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제 그만 질질 끄시죠.”
에사디엔은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만난 사이라 얼굴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작은 얼굴에 어울리는 작은 코와 도톰한 입술, 옅은 색의 눈썹.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것이 없군.’
하지만 항상 밝은 웃음기를 담고 있던 연하늘빛 눈은 지금 그를 보며 찡그려진 채였다.
차를 가져다준 시종에게도 상냥하게 지어 보이던 미소를 자신에게만은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에사디엔이 고통을 삼키는 동안, 기다리기가 짜증 났는지 상대가 독촉했다.
“무슨 말씀이라도 좀 해보세요. 황자님께서 계속 만나자고 하셔서 나왔으니 오늘은 꼭 마무리해야겠어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이놈의 황자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었다. 초대받지도 않은 티파티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황자라니.
“미뉴엘.”
미뉴엘.
에사디엔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카르이넨 대공의 막내딸, 미뉴엘 카르이넨이 대놓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송한데요, 황자님. 저희가 서로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니잖아요. 불쾌하니까 자제해 주시죠.”
“왜… 아니라는 거지. 미뉴엘, 당신은 내 약혼녀야.”
미뉴엘의 고운 이마에 일순 힘줄이 솟았다. 뒤이어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앙증맞은 손이 테이블 위를 쾅 내리쳤다.
“그러니까! 파혼하자고 했잖아요, 파혼! 설마 파혼이 무슨 뜻인지 모르세요?”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에도 에사디엔은 꿋꿋이 미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사디엔의 사전에 파혼이란 없었다. 지운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뻣뻣한 모습에 미뉴엘은 속이 터질 따름이었다. 자기가 대나무야, 뭐야.
“아, 정말! 무르자고요. 황자님 같은 분하고는 결혼이고 뭐고, 지금 얼굴 맞대고 있는 이 순간도 싫다고요. 파혼해요, 파혼! 파! 혼!”
미뉴엘은 짧은 순간 옥수수 튀기는 소리처럼 다다다다 말을 내뱉고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어깨가 위아래로 깊게 움직이며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그것을 넘겨주려던 에사디엔의 손이 단호하게 뿌리쳐졌다.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차갑게 말하는 미뉴엘의 얼굴에 예전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와. 엄청 잘생기셨어요. 이런 분이 제 약혼자였다니. 살아 있길 잘했어…….’
처음 만났던 날 홀린 듯 그를 보며 볼을 붉히던 미뉴엘.
‘황자님,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밝게 웃던 미뉴엘.
‘황자님, 좋아해요!’
스스럼없이 그를 껴안았던 미뉴엘.
왜 그때는 그 달콤한 애정의 소중함을 몰랐는지. 어째서 밀어내기만 했는지.
“미뉴엘…….”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후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미뉴엘은 에사디엔이 후회를 하든 말든 품에서 종이를 꺼내 그의 코앞에서 흔들었다.
“그만 불러대고 파혼 동의서에 서명하세요. 당장!”
“싫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고 미뉴엘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뭐라고요?”
“싫다고 했다.”
미뉴엘의 고개가 반대로 기울었다.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들었으니 귀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왜 싫다고 하는 거지?
“하… 왜, 팔이라도 부러지셨어요?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그녀가 빈정거리자 에사디엔이 비장하게 물었다.
“부러트리면 봐줄 건가?”
미뉴엘이 이마를 짚으며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무슨 헛…….”
하지만 흘긋 본 에사디엔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를 지켜본 시간이 있으니만큼 빈말이 아님을 곧바로 깨달은 미뉴엘이 애써 목소리를 담담하게 다듬고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팔 부러트리셔도 안 넘어가요.”
“미뉴엘.”
“이름 부르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에사디엔은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대가 다시 마음을 돌려줄까. 내 잘못을 용서해 줄까.’
에사디엔이 상체를 죽 내밀어 미뉴엘에게 다가갔다.
십 층이 넘게 쌓은 마카롱 탑의 끄트머리에 가슴팍이 아슬아슬하게 닿을락 말락 했다.
“좋아해.”
“뭐…….”
미뉴엘의 손에서 파혼 동의서가 툭 떨어졌다.
“지금 뭐라고…….”
그녀가 너무 놀라서 굳은 틈을 타 에사디엔은 절절한 목소리로 고백을 이었다.
“그대를 사랑한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이제 와서…….”
미뉴엘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한때는 바라마지않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곱씹을수록 혈압이 오를 뿐.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확신?”
“겪어보니까 황자님 말씀이 맞았어요. 사랑은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이에요. 돌아서면 끝이더라고요.”
아. 과거의 자신이 던진 말에 얻어맞은 에사디엔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점으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돌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가 내게 그런 감정을 알려주었다. 불안해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도 하지 않았나.”
