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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5)화 (5/130)

5화

* * *

미뉴엘이 떠나고 혼자 남은 에사디엔은 묘한 얼굴로 입가를 쓸었다.

흉곽 안쪽의 어딘가가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은가 하면 불안하게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건 황제에게 입양된 후 단조롭고 잔잔한 삶을 추구했던 그에게는 아주 생소한 느낌이었다.

“음.”

도무지 정의 내릴 수 없는 감각에 에사디엔은 가슴에서 짜낸 듯한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연스럽게 미뉴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갑자기 왜……. 제가 오늘 실수라도 했나요?’

우리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끝난 직후였다. 놀란 듯한 미뉴엘에게 에사디엔은 차분히 이유를 설명했다.

약혼을 받아들인 것은 폐하와 대공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본래 나는 누군가와 엮일 생각이 없었고, 그러므로 나는 그대가 내게 보이는 것만큼의 감정을 돌려줄 수 없다고.

‘아, 제가… 너무 부담스럽게 행동했죠.’

에사디엔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침묵하던 미뉴엘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평소에도 감정 표현이 확실한 그녀였다.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아니라고 하려던 에사디엔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딱히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대가 약혼 파기를 원할 줄 알았다.’

에사디엔은 황제의 친자가 아니다. 조카였지만 여러 사정으로 입적된 이름뿐인 황자로 세력도 무엇도 없다. 그러니 카르이넨 대공가에서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미뉴엘은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무릎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렇다면 최소한 평온하게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사디엔이 원했던 것은 보통 상류층 남녀가 그러하듯 정략으로 맺어진 건조한 관계였다.

애정이라는 것이 살아 숨 쉬는 기간이란 그야말로 찰나이다.

에사디엔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런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편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길이었다.

‘제가 황자님의 평화를 해쳤나요?’

비록 지금 조금 마음이 아프더라도.

에사디엔은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토록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황자님, 카르이넨 영애가 비를 맞고 가네요.”

생각에 잠긴 에사디엔의 주의를 일깨운 것은 환기 후 창문을 닫던 시종의 놀란 목소리였다.

미뉴엘 한 명의 몸을 위해 황제와 황태자가 이것저것 조치해 준 것을 에사디엔도 알았다. 그런데 비를 맞고 있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인가.’

창가로 다가선 그의 눈에 정말로 분홍색 머리통이 보였다.

괘씸함에 눈살이 찌푸려지려던 찰나였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미뉴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부드러운 하늘빛 눈망울이 부풀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미뉴엘은 호랑이를 만난 사슴처럼 회랑 안으로 뛰어들었다. 에사디엔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본인은 열심히 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더없이 느릿하게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에사디엔의 기분이 다시 한번 기묘해졌다.

다음 날. 오랜 먹구름을 뚫고 거짓말처럼 해가 쨍쨍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으로 관리되는 황제의 비원은 수분을 머금어 한층 더 아름답게 빛났다.

“어서 오십시오. 삼황자님, 카르이넨 공녀님.”

비원의 총책임자인 관리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반겼다.

에사디엔도 비원에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야에는 아름다운 비원 대신 그 풍경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하는 미뉴엘만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어제의 반응을 생각하면 최소한 며칠은 방문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미뉴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비슷한 시각에 나타났다.

‘이 여자도 알고 보니 얼굴이 꽤 두껍군.’

느슨해 보여도 대귀족의 딸이라는 것인가.

에사디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비원은 선대 황제 폐하께서 부군을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본디 평지였으나 땅을 파서 호수를 만들고 두 분의 추억이 어린 언덕을 그대로 옮겨 왔답니다.”

“선대요? 몇 대에 걸쳐 만든 것이 아니라?”

“하하하. 마법사들이 꽤 많이 동원되어서 석 달로 끝났다고 합니다, 공녀님.”

관리와 미뉴엘이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것이 들려왔다.

관리는 점잔을 빼지 않는 그녀의 솔직한 반응에 신이 나서 묻지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럼 원래 언덕이 있던 곳은…….”

그에게 질문하던 미뉴엘의 눈이 문득 에사디엔과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달려올 줄 알고 에사디엔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그러나 미뉴엘은 옅은 미소와 함께 짧은 눈인사를 보냈을 뿐 다시 관리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에사디엔은 인사를 돌려주지 않은 채 의식적으로 미뉴엘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엄청 신경 쓰이네.’

절대 그럴 리 없지만 에사디엔의 눈길이 자꾸 내게 꽂히는 것만 같다. 물론 내가 의식하는 탓이겠지.

‘덥다…….’

여름이라 양산을 쓰고 있어도 더웠다.

화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손수건으로 땀이 솟은 이마를 살짝살짝 눌렀다. 평소에는 화장을 옅게 해서 걱정이 없었겠지만 어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비를 잠깐 맞았다고 밤사이 열이 올랐다.

비련의 여주인공도 건강한 사람이나 하는 거였다.

‘그러게 왜 비를 맞아, 맞기를! 바보야?’

라망드는 따발총 같은 잔소리와 함께 신성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귀에서 피가 나는 줄 알았지만 덕분에 기운이 돌아오기는 했다.

미열이 불그스름하게 남은 피부가 티 날까 봐 하녀에게 두껍게 분을 올려달라고 청하는 내게 라망드는 그냥 다 나을 때까지 쉬라고 말했다.

‘그래도 곧바로 발길을 끊는 건 꼭 시위하는 것 같잖아.’

