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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조연인데 나랑 사랑이나해-44화 (44/182)

〈44 화〉

바닥에 쓰러진 조는 온몸을 옹송그린 채 떨며 중얼거렸다.

“에이 씨……. 책에서는 한 모금이었는데,괜히…… 원 샷을 때려 가지고 이씨……

“뭐라고? 조. 괜찮아?”

“엄마,나 아프다니까.”

“나 네 엄마 아니야.”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조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머리 깨질 거 같아.”

“괜찮아? 의사를 부를까?”

“엄마. 콩나물국……

“……그게 뭐지?”

“카일……”

“응. 나 여기 있으니까 정신,”

“카일 가슴……”

카일은 조의 이마빡을 한 대 때리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픈 척하지 말라고 화라도 내려고 했지만 평소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길길이 날뛰었을 조가 잠잠했다.

혹시 몰라 손바닥을 이마에 갖다대자 불이 옮겨 붙은 둣 뜨거웠다.

“조. 일단 침대로 옮길게.”

제대로 의식조차 없이 끙끙거리는 조에게 말한 뒤 카일은 그녀의 뒷목 과 다리 뒤쪽으로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막상 품에 안으니 생각보다는 작은 체구였다.

두 팔을 뻗어 강하게 안아 오는 게 아니라 얌전히 안겨 있 는 것마저 신기했다.

카일은 잠시 동안 조를 안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내뱉는 조의 숨에서 미약한 와인 향이 느껴졌다.

“……또 어디서 술을 먹고 온 건가. 그 아는 형과?”

“야,이 씨. 사람이,팍 씨 아프면 간호를 해야지.”

“……미,미안.”

질문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조가 오들오들 떨며 카일의 체온에 기대 왔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 어서 침대 위로 떨어뜨리려 했지만 조는 카일에게 안긴 채 떨며 기댄 것이 다였다.

그러고 보니 과음해서 쓰러졌다고 하기엔 무언가 이상했다.

몸이 과하 게 뜨거웠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저번에 주사를 부릴 땐 이러지 않았으니까.

술에 취했어도 얼굴은 알아봤는데.

카일은 조에게 먹힐 극약처방을 썼다.

“조. 내 얼굴 보여?”

잠깐 눈을 뜬 조는 살짝 손을 들어 카일의 볼을 툭 건드리더니 곧바 로 다시 눈을 감았다. 볼에 닿았던 작은 온기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에서만 혼잣말 같은 대답이 울려 퍼졌다.

너무 잘생겼어,예쁜 우리 카일.

좋아 죽겠어. 나 이러다 죽으면 호상이야. 팡파르 울려 줘.

팡파르 같은 소리 하기는. 이렇게 죽으라고 널 내 옆에 둔 줄 알아.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조를 침대 위로 눕혔다.

“조. 누가 네게 약을 먹였나?”

“아. 아아…… 아. 머리 아파.”

“누가 그랬지. 기억나는 게 있으면 내게,”

“말 걸지 말라고 했지,확.”

얼굴의 효과는 채 10초를 가지 못 했다.

결국 카일은 조의 손을 잡아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조금 꺼림칙했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대화 방법인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면 말도 통하지 않는다니.

전혀 다른 세계의 짐승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손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조가 눈을 살며시 떠 왔다.

누군가가 저 를 간절히 불렀다.

“깅깅자.”

“……카일?”

“년 어떻게 내 얼굴만 알아보면 고분고분해지지.

조는 열에 익은 붉은 얼굴로 픽 웃으며 답했다.

“그야, 좋아하니까……”

그 새삼스런 대답에 또 새삼스럽게 카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갑자기 조가 언제 아팠냐는 듯 벌 떡 일어나 앉아 카일의 어깨를 붙잡 았다.

“꿈인가.”

“……응?”

“당신 오두막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잖아요. 이거 꿈인가?”

“너는 기억 안 나겠지만 저번에도, 읍!”

카일의 두 볼을 붙잡고 조가 그대 로 돌진했다.

첫 뽀뽀치고는 다소 공격적이었다. 무드랄 것도 없이.

뜨 거운 조의 입술이 잠깐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이,이게 무슨……”

카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조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사르르 웃었다. 방금 사고를 친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봄꽃 같은 미소였다.