“아니, 그래서 뭐, 그게 제 탓이라고요?”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다시 미뉴엘이 폭발하기 직전, 에사디엔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미뉴엘, 그대가 나를 길들였다는 뜻이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에사디엔의 바닷빛 눈동자가 간절함을 담고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받아주면 안 되겠나.”
조금씩 그의 얼굴이 미뉴엘에게 가까워졌다.
‘빌어먹게도 잘생겼단 말이지…….’
에사디엔을 좋아했던 것은 옛말이다. 그에게 내뱉는 ‘싫어’는 튕기는 것 따위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정이 뚝 떨어진 뒤에도 그의 미모만큼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눈부셨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던 미뉴엘은 신비로운 금빛 속눈썹이 올올이 보일 때가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 미인계 쓰지 마세요!”
손바닥으로 에사디엔의 얼굴을 짚어 쭉 밀어낸 그녀가 잠시나마 홀렸던 자신에게 화가 난 탓에 짜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마차 떠났거든요? 어이없어, 진짜!”
이대로 있으면 또 에사디엔에게 말려들지도 몰랐다.
깔끔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자신이 마음을 깔끔하게 접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됐어요. 저도 이제 파혼 서류에 서명해 달라고 구걸 따위 하지 않을 테니까, 어디 평생 혼자 살아 보시든가요!”
“…….”
에사디엔은 자신을 밀어낸 작은 손을 꾹 쥐었다. 굴욕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예 뺨을 묻으며 낮게 중얼거린다.
“내가 파혼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대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을 텐데.”
“아, 전 결혼 안 해도 상관없거든요. 전국에서 잘생긴 남자들 닥닥 긁어다가 눈요기하면서 살 거라.”
사교계고 나발이고 먼 곳에 저택을 짓고 그 안에서만 평생 즐기며 살 거다. 이미 골라둔 땅도 있다.
흥, 코웃음을 친 미뉴엘이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저는 단것 안 먹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한 상 떡하니 차려둔 걸 보니…….”
하늘색 눈이 싸늘하게 마카롱이며 초콜릿 파이 위를 훑었다.
시선을 알아챈 에사디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명백한 실책이었다. 미뉴엘이 망고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망고가 첨가된 디저트를 준비해 둘 줄이야.
“황자님께서 어지간히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다는 게 아주 잘 느껴지네요.”
“미뉴엘, 이건 그러니까…….”
“됐습니다.”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단번에 그의 말을 끊은 미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늘하늘하고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그녀는 한번 한다면 마음을 꺾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모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지만 집념 하나만큼은 어머니인 카르이넨 대공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럼 이만. 그동안 더러웠고, 부탁이니까 연락이고 뭐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맙시다.”
“미뉴엘.”
“아, 이제 초대장도 없이 남의 티파티에서 버티는 짓도 하지 마시고요.”
마지막으로 까딱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미뉴엘이 싸늘하게 뒤돌아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않아서 멈춰 서야만 했다. 드레스의 치마 끝자락을 부여잡는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에.
“미뉴엘… 제발.”
뒤이어 들려온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젖어 있었다.
미뉴엘은 끙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파혼장을 보냈을 때 비밀스럽게 그녀를 부른 큰언니의 친구… 그러니까 루미에르 황태자의 부탁이 떠올라서였다.
‘네게는 면목이 없다만, 녀석도 내 동생이라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죄송합니다, 멋진 언니.’
미뉴엘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되도록 부드럽게 헤어져다오.’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부탁했는데 황자를 울리고 무릎까지 꿇려버렸다.
미뉴엘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일어나세요.”
에사디엔이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자존심은 첫 파혼 동의서를 찢었을 때 함께 내다 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미뉴엘을 잡겠다는 생각뿐.
“미뉴엘…….”
일어나라는데 계속 무릎을 꿇은 채 부르지 말라는 이름만 불러대니 미뉴엘의 혈압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의자를 가리키자 눈치를 보던 에사디엔이 주춤거리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닦으세요.”
미뉴엘도 그 옆에 앉아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런데 웬걸, 잠시 눈물이 멎었나 싶던 에사디엔의 눈이 다시 그렁그렁해졌다. 처연미라는 것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왜 또 울어요. 닦으시라니까요?”
하지만 미뉴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사디엔은 매달리듯 연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여린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미뉴엘, 미뉴엘…….”
“으으, 진짜.”
미뉴엘은 포기했는지 앓는 소리를 낼 뿐 더 밀어내지 않았다.
그녀를 구성하는 색채처럼 보드라운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조금 안심한 에사디엔이 얼굴을 살짝 부볐다. 그녀를 단념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따뜻함이었다.
‘옷 아깝게 버릴 수는 없고. 돌아가자마자 두 번 세탁해 달라고 해야지.’
따뜻함? 물론 에사디엔이 미뉴엘의 속마음을 알지 못해 하는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