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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4)화 (4/130)

4화

내가 진짜 미뉴엘이었으면 어릴 때부터 아픈 몸이라고만 여기고 살았을 것이다. 조금만 무리해도 픽픽 쓰러지고 고열이 올랐으니까.

하지만 짧게나마 인생 일 회차를 겪었던 사람으로서 보자면 이것저것 죄다 수상했다.

‘신성력이 잘 맞는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앞으로 라망드가 미뉴엘과 함께 지내겠니?’

‘그래도 되나요?’

‘부디 그렇게 해다오.’

아무리 라망드를 내가 주웠다지만, 귀한 사제 인력을 전담으로 붙여놓고도 아쉬워하기는커녕 안도하던 신전의 고위직들.

‘태피스트리를 짰다고? 몸도 안 좋은데 쉬지 그랬느냐. 너는 손가락 하나 안 움직여도 된다, 아가.’

‘역시 별로죠? 첫 완성작을 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게 처음 만든 거라고? 당장 가보로 지정하마.’

아무리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막둥이라지만 하늘에 닿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화둥둥 떠받드는 가족들.

무엇보다도, 몸이 약한 원인으로 추측되는 가슴 속의 이 열기. 이건 화가 치솟는다 싶으면 덩달아 날뛰기까지 했다.

‘이 빌어먹지도 못할 자식들! 사랑과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 커흑! 우엑!’

‘미, 미뉴엘! 진정해!’

감정 조절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멋모르고 토했던 피가 대체 몇 통이던가.

울화병의 끝판왕이 이럴까 싶어서 이걸 대충 울화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화병이라고 쳐도 그렇게 각혈하지는 않지, 보통은.

‘다들 몸속에 이런 게 하나씩 있으면 선택적 분노 조절 실패자는 세상에서 사라질 텐데.’

아무튼 평화로운 금수저 라이프 밑바닥에는 그런 것들이 깔려 있었다.

어른들이 쉬쉬하니까 나도 모른 척, 순진한 척하며 눈 감고 살았던 지난 십 년.

‘외면만큼 편한 게 없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만 바랐다. 얼마 전에도 이 평온한 삶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참 타이밍이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짧은 전언이 적힌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의 교단이라니.”

신전에서 자란 나조차 처음 들어보는 교단이었다. 애초에 사랑의 신이나 바다의 신, 빛의 신 등은 있어도 물이나 불, 바람, 대지 등 자연의 사 원소를 관장하는 신은 없었다. 정령이 있었으니까.

‘이 부분은 원작에서 다뤄지지 않는 내용이기는 한데…….’

내가 신전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런 게 나타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와 연관 짓는 건 자의식 과잉이겠지. 제발 그래야만 했다.

“쩝. 내 꿈은 금수저 물고 편안하게 살다 가는 건데.”

에사디엔하고 결혼해서 예쁜 아기들도 낳고!

그런데 통신문을 접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듣고 라망드가 눈썹을 구겼다.

“가기는 어딜 가겠다고 그래.”

“에헤이, 무슨 소리야…….”

라망드는 죽음과 관련된 화제에 굉장히 민감했다.

혼나기 싫었던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내친김에 교단이라는 곳에 대해 물었다.

“있잖아, 그럼 이 불의 교단이라는 데에서는 정령을 신처럼 받드는 거야?”

“글쎄. 나도 처음 듣는 곳이라서. 하지만 분명한 건 각 신전에서 경계하며 보고 있다는 거야.”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통신문을 날리지도 않겠지.”

“옳은 말이기는 한데. 밖에서 마부가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

“아, 맞다! 나 진짜 다녀올게!”

나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에사디엔의 미친 미모를 보면서 힐링해야지!

“그렇게 그 황자님이 좋아?”

“그으럼. 보기만 해도 좋아. 너무너무 좋아.”

이렇게 에사디엔 얘기만 해도 좋았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허리를 굽혀 라망드에게 눈을 들이댔다.

“내 동공 하트 모양으로 변하지 않았어?”

“아니. 멀쩡히 동그란 모양인데. 나밖에 안 비쳐.”