“꿈이니까.”

조는 망설임 없이 다시 카일의 입술로 다가갔다.

“……조,잠, 잠깐만. 아니 나는 아직,”

다가오는 조의 어깨를 막아 봤지만 막무가내였다.

세게 밀어내면 막을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카일은 그냥 그녀의 꿈에 잠깐 머물기로 했다.

열에 들뜬 입술이 첫 번째와는 달리 부드럽게 겹쳐왔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달큰한 포도주 향이 새어 나왔다.

조의 손이 카일의 얼굴을 매만지다 그의 옆 머리칼부터 귀,뒷목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하,카일……”

내뱉는 숨에서 짙은 열감이 느껴졌다.

홀린 것처럼 질끈 눈을 감고 있 던 카일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늘 진 조의 캐러멜색 눈동자가 한눈 에 들어왔다.

카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한 뒤 그녀를 도로 침대에 눕히고 자리 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반쯤 뒤로 누워가던 중이었다.

이렇게까지 정신을 빼놓은 적이 없었는데.

“……조. 의사를 불러올 테니까 얌전히,제발 얌전히 있어.”

“괜찮아,……괜찮아요. 진짜로 금방 괜찮아져요. 내가 다 봤어.”

들뜬 숨을 뱉으면서도 느긋한 조를 보며 카일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래, 미래를 봤다고 했지.”

또 눈을 감은 채 조는 아무런 말 이 없었다.

씩씩대는 숨에 잡아먹혀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럼 네가 괜찮다고 하면,정말로 괜찮을 테니까 나는 가만히 있는 게 맞는 건가.”

“...........”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 의지로는,”

“아니이……”

조의 대답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예의범절이라고는 여전히 쌈 싸먹은 공격적인 말투였다.

더럽게 까탈스럽네. 걱정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걱정 많은 사람이 혹시나 내 걱정까지 할까 봐. 적어도 내 앞에서는 웃으라고.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들어요.

추운 건지 더운 건지 조는 이불을 꽁꽁 싸맨 채 식은땀을 뻘뻘 홀렸다.

카일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주머니 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의 이마의 구슬땀을 닦아 냈다.

“의사는 부르지 마?”

매끄럽게 묻는 음성에 조는 묵묵히 마음으로만 제 뜻을 전달했다.

부르지 마요, 고작 마구간지기한테 의사 불러서 뭐해요. 안 좋은 소문 퍼지면 어쩌려고요. 종놈들은 이런 걸로 의사 그런 거 안 불러요. 그래 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역시 좋은 얼굴에 좋은 인성 깃든다,얼굴 값 하는 마이 큐티 카나리아 카일.

“……카나리아는 빼면 안 될까. 듣 기가 거북해. ……천사도.”

그럼 아기 고양이?

“내 나이가 몇인데 아기 고양이야.”

……하아,카일 손 너무 시원해.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다른 곳도.

“네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는데 적당히 했으면 좋겠어. 듣기에 민망하 니까.”

입술로 막아 줬으면 좋겠다.

얼빠진 얼굴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조를 내려다보던 카일은 잠시 후 소 리 내어 웃었다.

대단할 정도로 한결같은 여자였다.

“좋다,카일이 내 꿈에 나오고. 나랑 뽀뽀도 하고.”

“……네 꿈에서 나는 어떤데.”

“똑같아요.”

“똑같다니?”

한결 편안해진 숨을 내뱉으며 조는 느릿느릿 기어가듯 답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과하게 잘생겼 고,다정하고,친절하고,섹시하고, 가끔 못 견디겠다는 둣이 얼굴 빨갛 게 물들이고,아…… 귀여워.”

말하다가 혼자 망상에 젖어 들었는 지 조는 말을 끝맺지도 않고 다시 이불을 꼭 감아쥐었다.

카일이랑 키스하고 싶어.

긴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숨 고르기를 하는 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그런 생각뿐이라니.

방금 전 그 비슷한 건 먼저 해 놓고.

카일은 조의 머리 옆에 손바닥을 짚고 상체를 숙여 그에게 다가갔다.

하얀 얼굴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조,눈 떠 봐.”

조가 얇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떠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의 푸른 눈동자가 조를 지그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니야.”

“그래요? 그렇구나아.”

