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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는 그림자-78화 (77/100)

78화.

본디 용은 인간을 멸시하고, 영물은 수족으로 부릴 존재라 생각했다. 그리고 제운은 용다운 용이었다. 한마디로 인간을 멸시하고, 영물을 하찮게 본단 것이다.

그런 그가 서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제운은 인간도 이룡도 아닌 존재인 서화를 한낱 미물로 취급했다. 그랬기에 그는 영묘주가 되려는 서화를 스스럼없이 도왔다.

그러나 참으로 답답한 제 형님은 영묘주를 만들 기회를 저버린 뒤, 서화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제운은 도무지 현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서화는 마침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것도 이룡의 상태로 말이다. 저도 한때 이룡이었다. 제운은 서화를 향해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 열었다.

서화의 죄가 모두 사해진 덕일까. 매 그믐 고통에 시달리던 현음은 그 지긋지긋한 열병에서 벗어났다. 또한 백화의 영향으로 인간이 되지 못하던 백호 설이도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아무리 약한 영물이라 해도 영물은 영물이었다. 금세 자란 설이는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운은 설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조카인 아영에게 가 있었으니까.

제가 설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반면, 설이는 자신을 상당히 미워했다. 티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설이는 제운을 볼 때마다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으니.

어차피 한낱 영물이다. 영물에게 잔뜩 미움을 사도 제 삶은 별반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날은 아영을 보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날이었다. 처음으로 생긴 조카였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마다 온갖 진귀한 것을 가져왔다. 약재나, 보석 같은 것 말이다.

한 손에 아영에게 줄 선물을 들고 저택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제운은 대문 앞에 영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을 그리도 피해 다니던 영물이었건만. 평소와 달리 영물은 잔뜩 긴장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인 일로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이냐.”

제 물음에 영물은 몸을 살짝 굳혔다.

“오…… 오늘은 저택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아영을 보시기 위해 내려온 것이 아니십니까. 밤잠을 설치던 아영이 방금 잠들었습니다.”

너무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잠시간 망설이던 제운은 벌벌 떠는 영물이 조금 귀엽기도 해 그 장단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그래? 그렇다니 별수 없구나.”

그는 설이의 낯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영물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제운은 저도 몰래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영을 보러 온 것이거늘. 그는 영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척해 주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이후 열흘이 지났다. 평소처럼 아영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 제운은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저택 대문 앞에선 영물의 모습이 보였다. 다만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영물, 설이는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제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물치곤 몸도 약하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찬바람을 맞아 가며 여기에서 졸고 있을까.

제운은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설이를 깨우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둬도 될지. 그리고 그는 그중에서 답을 고르지 않았다.

제운이 설이의 무릎과 등 뒤로 팔을 넣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혹여나 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인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별채로 향했다. 설이는 그 와중에도 조금도 깨지 않은 채, 고이 잠들어 있었다.

장지문을 열고서 침상 위에 설이를 눕혔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설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운이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주머니 안에서 아주 작은 은색 환 하나를 골라내, 설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약한 고뿔 정도는 막아 줄 테니.’

제 눈엔 별것도 아닌 백호지만, 형님이 아끼시는 영물이었다. 이 정도면 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한 제운은 별채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일이 있고서 몇 달이 흘렀다.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창소당을 들렀다. 그토록 미워하던 서화에게 먼저 굽히고 들어갈 정도로 아영을 귀하게 여기는 제운이었다. 쑥쑥 자라는 아영을 보고 있노라면 제운은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마음 같아선 매일 내려오고 싶었지만, 천계에 머무는 용들은 열흘에 한 번밖에 인간 세계로 내려오지 못했다. 여태껏 천계에 살며 불편함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던 제운이었으나, 요즘엔 열흘에 한 번이라는 것이 썩 답답했다.

그리고 제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그 아둔한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말로 기가 찼다. 자신은 용이거늘. 용이나 되어서 한낱 영물에게 글을 가르치라니. 제운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제 형님의 명이자 부탁이었다. 제운은 별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열흘마다 내려와서 아영을 보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뿐일까, 제가 글을 가르친다고 익힐 글이었으면 진작에 익혔을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 건방진 영물이 자신과의 글공부를 거절했다는 사실이었다. 귀한 시간을 들여 가며 가르쳐 줄 제 노고는 생각지 않고.