“세상에. 에사디엔을 볼 때만 변하나 봐!”

내 눈에서 하트가 뿅뿅 쏟아지는 것 같다는 데에 이르자 라망드의 표정이 점점 떫어졌다.

‘내가 왜 얘를 붙잡아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나.’

그런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 번 봇물이 터지자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 같이 산책할 때가 정말 예술이야.”

에사디엔은 내게 큰 관심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요청을 거절하거나 딱히 나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애초에 내 청이라고 해봐야 함께 산책하자거나 손을 잡자는 것 정도지만.

단단한 팔. 시원한 향기. 그리고 햇빛 아래서 빛 가루가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머리칼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어쩌나. 오늘은 비가 와서 산책도 못 할 텐데.”

“라망드, 내가 안 놀아줘서 질투하는 거야?”

“무슨 투? 전투? 결투? 권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라망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차피 집에서 매일 보는데 뭐 하러 질투를 해? 그리고 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빠.”

하기야 라망드는 정식 사제님이니까. 다친 사람을 치료해 주거나 새 생명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등 그야말로 만능 캐릭터였다.

“그렇지? 고생 많네, 우리 라망드!”

대사제님의 말투를 따라 하며 라망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리를 굽혀 내 손길을 받아들이면서도 라망드는 끝까지 잔소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기나 하셔. 황자님이랑 재미있게 놀고.”

내 눈앞으로 내려온 라망드의 보랏빛 눈이 웃음을 머금었다.

“알았어?”

“그래, 알았어.”

대답을 들은 그는 손수 현관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아, 맞다. 미뉴엘.”

“응?”

“주방장이 그러는데 오늘 망고가 들어올 거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면서 행복 지수가 급격히 높아졌다.

불의 교단 따위 알 게 뭐람. 망고가 온다는데!

“망고!”

단것을 싫어하고 고기만 찾는 나. 그러나 망고는 예외였다.

망고 귀신인 나를 위해, 몇 살 때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부모님이 먼 남국의 망고 농장을 생일 선물로 주셨을 정도다.

비록 아주 멀리 떨어진 섬나라라서 매일같이 먹을 수는 없어도 이렇게 망고가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매우 행복해졌다.

“하하.”

라망드는 당장이라도 어깨춤을 출 기세인 나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니까 빨리 와. 응?”

익숙하게 내 볼을 문지르는 손길이 느릿하면서도 따뜻했다.

“당연하지!”

나는 경쾌한 대답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 * *

우기가 시작되자마자 황제와 황태자 언니는 내 마차가 황자궁에서 가까운 곳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거기에서 황자궁으로 들어가는 짧은 구간마저도 지붕을 씌운 회랑을 세워 물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권력 최고.’

비는 젖지 않고 지켜볼 때나 운치가 느껴지는 법이다.

흥얼거리며 회랑을 지난 나는 어느새 인사처럼 굳어진 말을 활기차게 외치며 에사디엔의 응접실로 발을 내디뎠다.

“황자님,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에사디엔 혼자 책을 읽고 있던 공간에 오늘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다.

민망한 것은 둘째치고 매우 낯선 풍경이라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에사디엔도 사람이니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당연한데,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의 모습은 마치 홀로 선 나무 같았으니까.

“카르이넨 영애.”

“아, 이분이?”

나를 아는 모양인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나를 보던 금발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사디엔도 체격이 좋은 편인데 이 사람은 근육의 크기 자체가 달랐다.

‘윽, 허벅지가 내 허리만 해.’

근육 애호에도 취향은 있는 법이다.

이렇게 여기 빰! 저기 빰! 하는 커다란 근육은 내 취향이 아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꽤 인상 좋은 미남이기는 했다.

살짝 빛이 바랜 듯한 금발도 보드라워 보여서 예뻤다. 물론 에사디엔만큼은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한 녹색 눈이 휘어졌다. 성큼 다가온 그가 부드럽게 내 손등에 입 맞추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저는 기사 테오도르 트레고스난이라고 합니다. 분에 넘치게도 황자님과는 오랜 친우입니다.”

