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에사디엔은 저도 모르게 다시 착석했다.
“황자님!”
곧이어 다급하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뻣뻣하게 주름이 잡혀 있던 에사디엔의 미간이 풀어졌다.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변화였다.
“영애.”
“황자님!”
문이 완전히 열리는 것도 기다릴 수 없었던 미뉴엘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환하게 웃으며 몸을 들이밀었다.
둔감한 에사디엔에게 보일 정도로 미뉴엘은 며칠 못 본 사이 더 말랐다.
평소 그를 만날 때 입던, 어깨를 부풀린 풍성한 드레스가 아니라 실내복 차림이어서 더 티가 났다.
‘조심해야…….’
저런 몸으로 어떻게 암살자 앞을 가로막은 것인지.
뛰어오는 모습조차 불안해서 에사디엔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하지만 그러기 직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그래서 모를 거라 생각했건만 미뉴엘은 이미 에사디엔의 불편한 표정을 읽고 발걸음을 늦춘 뒤였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후원에 갔던 날에도 그렇고, 미뉴엘이 에사디엔의 눈치를 살필 때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러지 마라. 나는 그대가 그럴 정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달래고 싶지만, 그러면 혹여 미뉴엘이 괜한 희망을 가질지도 모른다.
망설이던 에사디엔의 눈에 조용히 맞은편에 앉는 미뉴엘의 손이 들어왔다.
‘장갑?’
장갑이야 다들 착용하는 아이템이지만 외출할 때의 이야기지 집 안에서도 끼는 사람은 없었다.
“저어…….”
조심스러운 미뉴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에사디엔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좀 더 마르기는 했지만 미뉴엘의 얼굴에는 발그레하니 혈색이 돌고 있었다.
기억과 다른 모습을 보자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옆에 놓인 물건에 생각이 미쳤다. 에사디엔이 급히 미뉴엘에게 꽃다발과 상자를 들이밀었다.
“늦었지만 감사를 표한다.”
“네?”
미뉴엘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좋아하는 남자한테 뭘 받는 경험이 생소한 탓인데, 에사디엔은 그녀가 멀거니 꽃을 들여다보는 것에 머쓱함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한마디로 둘 다 연애 고자였다.
“구해 준 것이, 말이다.”
“아아…….”
그제야 미뉴엘의 얼굴에 웃음이 다시 번졌다. 그녀는 꽃다발을 꽉 껴안으며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에이, 전 황자님이 안 다치신 것만으로도 기쁜데… 뭘 이런 걸 다.”
“…….”
“아, 물론 선물이 안 기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 상자는 뭔가요? 풀어봐도 될까요?”
에사디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향기를 들이켜는 얼굴에는 ‘기쁨’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카롱이네요! 예뻐라…….”
마카롱? 시종이 함께 건넸던 상자에 과자가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차하고 같이 낼까요?”
이제 완전히 웃음을 되찾은 미뉴엘이 묻자 에사디엔은 또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인을 불러 미뉴엘이 이것저것 지시하고 난 후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에사디엔이 드디어 입술을 떼었다.
“본디…….”
“네?”
“본디 몸이 그리 허한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말한 에사디엔도, 들은 미뉴엘도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미뉴엘에게 있어 이런 질문은 어릴 때부터 익숙한 것이었으므로 곧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카르이넨 집안사람치고 약하기는 하죠.”
잠시 보들보들한 꽃잎을 살살 쓰다듬던 미뉴엘이 에사디엔과 눈을 곧게 맞추며 방긋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와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 순간 에사디엔이 느낀 감정은 그야말로 복합적이었다.
또다시 가슴 한쪽이 술렁거렸다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마지막으로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실제로 다른 이의 재촉에 못 이겨 방문한 것이었으므로.
‘읏.’
에사디엔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가 딱 질색하는 것이었다.
“영애, 그러면 나는…….”
괜찮아진 걸 봤으니 이만 가보겠다고 입을 떼려던 때였다.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하인이 아니라 사제복을 입은 자가 웨건을 끌고 들어왔다.
‘아무리 기세가 등등한 대공가라고는 해도.’
황실에서도 사제가 차 대접을 하지는 않는다.
의아해진 에사디엔이 미뉴엘을 봤지만 그녀도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왜 네가……? 아, 황자님. 이쪽은 제 소꿉친구인 라망드 플렌드나 사제예요.”
“제국의 작은 빛을 뵈어 영광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에사디엔에게 무릎을 굽혀 보이며 예를 갖춘 라망드가 곧장 미뉴엘 앞에 물컵과 약봉지를 놓았다.
“아까 네가 잡을 틈도 없이 뛰어나가서 약을 못 먹였다고 소공작께서 염려하셔서.”
“아니,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 꼭 손님 앞, 콜록.”
에사디엔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하던 도중 미뉴엘의 입에서 작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시에 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소공작께 기합받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작은 공녀님도 걱정하셔.”
라망드가 어르는 것에 이어 에사디엔도 말을 보탰다.
