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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화 (3/130)

3화

‘…라고 다짐했던 사람, 대체 누구?’

응. 나야, 나.

하지만 그 다짐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침몰당했다.

“에사디엔 로콰이트라고 한다.”

황자를 처음 본 순간 주위를 둘러싼 소리가 모조리 다른 차원으로 멀어졌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인 플렌드나의 신전에서 자라며 온갖 종류의 미남미녀를 다 본 나다.

그러나 그 미인들이 다 태양 앞의 알전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에사디엔의 미모는 압도적이었다.

‘내 취향, 원래 이거 아닌데!’

갈색 머리에 여우 같은 눈웃음, 거기에 눈물점도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응, 아니야. 오늘부터 내 취향은 에사디엔 로콰이트다.

온화한 햇빛 아래의 바다 같은 눈동자. 로콰이트 황가 혈통에서만 나타나는 보석 가루를 뿌린 듯 다채롭게 반짝거리는 금발. 온통 화려했지만 그 무엇도 그의 미모를 누르지는 못했다.

‘아름다워…….’

플렌드나가 남성의 모습으로 현신하면 이런 모습이려나 싶을 정도로.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던데, 이 정도 얼굴이면 맨밥에 간장만 평생 먹고 살아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영애?”

에사디엔이 굳은 나를 의아하게 불렀다. 그제야 나도 모르게 멈췄던 숨과 함께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었다.

“와.”

화끈거리는 볼의 열기가 나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이게 반했다는 건가?’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 부근을 꾹 누르며 꿈꾸듯 말했다.

“황자님… 엄청 잘생기셨어요.”

에사디엔의 차림새는 금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정갈했다.

이 여름에 손과 얼굴만 드러내 놓고 꼭꼭 싸맸지만 윤곽만큼은 탄탄하게 드러났다. 그것으로 옷 아래 숨겨진 근육의 결을 가늠할 수 없다면 플렌드나의 이름이 울 것이었다.

‘절대 그럴 순 없지. 암.’

넓은 어깨와 큰 손, 재킷 밑단 아래로 길게 뻗은 다리. 크림 맛 얼굴에 마라 맛 몸이라니. 이런 사람을 어떻게 놓쳐?

마침내 나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분이 약혼자였다니. 살아 있길 잘했어…….”

그 순간 에사디엔의 입가가 조금 굳었다. 왜 그러나 해서 눈을 깜빡였지만 착각이었는지 그는 이미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뒤였다.

“카르이넨 영애.”

에사디엔이 손을 내밀었다. 장갑에 가려졌지만 넓은 손바닥과 길고 곧은 손가락을 보자 갑자기 라망드가 떠올랐다.

‘라망드보다 좀 큰가.’

동시에 출발하기 전 라망드가 당부하던 목소리도.

‘잘생겼다고 만나자마자 껴안으면 안 돼.’

‘아, 안 그래.’

‘인사 잘하고.’

‘내가 애야?’

윽. 그제야 내 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미리 서로의 정보를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첫 만남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예의였다.

“미뉴엘 카르이넨입니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다.”

대답한 에사디엔은 바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쁜 눈동자인데 깊은 바다처럼 침잠한 분위기가 왠지 안타까웠다.

이 눈이 생기 있게 반짝이면, 부드러운 입술이 깊은 호선을 그리면 얼마나 예쁠까.

“황자님.”

에사디엔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때, 내게는 이 사람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미뉴엘이라고 불러주세요!”

내 웃음이 그에게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 * *

첫눈에 에사디엔에게 반한 뒤로 나는 황성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황자궁에 방문했다.

한 달이 넘게 매일 출석 도장 찍듯이 찾아가다 보니, 황자궁의 시종들이 우리 집 하녀들보다 친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둘이 가까워 보이니 짐도 마음이 좋구나.”

“제가 보기에도 그러합니다. 에사디엔처럼 무뚝뚝한 녀석을 좋아해 주어서 미뉴엘에게 고마울 뿐이죠.”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황제와 황태자는 나를 매우 좋아했다. 가족끼리만 차를 마시는 시간에 나를 동석시킬 정도로.

특히 황태자는 큰언니의 친구라 그런지 나를 너무 띄워주어서 에사디엔에게 눈치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그… 그래도 황자님은 다정한 분이세요.”

황제의 눈이 조금 커지고, 지금껏 한마디도 없이 차만 마시던 에사디엔도 내게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는 체통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신비롭게 반짝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긴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저 녀석이?”

“네. 매일매일 찾아오는데도 싫은 소리 한 번 없이 반겨주시는걸요.”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에사디엔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그대를 돌려보낼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헤헤. 그래도요.”

생글생글 웃으며 에사디엔을 보았지만 그는 미소조차 돌려주지 않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자주 만나며 그럭저럭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먼 모양이었다.

“흐응.”

황태자가 콧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엘가가 왜 그렇게 막냇동생에게 살살 녹는지 알겠군. 이렇게 귀여워서야.”

그야 엘가 언니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바로 그 엘가 언니와 동갑인 황태자가 후후 웃으며 내게 명령했다.

“자아, 내게도 언니라고 해보거라.”

“그런 불경한 짓을 어찌…….”

“괜찮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재촉하는 황태자와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나를 즐거이 지켜보던 황제가 손을 보탰다.

“짐이 허락하겠으니 사양 말고 불러보거라.”

“하지만…….”

“허락한 사실을 증서로 남겨주어야 안심하겠느냐.”

윽, 그렇게까지?

지그시 보는 눈길들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황태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 루미에르 언니……?”

잠시 멍해 보이던 황태자가 가슴에 손을 대며 상체를 숙였다. 희미한 신음은 덤이었다.

