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뱃놀이도 하고 싶지만, 에사디엔은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그대는 겁도 없는가 보군.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거야 뭐. 이렇게 살아 있는걸요.”
인생,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에사디엔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설핏 웃음이 보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에는 사라져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알겠다. 날짜는 그대가 정하도록.”
“꺄아! 좋아요!”
나는 기성과 함께 벌떡 일어나 에사디엔을 꽉 껴안았다. 얼결에 나를 받아낸 그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미뉴엘, 이건 너무 가깝…….”
“쉿.”
귀여워 죽겠네.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손가락을 세워 에사디엔의 입술을 막았다.
“그럼 내일로 결정이에요!”
“그것도 너무 가깝…….”
“내. 일. 요.”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듯 말했다.
애초에 내게 날짜 결정을 맡긴 게 에사디엔의 패인이었다. 결국 그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한숨과 함께 승낙이 떨어졌다.
“알겠다.”
오예! 근육!
“와아아! 앗……?!”
너무 기쁜 나머지 만세를 부르던 중 허리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며 삽시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으아!”
“조심……!”
그나마 앞에 있는 사람이 에사디엔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커다란 손이 안정감 있게 뒤로 넘어가려던 나를 붙들어 당겼다. 기사답게 빠른 반응이었다.
다만 에사디엔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건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는 내 몸은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앗.”
코끝이 스치는 거리에서 호흡이 섞여들고 시선이 얽혔다.
“…….”
“…….”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내가 처음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떨리는 침묵이었다.
‘왜… 안 밀어내지?’
이대로 해, 해도 되는 건가?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하자. 저지르자!’
인생은 타이밍이랬다. 지금이 바로 플렌드나 님이 내린 뽀뽀 타이밍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똑똑.
적막을 깨는 노크 소리와 동시에 에사디엔이 나를 번쩍 들어 옆자리로 내려놓았다. 옆자리라고 해도 어찌나 멀찍이 떨어뜨렸는지 우리 둘 사이에는 사람 두 명도 넉넉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타이밍… 실화인가?’
나는 그 거리를 보며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일생일대의 기회였는데! 이대로 입술 도장 진하게 찍어버리는 거였는데!
‘좀 더 빨리 할걸!’
그러나 이미 타이밍은 지나간 뒤였고 무심한 노크 소리만 한 번 더 울렸다.
똑똑.
“아가씨, 집사입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버, 벌써?”
우리는 눈을 키운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내 에사디엔이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군.”
“배웅할게요.”
에사디엔과 함께 저녁까지 먹으면 좋겠지만 내일 만날 텐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물론 나는 기꺼이 그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기분이 몽글몽글해.’
참으려고 했지만 계속 미소가 입술 사이로 배어 나왔다.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이런 걸까? 발걸음마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결국 현관홀에 도착할 때까지 웃음을 멈추지 못한 내게 에사디엔이 담담한 인사를 건넸다.
“잘 자고.”
“너무 설레서 못 잘 것 같아요.”
“음. 내일 그대의 몸 상태가 나빠지면 곧바로 돌아올 생각이다.”
이, 이런. 그런 카드를 꺼내 들 줄이야.
“알았어요……. 설레지만 최대한 푹 자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래.”
나를 보는 에사디엔의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전에 없던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입술 도장을 찍을 기회는 놓쳤지만 그와 이 정도로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그럼 이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에사디엔이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플렌드나 가라사대, 사랑은 쟁취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어.”
그러니 앞으로도 이렇게, 가랑비처럼 그를 적셔가면 되겠지.
여주인공이 나타나기 전에.
* * *
다행히 단둘이 보내는 첫 데이트 날은 아침부터 화창했다. 어젯밤부터 라망드의 신성력을 풀 충전한 내 기분도 화창!
“좋은 아침이에요, 에사디엔.”
두근두근.
기분 좋게 뛰는 가슴과 별개로 에사디엔을 보고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은근히 준비성이 좋잖아?’
어제 봤던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아니라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검은색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러 온 에사디엔은 마치 음유 시인처럼 짧은 망토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으면 머리칼이 반짝거리지는 않겠지만 이건 또 운치가 더해져 새로운 매력이!
“진짜 잘생겼다. 누가 반해서 쫓아오면 어떡해요?”
에스코트하려 내게 손을 내밀던 에사디엔이 움찔하며 얼굴을 휙 돌렸다.
만날 때마다 잘생겼다, 멋지다 칭찬을 해줘도 영 적응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대는 정말… 하아. 어서 출발하지.”
“솔직한 감상이었는데.”
“미뉴엘.”
“헤헤, 네에.”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에사디엔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가 오늘 방문할 곳은 로콰이트 근교의 카듀렌이라는 소도시였다. 깨끗한 호수가 있고 수도 근처라 치안도 나쁘지 않은 곳.
“우와!”
두 시간 좀 넘게 달려 도착한 호수 앞에서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감탄했다.