몽롱한 조의 목소리가 카일의 귓가로 천천히 감겨들었다.

카일은 조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아프지 마.”

“나 아픈 게 아니고,”

“응?”

“……몸이 달아 가지고.”

“……가능하면 그런 말도 가려서 해 줘.”

“어우,너무 잘생겼어. 이게 뭐야. 엄마아……. 나 집에 갈래. 얼굴에 저당 잡힌 불쌍한 내 인생.”

“……집? 집에 가고 싶어?”

카일은 잠깐 그녀가 집에 돌아간 뒤,그녀가 없는 하루를 생각했다.

머리는 예전처럼 모든 게 굳어버린 것처럼 조용하고,며칠에 한 번 어머니의 궁으로 가 쓸데 없는 일상들을 보고하고,귀족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사실 생활 자체는 크게 달라질 게 없겠지만 조가 없는 일상은 이젠 상상만 해도 갑갑했다.

머릿속에서 폭탄 같은 고백을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났고,숨통이 트였다.

카일은 조에게 다시 물었다.

“……조,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갈 거야?”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반쯤 옆으로 돌리던 조가 눈을 뜨고 카일을 바라 봤다.

잠에 취한 건지,술에 취한 건지 모를 진한 황금빛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아침 해가 깜빡이는 것 같았다.

“또 울 것 같은 얼굴이네. 어이구, 우리 예쁜이. 누나 없으면 또 얼마 나 울려고.”

아무리 봐도 누나가 아니었지만 카일은 얌전히 조가 안는 대로 안겨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 감고 잠에 빠져드는 조를 흔들 어깨웠다.

“조,일어나 봐.”

“아,엄마. 알람 안 울렸잖아요. 아직 출근 시간 아니라고.”

“나 좋아한다며. 계속 있는다며. 옆 에 있겠다며.”

“……응,아, 대리님. 이거는 제 일이 아닌데……”

“약속해 줘. 옆에 있겠다고 해 줘.”

“아!”

자꾸 잠을 깨우자 짜증이 났는지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획 들어 올린 조는 찌푸린 미간 사이로 카일의 얼굴을 확인하곤 들었던 손 그대로 카일의 뒷목을 휘어잡아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얼른 자라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쓰 다듬다가 토닥이기까지 했다.

“조,너는 황자비가 되기엔 너무 폭력적이야.”

……이런 저런 걸 다 빼고서도 황자의 비가 되기엔 교양이 여러모로 부족한 것 같지만.

“아으……. 카일. 내가 당신을 두고 어딜 가요. 그니까 좀 조용히 해.”

그래도 좋았다. 나를 두고서 어디 도 가지 않겠다는 대답을 당연하게 해 주어서.

“조……. 있잖아. 갑자기 이런 말하 는 거,나도 어색하고 당황스럽지 만……”

“빨리 말해,이 씨. 졸리다고.”

“……키스해도 돼?”

조가 눈을 살짝 뜨고 물끄러미 카일을 바라봤다. 제 발이라도 저린 듯 카일은 이어 말했다.

“좋아하는,마음이……그러니까,내 가 좋은 감정으로……. 널 볼 때면 가끔……”

버벅대며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머릿속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개좋아. 대박 미남꿈이네. 내일 복권 사야지. 못해도 3등이다. 너무 귀여워. 갖고 싶어. 나만 볼래. 입술 존나 부벼.

“……키스 말하는 거 맞지? 그거 내가 할 테니까 전처럼 또 까먹으면 안 돼.”

카일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꼬리 끝에 입을 맞춘 뒤 그대로 고개를 틀어 조의 입술로 향했다.

콧대가 어긋나듯 맞물린 후 두 입 술이 맞닿았다.

조의 몸에 돌던 뜨 거운 열은 아까에 비해 한결 식은 상태였지만 오가는 밭은 숨은 전보 다 더 뜨거웠다.

조가 오른손을 들어 카일의 더블릿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카일은 입술 을 떼지 않은 상태로 조의 손을 잡 아 내렸다.

“우으……”

불만인 듯 짜증 섞인 신음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모른 척한 채

계속해서 서로의 숨을 나눴다.

한참 후 겨우 떨어진 입술이 묘하게 살짝 부풀어 있었다.

“……약속했어. 잊지 마.”

조는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고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모두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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