“하아…….”

“전하?”

놀란 에사디엔이 몸을 살짝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차를 들이켰다. 언니들이 워낙 저런 모습을 많이 보였어야지.

‘후, 나에게 빠진 어린 양이 또 한 명 늘었군.’

아니나 다를까 곧 원래의 근엄한 얼굴로 돌아온 황태자가 에사디엔을 불렀다.

“에디.”

“예, 전하.”

“미뉴엘이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걸 알고 있겠지? 이 귀여운 애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실 일이냐고요.

성인식 행사가 플렌드나 축일에 열리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성인인데.

에사디엔도 어이가 없었는지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어, 언니, 괜찮아요.”

안 그래도 이 황자님, 철벽이 장난 아닌데요.

서둘러 황태자를 만류한 나는 에사디엔의 손을 꼭 잡으며 생긋 웃었다. 그는 조금 움찔했지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저만 조심하면 되는걸요?”

둘이 있을 때면 ‘나는 시방 한 마리 짐승’ 모드로 에사디엔의 미친 미모를 감상한다. 그리고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이었다.

대화가 오가는 건 아주 가끔이었지만 나는 그냥 에사디엔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좋았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정무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사디엔이 시계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나도 당장 맞장구쳤다. 다른 사람들하고 있으면 에사디엔의 얼굴을 편히 감상하기가 힘들었다.

“아, 그러네요. 퇴석을 허해 주셔요, 폐하.”

“허허. 아직 할 말이 남았느니.”

연신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있던 황제가 우리를 붙잡았다.

“카르이넨 영애.”

“예, 폐하.”

“아니지. 앞으로 짐을 아버님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

“예?”

“어찌 놀라느냐. 어차피 곧 가족이 될 텐데.”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황제가 또 너털웃음을 지었다.

‘푸근한 모습이 꼭 동네 채소 가게 아저씨 같은데…….’

황태자 시절에 정복 전쟁에서 위명을 떨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황제는 끝내 내게서 아버님이라는 말을 듣고 퍽 흡족했는지 황제만 들어갈 수 있다는 비원의 출입을 허가해 주었다.

“그럭저럭 볼 만한 호수가 있단다. 저 녀석과 가서 배라도 타거라.”

“와아, 감사합니다!”

뱃놀이는 처음이라 두근두근했다. 물론 뱃놀이 자체보다는 흑심 때문이었다.

‘근육! 힘줄!’

자고로 배를 움직이려면 노를 저어야 하는 법! 제아무리 단정한 에사디엔이라도 그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겠지.

‘노를 저으며 꿈틀거리는 에사디엔의 팔뚝을 드디어… 후후후…….’

오늘따라 더 방긋방긋 웃는 나를 에사디엔은 조금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물론 내가 속으로 저런 생각을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는 사실은 모를 테지만.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플렌드나 성상을 뽀득뽀득하게 닦으며 흥얼거렸다.

“감사합니다, 플렌드나 님. 내일은 꼭 맑은 날씨로 부탁드려요. 내일 당장, 아니 매일매일 뱃놀이할게요.”

신실한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그다음 날도.

“플렌드나 님…….”

또 그다음 날도.

“내일은 좀 부탁드릴게요. 맑은 하늘, 아름답잖아요?”

계속.

“플렌드나 님도 날씨는 어쩔 수 없으시군요?”

어디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지.

뭐, 그렇게 툴툴대는 기도를 올리기는 했어도 뱃놀이가 미뤄지든, 비가 내리든, 바람이 불든 내가 에사디엔을 만나러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녀올게!”

잔뜩 멋을 부리고 나가던 길, 라망드와 마주쳐 인사하자 그가 읽던 서신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오늘도 가는 거야? 너 빗방울 튀는 것 싫어하잖아.”

“괜찮아. 황자궁 들어갈 때까지 하나도 안 젖어서.”

헤헤 웃으며 대답하던 내 눈에 플렌드나의 문장이 들어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와. 신전에서 편지 왔어? 대사제님은 잘 지내신대? 다른 사람들은?”

반가운 마음에 나가려던 발걸음도 멈추고 라망드 옆에 앉았다.

“서멘더에서 온 건 아니고. 전언 통신문이야.”

“아… 정말? 무슨 내용인데?”

우리가 자란 서멘더 지방의 신전에서 온 게 아니라니 조금 실망이었다.

하지만 전언 통신문이라니!

전언 통신문이란 신성력을 이용해 신전 밖 사제들에게 발송하는 일종의 공지 사항이다. 이런 걸 받다니, 신전을 떠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와닿았다.

“음, 미뉴엘 네가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닌데.”

“뭔데에?”

“제국 남부에서 ‘불의 교단’이라는 무리가 나타났나 봐.”

“불?”

반사적으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라망드의 말마따나 내가 좋아할 소재는 아니었다.

불.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내게는 공포의 대상일 따름이다.

‘그야 전생의 나는…… 화재로 목숨을 잃었으니까.’

“그것 봐. 싫어하잖아.”

“…괜찮아.”

라망드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면서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생생해.’

언제쯤 잊을 수 있을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이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던 공기를.

패닉에 빠지자 젖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몸을 낮춰야 한다는 상식 따위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앞뒤 안 가리고 잡았던 비상구의 둥근 문고리는 악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나마도 잠겨 있어서 결국은…….’

미친 듯 문고리를 돌리다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자 미뉴엘이 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몸의 손바닥에도 흉측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이상하지.’

십 년 내내 신성력을 샤워하듯 들이부었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흉터라니.

‘게다가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기운.’

나는 뜨거운 기운이 응어리진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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