뱃놀이 명소라는 소문답게 호숫가에는 쪽배가 몇 채나 매여 있었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은 집 몇 채를 제외하면 호수를 둘러싼 건 온통 키 큰 나무들 뿐이었다.
‘그래. 이거지!’
황제의 비원도 정말 아름다웠지만 나는 이 엽서 같은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에사……! 아.”
에사디엔의 손을 잡아끌려던 내가 멈칫하자 역시 호수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왜 그러지?”
“이름을 부르면 혹시 누가 알아볼 수도 있잖아요. 저야 괜찮지만…….”
나야 사교계 활동을 한 적도 없고 여기 온 것도 처음이니까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아무리 칩거 생활을 한다고 해도 황족. 게다가 황족의 이름은 그것의 주인이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었다.
“음. 가명으로 불러드릴까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아!”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에사디엔과 시선을 마주한 채 음흉한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빵끗 웃었다.
“자기♡”
“……!”
난데없는 호칭에 놀랐구나, 싶었던 것도 잠시였다. 에사디엔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었다.
‘어, 어라?’
“그대는 내가 했던 말을 깡그리 잊은 모양이지.”
“황자님?”
“원한 것이 저 배인가. 어서 타고 돌아가도록 하지.”
에사디엔은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몸을 돌려 배 주인에게 삯을 치렀다.
‘어제부터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너무 들이댔나.’
그래도 저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는데.
아직 에사디엔이 받아줄 수 있는 한계점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미뉴엘.”
“아… 네.”
에사디엔이 돌아보며 불렀다. 나는 시무룩한 낯을 유지한 채 배에 올라탔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꾹꾹 눌러 쓰듯 메모하는 중이었다. 내게 포기 따위는 없었으므로.
[‘자기’ 호칭 금지.]
들뜬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지만 주변 분위기는 여전히 평화롭기만 했다.
우리 주변에도 배를 탄 커플이 몇 있었는데, 남자들은 하나같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상태였다.
반면 에사디엔은 냉랭한 얼굴 그대로 기계처럼 노를 젓고 있었다. 심지어 옷도 그대로였다.
나는 급격히 슬퍼졌다. 아까 에사디엔이 한마디 했을 때보다 더.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말문을 다시 트기로 했다. 노려보고 있는다고 에사디엔이 나서서 옷을 벗어 던질 리는 없으니까.
품에서 부채를 꺼내 그에게 살살 바람을 보내주며 물었다.
“덥지 않으세요?”
“…괜찮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퍽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저 사람들은 많이 더워 보여서요.”
“망토와 모자에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주문이 걸려 있다.”
“어머, 신기해라. 다행이네요!”
방긋 웃는 내 시선을 피한 에사디엔은 모르겠지. 내가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할…….’
아까 준비성 좋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 이 천하의 철벽남 같으니!’
나는 완전히 앵돌아졌다. 부채를 휙 돌려 내게 부치는데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에사디엔이 웃는다고?
놀라서 그를 봤지만 담백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 돌아왔을 뿐이다.
“왜 그러지?”
…그럼 그렇지. 웃음기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아니에요.”
어느새 배는 호수를 한 바퀴 다 돌고 뭍에 닿았다.
에사디엔은 데이트가 아니라 운동을 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이제 돌아가자고 하겠네.’
두 번의 실패로 기운이 빠져버려서 더 놀자고 조를 의욕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얌전히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웬걸, 얼마 달리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미뉴엘, 내리지.”
“어… 네?”
“마침 점심때다. 식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긴, 에사디엔은 몸을 썼으니 배가 고플 터였다.
“죄송해요.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네요.”
“괜찮아. 내가 준비해 두었다.”
“네에?”
나는 평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성 장난 아니잖아?’
“이쪽이다.”
에사디엔이 데려간 광장의 노천카페는 소박하지만 엄청난 맛집이었다. 살살 녹는 고기 맛에 반해서 입 짧기로 유명한 내가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었으니 말 다 했다.
“채소를 다 빼다니. 그건 그냥 빵 사이에 치즈와 고기를 끼운 것 아닌가?”
“이걸 바로 고기 치즈 샌드위치라고 하는 거죠.”
“…….”
내 어마어마한 편식을 접한 에사디엔이 ‘저걸 어떻게 고치지.’ 하는 눈으로 본 것 같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뉴엘.”
내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사라졌던 에사디엔의 손에 분홍색 솜뭉치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여기서 솜사탕을 팔아요?”
“솜사탕이 뭐지? 이건 마법 물품이다.”
앗. 하긴 이 세계에는 솜사탕이 없지, 참.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에사디엔이 말을 이었다.
“그대를 닮아서 샀다.”
“예?”
꽃도, 귀여운 동물도 아니고 소, 솜뭉치?
‘핑크색이라서?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음만 새어 나왔다.
에사디엔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한참 머뭇거린 끝에 작은 사과를 꺼냈다.
“아까는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