“괜찮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들도록. 사제여, 영애에게 신성력을 베풀어주겠나.”
“자, 황자님께서도 저리 말씀하시잖아.”
다시 한번 어르며 라망드가 에사디엔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나 참.”
미뉴엘은 잠시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고분고분하게 약을 먹고 라망드의 신성력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조금 전에 비해 더 혈색이 돌며 미뉴엘의 뺨이 장밋빛으로 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에사디엔의 입매가 조금 부드러워지려는 순간, 라망드가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웬일로 마카롱 같은 것을 들였어? 단것은 입에도 안 대면서.”
‘맛있겠다, 가 아니라 예쁘다고 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나.’
그러고 보니 미뉴엘은 황자궁에 드나들며 에사디엔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가고 있었지만 막상 그는 그녀의 취향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실수를… 했군.’
“무, 무슨 소리야아. 아니에요, 황자님. 신경 쓰지 마세요.”
솔직한 미뉴엘은 거짓말에 참 재능이 없었다.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 옆에서 라망드라는 사제의 자색 눈이 도르르 굴러 에사디엔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 눈에는 분명 미묘한 빛이 어려 있었다.
에사디엔이 눈썹을 들려는 찰나, 라망드가 ‘사제다운’ 미소를 다시 덮어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기를.”
* * *
조용히 닫히는 응접실 문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라망드 쟤는 괜히 와서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내가 못 살아.
언니들도 똑같다. 당장 독약을 마신 것도 아닌데 약 조금 늦게 먹는다고 별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 자리에 라망드를 보낸 것도, 에사디엔이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쥬엘라 언니!’
삐졌네, 삐졌어. 내가 뒤도 안 돌아보고 에사디엔한테 달려왔다고 삐졌어.
“미안하군. 그대의 기호를 미처 알지 못하여.”
어쩐지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라망드가 잘못 아는 거예요. 게다가 황실 파티시에의 솜씨일 텐데 맛이 없을 리가 없죠.”
그러고는 증명하려고 바로 마카롱을 삼켰다. 하나, 아니 반의반만 잘라냈는데도 단맛이 순식간에 입 안을 점령했다.
‘으엑.’
황실 파티시에라고 해도 단것을 안 달게 만들 재주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달지 않으면 마카롱이 아니지. 설탕, 달걀흰자, 아몬드 가루, 잼과 가나슈로 만든 건데.
최대한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차를 들이켜는데 에사디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먹을 필요 없다.”
“어, 억지 아닌데요.”
“…….”
아무 말 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푸른 눈이 매서웠다.
“저엉말 아닌데에…….”
“카르이넨 영애, 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어도 신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번에는 내 입이 다물어졌다.
지난번부터 에사디엔은 사랑에 대한 거부감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여주인공에게는 사랑을 느끼게 된단 말이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혀끝이 씁쓸해졌다.
도저히 찻물로는 헹궈지지 않아 마카롱을 다시 입에 넣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접시를 덥석 빼앗아 갔다.
“그러니 그대에 대해 솔직하게 알려주었으면 한다.”
‘영애, 황자님이 표현하는 데 굉장히 서투르셔서요. 이래 봬도 마음은 따뜻하신 분입니다.’
문득 테오도르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요?”
“그래.”
“뭐든지요?”
에사디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태도였다.
그러시다면야.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름으로 안 불러주셔서 너무, 너무, 너무 서운해요.”
“그건…….”
“처음 뵈었을 때부터 미뉴엘이라고 불러달라 말씀드렸는데.”
“…….”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에사디엔의 얼굴에 ‘네 정보를 말하랬지 언제 나를 추궁하라 했느냐’는 생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게 목숨을 빚진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터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기대어 크게 한 방 질러보았다.
“에사디엔.”
그의 넓은 어깨가 굳었다. 크게 벌어진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나는 다시 한번 졸랐다.
“어서요.”
“그…….”
과연 에사디엔은 망설일지언정 황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입이 몇 번이고 벌어졌다 닫히는 것을 다소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뉴엘.”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은 마카롱보다도 달콤하게 울렸지만 그건 행복의 맛이었다. 어느새 입 안에서 씁쓸한 맛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자, 이제 받고 더블로 가볼까?’
나는 그가 준 꽃다발처럼 웃으며 한 걸음 더 내디뎌보았다.
“에사디엔, 우리 데이트할까요?”
“데이, 쿨럭. 데이트?”
“네. 데이트하고 싶어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에사디엔은 찻물이 목에 걸려 기침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단둘이! 오붓하게! 뱃놀이!’
“두세 시간만 가면 뱃놀이하기 좋은 호수가 있대요. 변복하고 가요, 네?”
‘이번에야말로! 팔뚝을!’
의지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는 내 눈을 보고 에사디엔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대의 몸 상태가 안정되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를…….”
“너무하세요. 좋아하는 분한테까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아, 아까는 미안했다. 그런데 꼭 배를 타고 싶은 건가?”
암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외치는 대신 눈길을 내리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