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영애!”
에사디엔의 눈이 이렇게 커진 건 처음 봤다.
‘아, 가만히 좀 있어요!’
그 와중에도 또 앞으로 나서려는 것 같기에 나는 아예 그를 꽉 껴안아 버렸다. 품 안에서 에사디엔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한테 무슨 전설의 힘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고작해야 각혈 유도밖에 안 하던 울화가 이제 와 각성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한테는 겁나 센 수호부가 있다!’
내가 신전을 떠나기 전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대사제님이 작별 선물이라며 주셨던 수호부.
‘나가서는 말썽부리지 마라.’
‘전 그런 적 없는데? 완전 착한 아이였는데요?’
‘내가 너 때문에 생길 뻔한 주름이 백 개는 될 거란다.’
요즘 들어 부쩍 수분 공급과 주름 예방에 신경 쓰시던 대사제님.
플렌드나를 향해 성호를 그으면서도 그분은 내게 그것을 주셨다.
‘언젠가 위험에 처할 때 이게 널 지켜줄 게다.’
“그래도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
그 순간,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자객의 비명이 들렸다.
“크억!”
뭐지, 하고 실눈을 뜨자 피투성이가 된 채 저편으로 날아가는 자객이 보였다.
“수호부가 진짜 대박이구나……?”
하지만 감탄도 잠시,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꺅!”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여기서도 적용될 줄이야.
에사디엔과 나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배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부유감이 잠시 스치고, 이내 강한 충격과 함께 물보라가 나를 감쌌다.
“어극, 푸!”
망했다. 나는 수영을 못 하는데!
물에 들어가면 긴장을 풀어야 한다는데 그게 되질 않았다. 몸에 걸친 무거운 드레스마저 합세해서 누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렇게 죽는 건가?’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에사디엔이랑 키스도 못 해보고 이렇게 죽는 건가?’
비릿한 호숫물을 꼴꼴꼴 들이켜며 서서히 눈을 감는 와중, 내 허리를 강하게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뉴엘!”
억지로 끌어 올려지는 느낌과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정신 차려라, 미뉴엘!”
하지만 몽롱한 머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생에선 화재로 죽고 이번에는 물에 빠져 죽는구나.
‘인생이란…….’
허무한 웃음이 그려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천이 스치며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 물줄기가 쪼르르 떨어지는 소리. 창밖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청력이었다.
다음으로는 촉각. 서늘한 물수건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엘가 언니……?”
“일어났니?”
이번에야말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목숨은 생각보다 질겼다.
‘민망할 정도네.’
그렇지 않아도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물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몸 상태는 최악이 되었다.
끙끙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큰언니가 잔뜩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니는 영지에 일이 있어서 한 달 전에 북부로 올라갔는데.’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난 건가.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긴 생각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삼 일이나 앓았다, 미뉴엘.”
“미안……. 황자님은?”
“제일 먼저 묻는 게 네 몸 상태가 아니라 황자의 안부냐.”
나는 힘없이 웃었다.
내 얼굴을 본 큰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과 함께 답을 들려주었다.
“다친 데 없이 잘 계시다. 내가 알기로는.”
“다행이다.”
비원이라고 해도 모습을 감춘 기사들이 있었을 테니 아마도 그들이 구해 줬겠지.
“언니, 너무 가까워. 감기 옮아.”
“그런 것은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다.”
“그래도.”
힘없는 손을 들어서 밀어내 봤지만 역시나 나 같은 것에게 밀려날 언니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보스스 웃으며 물었다.
“형부는 잘 있어?”
“항상 똑같지. 여전히 너처럼 예쁘고.”
“에이. 언니 눈에는 형부가 제일 예쁘잖아.”
큰언니의 남편 소디엠은 우리 아빠만큼이나 미인이다.
우리 집안의 가신 중 한 명인 그는 언니가 몬스터에게서 구해 준 일로 반해서 쫓아다니다 결혼에 골인한 케이스였다. 그 일 때문에 큰언니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아니, 너랑 똑같이 예뻐.”
이렇게 서로 좋아 죽으니, 원.
전에는 둘을 보면 흐뭇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조금 부러웠다. 에사디엔이 생각나서.
“하여튼… 같이 오지 그랬어.”
“안 그래도 다음번에는 꼭 함께 오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소디엠은 우리 집안사람답게 나를 엄청 예뻐해 줬다. 아니, 나에게 잘하지 않으면 애초에 언니가 받아주지도 않았겠지만.
“우리 막내, 일어났다면서!”
소식을 들었는지 잠시 후 쥬엘라 언니도 찾아왔다. 수프를 조금씩 마시는 나를 턱을 괸 채 지켜보던 언니들이 물었다.
“아가, 오늘은 뭐 하고 싶어? 언니들이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게.”
“언니들, 오늘 쉬어?”
멍한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엄마를 빼닮은 흑발에 적안의 미인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언니들, 너무 예쁜 거 아닌가요.
“그럼 언니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
“그건 당연한 거고.”
“음, 그럼.”
뭘 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문득 사흘이나 앓았다는 말이 떠올라 팔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언니들이랑 같이 목욕할래.”