어찌 되었건 처음부터 삐걱대는 글공부가 시작되었다.

호랑이가 원래도 이리 아둔한 영물이었던가. 설이는 간신히 제 이름만 쓸 줄 알았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형님의 명을 따르긴 해야 했다.

제운은 엉망으로 쓰인 설이의 글씨를 잡아 주기 위해, 붓을 잡은 설이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이어 글자를 한 자 한 자 써 주었다. 별것도 아니건만. 설이는 내심 놀란 듯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는 그 모습이 아주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첫 시간은 별다른 문제 없이 흘러갔다. 문제는 열흘 뒤였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를 했건만. 설이는 선지 위에 몇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고선, 너무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저는 그간 쭉 호랑이로 살아왔습니다. 호랑이로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한 제가 인간처럼 글을 익히려는 것 자체가 기특하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것인지.’

제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태로라면 몇 년이 지나도 글공부는 제자리걸음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귀찮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의 묘안을 짜냈다.

“앞으로 시험을 쳐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제운은 제발 이 방법이 효과가 있길 바라며 저택을 떠났다.

그렇게 또 다른 열흘이 흘렀다. 저택으로 내려가는 길, 제운은 설이를 떠올렸다. 겨우 두 번 함께 자리했다고, 그간 설이가 간간이 떠올랐다. 참으로 이상하다고 여기며 제운은 아영에게 줄 책을 챙겨 망거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적어 내면 좋으련만. 이 속도라면 진실로 아영이 설이보다 글을 먼저 깨칠 것 같았다. 도저히 그 영물을 가르치지 못하겠다고 형님께 변명이라도 할 것을. 제운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희래당 안으로 들어서자 무슨 잘못이라도 지은 양 설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잘못을 저질러서 깜짝 놀랐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제운은 설이의 팔뚝을 까맣게 장식한 글자를 놓치지 않았다. 속이려는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그러나 설이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선지 위에 글자를 적어 냈다. 제운은 빤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팔뚝의 도움을 받은 설이는 백 자 중 백 자를 모두 써 내려갔다.

그러나 설이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는 없었다. 제운은 설이를 향해 말문을 떼었다.

“부정한 방법을 썼으니, 이번에는 들어줄 수 없다.”

“……네?”

“모른 척 말거라, 네 팔뚝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내 모를 줄 알았느냐.”

“……다 알고 계셨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지. 고작 영물이 용을 속일 수 있다고 믿다니. 아니, 용이 아니더라도 이런 속임수에 넘어갈 이는 없을 것이다.

제운은 벌을 내리는 대신 설이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 책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책이라고 하더구나. 최소한 이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아영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지 않겠느냐.”

본디 서화에게 주고, 그녀가 아영에게 읽어 주길 바랐던 책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했다. 제운은 저도 모르게 설이에게 책을 건네고 말았다.

그 일 이후, 또 다른 열흘이 지나갔다.

창소당이 아닌 희래당으로 향한 제운은 설이의 앞에 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저번과 달리 설이는 아주 자신만만한 낯이었다.

그런 설이가 팔뚝 소매를 걷었다. 양쪽 팔뚝을 모두 걷어붙인 설이가 제운 앞에 제 팔뚝을 보였다.

“이번엔 아무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팔뚝에 아무것도 적어 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제운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설이가 조금 귀여워서.

어찌 되었건 시험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인지 선지 위를 노니는 붓은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잘못 적은 글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번엔 제가 이긴 것입니까?”

“그래. 네가 이겼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해 보아. 내 약조를 지키마.”

이게 무어라고. 저리도 신이 난 영물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제운은 무엇이든 해도 좋다 허락을 했다.

“정말 무엇이든 다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설이가 눈을 반짝이며 제운에게 물었다.

“그래. 무엇이든 다 말해 보거라.”

“그럼…….”

잠시간 망설이던 설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운 님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만 때려도 되겠습니까?”

설이가 밝게 웃으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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