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뉴엘.”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를 흔들었다.
“미뉴엘.”
“아, 옷 좀 놔요…….”
“얘가 생전 안 하던 잠꼬대를 다 하네. 일어나, 미뉴엘.”
“으응?”
“거의 도착했대.”
“벌써?”
출발한다고 한 게 조금 전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라망드는 그의 어깨에 기댄 내 머리를 토닥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오랜만에 가족들 만나는 거라 긴장된다며? 그런 사람이 이렇게 잘 자?”
“아니, 잠깐 눈만 감은 건데! 언제 잠든 거지?”
“눈 감자마자 코 골던데?”
“거짓말.”
“알아챘으면 그만 비키시지. 어깨 부서지겠다.”
투덜거리기는. 나는 못내 꾸물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긴장은 긴장이고… 네 어깨가 딱 편안한 각도니까 잠이 솔솔 오잖아.”
“그래서 내 어깨 잘못이다?”
“그러엄.”
대답과 동시에 후아암, 커다란 하품이 흘러나왔다.
“참… 가끔 보면 장군감이 따로 없다니까.”
빈정거리면서도 눈곱을 떼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가끔 보면 라 첨지가 따로 없다니까.”
“또 뜻 모를 소리 한다.”
“히히, 라망드으.”
나는 히죽 웃으며 라망드에게 다시 매달렸다.
라망드는 내가 플렌드나 신전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친구였다.
나이도 같고 그의 신성력이 유독 내게 잘 맞아서 붙어산 것이 벌써 팔 년. 이제는 라망드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웃어?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아니,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사고뭉치인 줄 알겠어!”
“그럼 아니야? 제발 집에 가서는 조용히 살자, 응?”
지난 세월 저질렀던 일들이 떠올라서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단식일에 담을 튀어 시장에 다녀오다가 걸린 일이라든지, 경전 시험을 보기 싫어서 닭장에 고양이를 푼 일이라든지…….
“그래도 다 옛날 일이다, 뭐.”
“퍽이나.”
“치.”
뾰로통해져서 입을 다문 내게 라망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진짜 준비해. 머리 빗고 얼굴도 좀 닦고.”
하지만 나한테 준비하라고 했으면서 정작 움직이는 것은 라망드였다.
커다란 빗으로 내 머리를 살살 빗겨주고 서늘한 신성력이 어린 손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이 누구보다 능숙했다.
“이거 봐, 이거 봐.”
진짜 라 첨지. 라망드 녀석, 투덜투덜하면서도 항상 이렇게 챙겨준다니까.
“뭘 봐?”
“있어, 그런 게.”
“계속 혼자서 중얼거릴래?”
라망드가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헤실헤실 솜사탕처럼 풀어진 채였다.
라망드는 내 친구고 오빠이자 동생이며 보호자 같은 존재였다. 비록 그는 이제 보모 역할에서 졸업시켜 달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어머니가 같이 와달라고 했을 때 청하지 않으셔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라고 한 거 난 다 들었지롱.
나는 라망드가 등을 돌린 사이 살짝 혀를 빼물며 씩 웃었다.
내려선 마차 앞에는 사용인들이 길게 도열해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왕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부담스러웠던 것도 잠시, 저 앞에서 팔을 벌린 어머니를 보자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어서 오너라.”
“엄마아아아!”
나는 다다다 내달려 어머니를 와락 껴안았다.
나 정도는 달려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어머니와 달리 내 몸뚱어리는 이 정도 거리를 뛰었다고 벌써 헉헉댔다.
“아가, 괜찮으냐.”
어머니의 무뚝뚝한 붉은 눈에 금세 걱정이 어렸다. 나는 헤헤 웃으며 어머니에게 쪽쪽 뽀뽀했다.
“우웅, 엄마 보고 싶었어요.”
“미뉴엘, 아빠는?”
“아빠도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에게도 와락 안기는 와중에 옆에서 흠흠, 헛기침이 들렸다. 어머니의 무뚝뚝한 점까지 쏙 빼닮은 큰언니, 엘가에게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엘가 언니이.”