“어머? 좋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쥬엘라 언니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웬걸, 문이 열리며 하녀가 들어와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가씨.”
오잉? 미리 준비한 거야, 뭐야?
내 눈이 휘둥그레지자 쥬엘라 언니가 깔깔 웃었다.
“모처럼 막내와 보내는 귀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네가 원할 법한 걸 다 준비시켜 뒀단다.”
“아니, 그거 너무…….”
“어허. 우리 아가는 즐기기만 하세요.”
묘한 박력에 더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조금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데 피식 웃은 엘가 언니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얌전히 있어.”
“…….”
우리 언니들… 박력이 너무 넘쳐.
엘가 언니의 품은 속에 갑옷이라도 받쳐 입은 것처럼 단단했다.
‘언니들이 멋짐을 다 가지고 태어나서 내가 이런 부스러기가 된 걸까?’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잠깐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도착했단다.
“하아, 시원하다.”
언니들은 몸을 담그며 하나같이 그렇게 말했다. 뜨거운 물인데.
“사, 살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뜨거운데?”
“가만히 있으면 시원해져.”
우리 언니들, 미모와 다르게 속은 왜 이렇게 어르신 같은 거야……?
기겁한 나는 탕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쥬엘라 언니가 짓궂게 껴안는 바람에 실패했다.
“어딜!”
“으아! 으아아…….”
나는 곧바로 포기하고 몸에서 힘을 뺐다. 움직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어야 적응이 빨라진다.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미뉴엘.”
“으, 응?”
“삼황자님은 계속 만날 생각이냐.”
“그럼. 당연하지.”
왜 그런 걸 묻지?
고개를 기울이자 수건 밖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물에 잠겼다.
엘가 언니는 쥬엘라 언니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후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뉴엘, 그렇게 그 황자가 좋으냐.”
라망드랑 똑같은 말을 하네.
쥬엘라 언니도 조금 마땅찮은 듯 말했다.
“너만 좋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삼황자 때문에 네가 다칠 뻔했잖아.”
“그 암살자, 황자님을 노린 거야?”
“그렇다더라.”
“누가?”
대체 어떤 놈이?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미인을 죽이려고 할 수가 있어? 황자님이 죽으면 인류 전체의 손해야.”
믿을 수 없었다. 감히!
언니들은 잠시 마주 보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미뉴엘, 너 방금 되게 플렌드나 님의 사제 같았어.”
“그, 그랬어?”
너무 흥분했나.
“미인이라든지, 그런 문제보다는 널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정 아니다 싶으면 파혼해 버려. 언제든.”
나는 그저 웃었다.
“내가 황자님을 많이 좋아해.”
“미뉴엘…….”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에사디엔이 좋았다.
그가 언젠가는 나를 보며 웃어줄 거라고, 바닷빛 눈이 따뜻하게 빛날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아해, 정말로.”
내 얼굴을 본 언니들은 에사디엔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았다.
그 뒤로 욕실에서 나와 몸단장을 하는 동안, 언니들은 마치 시녀처럼 내 옆에서 예쁘게 자른 망고 조각을 입에 넣어주었다.
“자. 아, 해.”
“아아.”
“옳지.”
“맛있어!”
나는 그저 아기 새처럼 받아먹기만 하면 될 뿐. 발을 동동 구르면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던 중 하녀가 놀라운 소식을 가져왔다.
“아가씨, 삼황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 *
‘에사디엔.’
어머니.
‘사랑하는 내 아들.’
병약한 몸, 초췌해진 얼굴. 광기로 얼룩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좁디좁았던 나의 세상.
‘이리 온.’
다가가면 목이 졸릴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부름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또인가.’
꼬챙이로 찔리는 듯한 두통에 에사디엔은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비원에서 사고가 있었던 날 이후로 묻어놓았던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의식 위로 올라오고는 했다.
이건 아마도…….
‘카르이넨 영애 때문이겠지.’
아무리 불러도 굳게 감겨 있던 눈, 핏줄이 비칠 정도로 창백해진 피부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
그 핏기 없는 얼굴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도 겹쳐 보여서.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껏 대공저에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황자님.”
“…….”
아무리 관자놀이를 짓눌러도 두통은 해소되지 않았다. 의사가 지어준 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계속해서 시달리는 에사디엔에게 시종이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카르이넨 영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
“병문안을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고 싶지 않았다. 약하디약한 미뉴엘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계속 날 것만 같았다.
“가야겠지.”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황제와 대공을 보아서라도 약혼자로서 본분을 다해야 했다.
마음을 굳히고 눈을 뜬 에사디엔의 앞에 큼지막한 꽃다발이 내밀어졌다. 미뉴엘의 머리카락처럼 온통 핑크빛으로 만개한 꽃들이었다.
“그러실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어째서인지 시종들이 더 들뜬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다들 미뉴엘을 좋아했다. 에사디엔, 그를 제외한 모두가.
‘에사디엔, 에사디엔, 에사디엔…….’
꽃다발과 함께 받은 것들을 들고 오면서도 에사디엔은 들릴 리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시달렸다.
“제발 그만.”
날을 잘못 잡은 것인가. 이래서야 자칫하다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생각한 에사디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타닥타닥.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