지?’

혹여나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책을 술술 읽어 낼 수 있도록 글을 가르쳐 줄지.

‘오늘은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리 여겼건만. 이제는 머릿속에서 제운에게 글을 배우자는 생각과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쉴 새 없이 싸워 댔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제운 같은 이에게 글을 배우는 것이 어찌 달가울까. 그러나 제 상황을 봐선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닌 듯했다.

‘자칫하다간 아영보다 글을 늦게 익힐지도 모르잖아.’

아이들은 금세 자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제운에게 글을 배우는 것보다 언니로서 동생보다 글을 늦게 익히는 것이 더 자존심 상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눈 딱 감고 배우자.’

그저 글만 배우는 것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설이는 제 자신을 설득해 댔다.

그렇게 열흘이 되는 날이 밝았다.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친 설이는 침상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조반 들러 오거라.”

장지문 밖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씻고 머리를 단정히 정리한 설이가 방을 나섰다.

“제운 님과 글공부를 할 거라면서?”

노인이 허허 웃으며 설이를 바라봤다. 설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글을 익히라고 내 거위 산적을 준비했다. 많이 들거라.”

노인의 말대로 상 위엔 거위 산적이 잔뜩 올라 있었다. 그러나 설이의 젓가락은 단 한 번도 거위 산적을 향하지 않았다.

‘거위 산적을 먹어 아둔해진 게 분명해.’

그토록 맛있었던 거위 산적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설이는 거위 산적이 원수라도 된 듯 노려봤다.

“왜 거위 산적을 안 먹누? 입맛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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