엘가 언니에게 꽉 안기자 함께 있던 둘째 언니가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우리 막내는 갈수록 귀여워져서 큰일이야.”
“히히, 쥬엘라 언니도 많이 많이 보고 싶었어.”
내 나이 이제 스물. 곧 성인식을 치를 사람의 태도치고는 어리광이 심한 편이다.
하지만 큰언니와 열 살, 작은언니와는 여덟 살 터울. 게다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신전에서 계속 지낸 탓에 가족들은 내가 뭘 하든 귀여워해 줄 따름이었다.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라망드 플렌드나입니다.”
내가 언니들에게 둘러싸여 한창 예쁨을 받는 동안 라망드는 우리 부모님과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미뉴엘을 챙겨주느라 고생 많았는데, 이제 우리 가문 전체가 사제님의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잘 부탁하오, 라망드 사제.”
플렌드나 신전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나처럼 가문에 적을 둔 채 일정 기간 신전에서 지내거나 아니면 완전히 사제로서 신의 품으로 귀의하는 길.
라망드는 몇 달 전 사제의 길을 택하면서 플렌드나 신의 이름을 받게 되었다.
‘왜.’
문득 눈이 마주치자 라망드가 씩 웃으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에게 둘러싸인 삶이란 행복의 극치였다.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세계.’
원래 몸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결코 이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열 살짜리 꼬마가 되어 있었다.
‘뜨거워…….’
나는 아직도 내가 불길에 휩싸여 있는 줄로만 알았다. 치솟는 열기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이제 지쳤어. 그냥 빨리 죽게 해줘.’
이대로 불길이 살을 좀먹는 고통까지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가시밭길 같은 인생, 다 놓고 그만 편안해지고 싶었다.
“아가, 눈을 떠라.”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서늘하면서도 절박한 목소리가 가물가물한 의식을 억지로나마 붙잡게 했다.
“흐……?”
“아가, 잠들면 아니 된다. 조금만 더 참으면 신전이다.”
누굴까, 이 사람은.
붉은 눈의 여자가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얼굴은 둘째치고 빨간 눈이라니.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뜨거운 숨결뿐이었다.
“눈을 떠라. 제발…….”
그리고 그녀가 내게 말을 걸수록 조금씩 정신이 또렷해졌다.
신열이 들끓어 죽어가는 ‘나’를 밤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신전으로 데려간 붉은 눈의 여자.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내가 눈을 뜬 몸의 어머니였다. 프레세리아 제국 북부를 통치하는 대공, 유가티스 카르이넨.
그리고 이 몸의 정체는 그녀의 막내딸 미뉴엘 카르이넨.
열이 다 내린 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반신반의하며 거울을 보고는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끄아악! 내가 빙의라니!”
겨우 살려놓은 대공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이 쓰러졌으니 신전이 다시 한번 뒤집힌 것은 당연지사였다.
* * *
“뭐 해? 또 그 놀이 해?”
과거를 떠올리며 멍하니 거울 앞에 앉아 있던 내 뒤로 라망드가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무슨 놀이?”
“예전에 네가 가끔 거울 보면서 하던 거 있잖아. 거울에다 대고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물어봤던가?”
“아이참,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빙의한 몸의 미모에 반해 매일매일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라망드는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걸 가지고 나를 놀리곤 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볼을 잡아 늘였다. 거울 속의 나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래. 이건 나야.’
미뉴엘 카르이넨은 원래 『플렌드나의 축복』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악역이다.
벚꽃잎 같은 머리칼과 아스라한 새벽하늘 같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
미모에 집안까지 빵빵한 그녀가 악역의 길을 걷는 건 다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 트레고스난 때문이다. 그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지만 뒤늦게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자…….
뭐, 그런 거다. 친정의 권력, 자신의 목숨, 모든 걸 내놓고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지만 모두 실패. 그리고 결말은 비참한 죽음.