나라고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사디엔의 말을 곱씹어보니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내 감정만 들이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반성했다.

‘아.’

호수 주변을 둘러싸듯 심은 수선화는 선대 황제가 부군에게 내린 상징이라는 설명을 듣다가 문득 에사디엔과 눈이 마주쳤다. 두 번째였다.

‘우연이지, 우연.’

에스코트를 핑계로 팔짱을 끼고 싶어 근질거리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고양이도 귀엽다고 달려들면 도망가는데. 야생… 아니 황성의 황자님을 너무 놀라게 했다.

“자, 이 정도면 대략적으로 안내를 해드린 것 같군요. 이제 호수에 배를 띄워볼까요?”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가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관리의 말은 나를 빵긋 웃음 짓게 했다.

‘드디어 에사디엔의 근육을 보겠구나!’

그러나 잠시 후.

“…….”

큰 기대는 큰 실망으로 돌아온다던가.

‘아니, 플렌드나 님! 진짜 이러시기예요?’

표범처럼 늘씬한 근육… 아니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기대하며 쪽배를 부르짖었건만. 막상 내 눈에 들어온 건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대형 곤돌라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님, 공녀님.”

심지어 사람 좋은 얼굴로 벙싯 웃는 뱃사공까지 있었다.

황제도 딱히 여기 들어와서 뱃놀이나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이 금빛 찬란한 배는 대체…….

“자, 타실까요?”

내 실망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은 먼저 배에 타고 있었다.

나는 눈앞에 내밀어진 에사디엔의 손을 잡으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어디 앉아야 하지?’

곤돌라는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배다. 에사디엔을 대하기가 조금 어색했기 때문에 그의 옆에 앉을지, 아니면 맞은편에 앉을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당연하다는 듯 내 손을 놓지 않고 관리의 반대편에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은가?’

흘긋 쳐다본 에사디엔의 옆얼굴은 평소처럼 아름답고 담담하기만 했다.

하기야 에사디엔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속이 시원하겠지.

어제 일을 의식하는 건 나뿐이라는 생각에 시무룩했던 기분이 더 곤두박질치려던 찰나였다.

“왜 그러지.”

“네?”

“더운가.”

“아, 조, 조금요. 괜찮아요.”

갑자기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다. 그냥 약혼자니까 예의상 묻는 것일 텐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손을 포개고 있었다.

‘으음. 빼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이대로 있기로 했다.

‘자기가 잡았으니까 뭐라고 하진 않겠지, 뭐.’

이렇게 더운데도 에사디엔의 온기는 좋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찐사랑이었다.

너무 좋아서 마구 달아오르는 얼굴을 에사디엔에게 보이지 않으려 시선을 호수 쪽으로 돌렸다.

‘예쁘다.’

수로가 아니라 넓은 호수, 심지어 사람이 만들어낸 인공 호수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빠짐없이 계산하에 배치된 곳이지만 아름다움만큼은 진짜였다.

잔잔한 바람과 물결을 가르는 기다란 노로 인해 맑은 물 위에 햇빛이 부딪혀 찬란하게 부서졌다.

‘장갑만 아니었어도 물에 손을 담가보는 건데.’

하지만 그 아쉬움은 곧 사라졌다.

“오 태양과 같은 그대여, 그 빛을 내게도 비춰주오. 설령 먼다고 해도 이 눈을 돌리지 않으리.”

뱃사공의 낮고 풍부한 노랫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곤돌리에(Gondolier) 같잖아?’

사랑을 갈구하는 가사와 달콤한 음률에 나까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 기분 정말 좋다.’

덥지만 좋은 날씨, 살짝 선선한 바람, 아름다운 풍경과 노랫소리. 그리고 내 옆에는 넓고 탄탄한 어깨가 있다.

기분에 취해 나도 모르게 에사디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려다 흠칫 정신을 차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에사디엔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모양이다.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제 발이 저렸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

에사디엔의 눈동자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마주 웃어주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정면을 보았다.

‘쓰읍, 좀 빨리 기댈걸.’

아쉬움이 넘쳐서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는 와중 곤돌리에가 잠시 노질을 멈췄다.

“이 부근이 호수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곳입니다. 수면을 내려다보시면 다른 곳과 물 색깔이 다른 게 보이실 겁니다.”

“와. 정말이네…….”

대체 얼마나 깊게 파낸 거야?

아까보다 조금 더 남빛을 띠는 물을 내려다보다 조금 오싹해져서 자세를 바로 했다.

곤돌리에는 그런 나를 보며 하하 웃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들의 무덤이 되겠지.”

‘엥? 갑자기 웬 자객 같은 대사?’

너무 뜬금없어서 현실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입을 딱 벌리는 사이 곤돌리에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먼저 바로 옆에 있던 관리의 가슴을 단도로 찌른 그의 얼굴에서 사람 좋은 웃음 따위는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뭐야, 이거. 진짜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대화했던 사람이 피를 흘리며 호수로 가라앉았다.

“쯧.”

내가 충격받은 사이, 에사디엔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비원도 황제의 공간이므로 입구에 들어서며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을 맡겼던 것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누가 보냈지?”

그러면서도 에사디엔은 충격받은 나를 감싸며 날카롭게 물었다.

“의뢰인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

내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사이 곤돌리에, 아니 자객은 핏발 선 눈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냥 조용히 죽어.”

“아, 안 돼!”

정신을 차리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나는 에사디엔의 팔을 뿌리치고 그를 덮치듯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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