“……!”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에사디엔을 보러 오면서 언제고 마주칠 줄은 알았지만 원작 남자 주인공이 벌써 등장하다니.

“사막으로… 파견 가셨다는 말씀은 들었답니다. 저는 황자님의 약혼녀, 미뉴엘 카르이넨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오랜만에 비 내리는 풍경을 보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얼핏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것 같았지만 내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서, 설마 몸이 저놈한테 반응한다는 클리셰로 가는 건 아니겠지?’

원작의 억지력 같은 건 절대로 사양이다. 나는 무조건 에사디엔 원 픽이야! 불륜도, 신파극도 싫다고!

“카르이넨 영애?”

테오도르가 특이한 생물을 보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슬금슬금 에사디엔의 뒤로 숨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아무래도 테오도르에 대한 호감보다는 미래에 대한 경계심이 더 뼈에 박힌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내겐 이쪽이 더 중요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사디엔의 허리나 만져보자 싶어 손에 힘을 꽉 줬다.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조금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아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소심한 아가씨치고는 꽤 목소리가 우렁차시던데요.”

“그야 저는 황자님을 좋아하니까요.”

뭘 당연한 걸 묻고 있어?

“하하, 이것 참.”

못 당하겠다며 중얼거린 테오도르의 눈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 유쾌하게 반짝였다.

‘그렇게 보지 마. 불안하니까.’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에사디엔의 등에 이마를 댔다.

그의 심장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지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영애, 서 있지 말고 그만 앉지. 테오도르, 너도.”

하지만 에사디엔은 단호했다. 허리춤을 쥔 내 손을 떼어 내고 소파로 앉혔다. 푹신한 쿠션은 반가웠지만 단단한 감촉을 잃은 게 아쉬워서 손바닥을 시무룩하게 쥐었다가 폈다.

“영애가 불편해하니 너도 이만 가고.”

“예에, 알겠습니다.”

우리를 번갈아 살펴보던 테오도르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난다 싶더니 허리를 살짝 숙여 에사디엔에게 속삭였다.

“약혼녀분을 보여주기도 아까우신가 봅니다.”

속삭였다고 해도 목소리를 낮춘 정도일 뿐이라 다 들렸다.

‘드디어 에사디엔도 나를 의식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섰지만 에사디엔은 칼날처럼 억측을 끊어냈다.

“그럴 리가.”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희미하게 귓불이라도 붉히면서 말해 줬다면 좋았으련만.

“황자님도 참. 사람 민망하게 왜 그러십니까.”

테오도르 자신이 민망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쓰러워하는 눈빛은 나를 향해 있었다.

“영애, 황자님이 표현하는 데 굉장히 서투르셔서요. 이래 봬도 마음은 따뜻하신 분입니다.”

“이만 가라고 했을 텐데.”

“아이쿠, 알겠습니다.”

한층 낮아진 에사디엔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어마 뜨거라, 하고 줄행랑을 쳤다. 덩치에 비해 방정맞은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좋은 사람이기는 한 것 같아.’

“카르이넨 영애.”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하는 내게 에사디엔이 말했다. 평소보다 더 딱딱한 말투였다.

“할 말이 있다.”

“아, 네!”

나는 얼른 자세, 아니 자리를 고쳤다. 맞은편에 앉은 에사디엔 옆으로 옮겨 찰싹 달라붙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옆으로.”

“팔짱 끼면 안 되나요?”

“안 된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그를 졸랐다.

“그럼 손잡고 싶어요.”

에사디엔의 푸른 눈이 아래로 향했다. 슬금슬금 그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내 손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가 사실을 지적했다.

“이미 잡고 있지 않나.”

“헤헤.”

그래도 놓으라는 말은 없었다. 허락도 아니었지만 나는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양손으로 그의 큰 손을 품듯이 꼬옥 붙잡았다.

“하실 말씀이란 게 뭐예요?”

내가 묻자 에사디엔이 얼굴을 조금 굳혔다.

“영애, 나는…….”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을 듣는 나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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