‘장난해? 나였으면 당장 이혼했어.’
뭐 하러 돌아선 남자한테 집착한단 말인가. 복수는 남남이 되고 나서 하면 그만이지.
아무튼 마지막에는 인성의 끝을 달리는 짓까지 마구 벌였다고 해도 분명 미뉴엘은 피해자다.
하지만 작가님의 필력과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적 분위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미뉴엘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 이입하게 되는 신기한 소설이었다.
“뭐 해, 예쁜 얼굴 가지고.”
라망드가 내 손을 떼고는 그새 발개진 볼을 문질렀다.
“나 예뻐, 라망드?”
전생이었다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질문도 지금의 몸이 예쁘다는 걸 아니까 잘도 튀어나왔다.
‘단 한 군데만 빼면.’
그럴 리 없는데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집 안인데도 장갑을 벗지 않은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라망드는 곧 장난스럽게 성호를 그으며 대답했다.
“플렌드나 님의 자식은 누구나 아름답지.”
나도 씩 웃었다.
“맞아.”
거울을 다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작이 그랬을지라도 지금의 나는 절대 남자 주인공과 엮이지 않겠어.’
이 평온한 삶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인생이란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이라던가. 그렇게 다짐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켁, 쿨럭, 쿠헥.”
“미뉴엘.”
제대로 사레가 들렸다. 옆에 있던 라망드가 급히 내 등을 두들겼다.
“코 아파.”
찻물이 코로도 넘어가서 따가웠다. 라망드는 한숨을 쉬며 신성력을 일으켜서 상태를 가라앉혀 줬다.
“아가, 그리 놀랐더냐.”
어머니가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으셨다. 하지만 함께 자리한 아버지는 고운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어머니에게 무안을 주셨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인데 미뉴엘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아버지는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삼황자님하고 약혼을요?”
“그래.”
삼황자라면… 에사디엔 로콰이트, 원작의 서브 남주였다.
‘나도 모르던 약혼자라니. 맙소사.’
내가 집으로 돌아온 건 내 성인식과 둘째 언니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집에서 지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
플렌드나 신전이 온화한 분위기이기는 해도 단체 생활에 규율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나는 편한 집이 좋다고 당장 뛰쳐나온 것인데…….
“혹시 언제 약혼한 거예요?”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어머니를 보자 붉은 눈이 미안한 듯 조금 부드러워졌다.
“네가 신전으로 들어가기 조금 전에 오갔던 이야기다.”
황제가 에사디엔과 내 약혼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고 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즈음 내 건강이 나빠지고 신전에 들어가 버렸으니 가족들 모두 없던 일이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네가 돌아왔다는 걸 들으셨는지 폐하께서 약혼자끼리 만나게 해주자고 하시더구나.”
“많이 놀랐겠지만, 미뉴엘. 너도 이제 성인이니 우리끼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황자님과 네 마음이 맞을 수도 있고.”
끄응.
“만약에… 안 맞으면요?”
“그러면 파혼시켜 주마. 우리 집안 정도면 그 정도는 흠결로 칠 수도 없지. 그러니 한번 만나보련.”
아버지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결코 강요하지 않으셨다.
“…….”
솔직히 말해서 웬만하면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사디엔 로콰이트는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손가락 밑에서 보드라운 옷자락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아무리 떵떵거리는 대공이라고 해도 황제의 신하다.
‘내가 거절하면 어머니가 곤란해지시겠지.’
에사디엔을 만나기 껄끄러운 것보다 그쪽이 더 싫었다.
“그러면 일단 한번 만나볼게요.”
“괜찮겠느냐.”
“황성 구경하는 셈 치죠, 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손은 테이블 아래서 달달 떨리는 중이었다.
더듬더듬 옆으로 손을 내밀자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라망드가 꼭 잡아줬다. 한결같은 온기가 전해지며 그제야 떨림이 좀 잦아들었다.
‘하.’
테오도르에게만 반하지 않으면 된다. 분명 그럴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