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또 ‘네?’ 하고 반문하기 직전, 싸늘하게 말하던 에사디엔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건 에사… 아니 그쪽, 아니 이게 아니라!”
나는 에사디엔을 지칭할 말을 끝내 찾지 못하고 급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아까 일은 제 잘못이었죠. 죄송했어요.”
그나저나 에사디엔은 그것 때문에 이 솜뭉치까지 사 온 걸까?
며칠 전과 확연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비원에 들어가기 전날에도 내게 경고를 했으면서.
‘나는 그대가 내게 보이는 것만큼의 감정을 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어제도 그렇고, 에사디엔의 행동이 자꾸만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조금 걷겠나.”
봐. 이런 상냥한(?) 권유를 어떻게 거절하느냐고. 게다가 지금껏 만나며 에사디엔이 처음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좋아요!”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냅다 에사디엔과 팔짱을 꼈다.
우리 둘 다 평소와는 완전히 딴판인 겉모습이었지만 에사디엔 특유의 시원한 향만큼은 익숙하게 코를 간질였다.
“그래서 이건 무슨 기능을 하는데요?”
“잠자리에서 껴안으면 커진다더군.”
…넹?
멀뚱히 바라보자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에사디엔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그, 내 설명이 짧았군. 주인과 비슷하게 커져서 몸을 편안히 기댈 수 있다고 들었다.”
“아하. 바디 필로우(body pillow)로군요.”
신기한 게 다 있네.
보들보들한 데다 몽글거리기까지 해서 딱 침대템이기는 했다. 만져보니 진짜 솜은 아니라 보풀이 뭉쳐 날릴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그, 그런 적 없다.”
“흐응.”
지금 막 시선을 피하시는 분은 어느 나라의 어떤 황자님이실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에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밤마다 황… 아니, 당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안고 잘게요.”
“미뉴엘…….”
“그러라고 주신 거 아니에요?”
“그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오. 드디어 눈치채다니.
‘황성 밖에서 만나는 게 정답이었나 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에사디엔의 여러 가지 반응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자꾸 그럴 거라면 돌려다오.”
“싫어요! 줬다가 빼앗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메롱, 살짝 혀를 내밀며 킥킥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는 에사디엔에게서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으아아악! 도망쳐요!”
“꺄악!”
멀리서 희미한 비명이 울렸다. 어렴풋이 들리는데도 그 안에 담긴 당혹스러움은 여실히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미뉴엘, 일단…….”
소란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졌다. 에사디엔이 나를 단단히 잡아끄는 그 짧은 사이에 광장 바깥에서부터 안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눈 깜빡하는 동안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도망쳐! 소들이 미쳤어!”
“소, 소라고?”
스페인 소 축제도 아니고. 갑자기? 여기서?
놀라서 굳은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냉철했다.
몇 초 만에 더 가까워져 지축을 울리는 소음과 흙먼지를 확인하자마자 곁에 있던 건물 사이 샛길로 나를 끌어당겼다.
“일단 이리로.”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우두두두!
노린 듯한 타이밍으로 황소 떼가 지나갔다.
“와…….”
에사디엔이 아니었으면 여기서 인생 종 칠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네요.”
“그대도 날 구하지 않았나.”
“미처 몰랐는데, 보은을 길게 하시는 편이었군요?”
나는 에사디엔과 마주 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잔잔한 눈을 보니 놀랐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산책도 이쯤이면 마무리된 것 같고, 이만 돌아……!”
긴장이 풀린 몸을 등 뒤쪽 벽에 기댔을 때였다. 분명 단단하게 버티고 있어야 할 벽이 회전문처럼 빙글 도는 게 느껴졌다.
“흐읍!”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던가? 나는 딱 그 상태로 떨어져 내렸다. 날개도, 낙하산도 없이 맨몸으로 중력에 내맡겨진 감각이 끔찍했다.
‘함정이구나.’
이 와중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갑자기 소들이 왜 난동을 부리겠는가. 설령 단체로 벌에 쏘였다고 해도 굳이 광장으로 들이칠 이유가 있을까?
‘어리석었어.’
비원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사주한 쪽에서도 몸을 사릴 줄 알았다. 또 갑자기 결정한 외유라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전부 내 어리석음을 변명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에사디엔을 위험에 빠뜨렸다.
“미뉴엘!”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함께 뛰어내려 나를 껴안아 준 이 사람을.
* * *
“…뉴엘.”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미뉴엘.”
한 번 더.
“눈을 떠라.”
그리고 또다시.
나는 부스스 눈을 떠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어두운 붉은색 바닥 위. 주변에 보이는 가구들은 모두 미색 천으로 씌워져 있었다.
“여기는…….”
“정신 차려라, 미뉴엘.”
“에사디엔……?”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 차려라, 미뉴엘!’
비원에서 호수에 빠졌던 날 구한 건 황제의 기사들이 아니었구나. 에사디엔이었구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몇 번이나 나를 구해 놓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잖아.’
그런데 왜 목소리만 들리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미뉴엘.”
“에사……!”
합. 반갑게 고개를 돌리던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드디어 에사디엔을 발견한 건 내가 있는 곳과 이어진 건넛방에서였다.
에사디엔은 팔이 뒤로 묶여 천장에 매달린 채로 진자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즉, 시계추처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열린 문 사이로 나를 불렀다는 뜻이다.
“괜찮은가?”
“무슨 소리예요, 지금……!”
나는 거의 놀라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예요?”
에사디엔은 상의가 모두 벗겨진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저 상처가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잘 알았다.
“채, 채찍질을…….”
예전에 라망드를 처음 만나 데려왔을 때 그 애의 등에도 저런 흔적이 빼곡했으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감히 누가!”
에사디엔의 근육을 보고 싶다고는 했지만 결코 이런 모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동시에 목구멍으로 열기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치고 올라왔다.
“윽…….”
오랜만에 치미는 구역질이 낯설었지만 기를 쓰고 삼켰다. 감정을 내리눌렀다.
이런 데서 피 토하고 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절대로.
“나는 괜찮다.”
“거짓말, 후우, 하지 마세요.”
벌떡 일어나 에사디엔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러나 나도 손이 뒤로 묶인 탓에 좀처럼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뒤집힌 거북이처럼.
“이익!”
기를 쓰고 몇 번이나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질 몸뚱어리 같으니라고.’
안쓰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거기 가만히 있어라. 기회만 잡으면 탈출할…….”
“싫어요!”
사람은… 걸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포복 전진’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비록 내가 택한 것은 데굴데굴 구르기였지만.
“에취!”
온통 천으로 덮인 가구들을 보고 이미 짐작했지만 한동안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던 집이 분명했다.
한 바퀴 구를 때마다 머리며 얼굴을 가리지 않고 온몸에 먼지가 더덕더덕 들러붙었다.
“흐에취잉!”
“거기 있으라고 했잖은가…….”
내 꼴이 말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에사디엔과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만 했다.
그 골목에서, 나는 뒤로 떨어진다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항상 지니고 다니는 호출기를 눌렀다.
갑자기 무슨 호출기냐고? 가문의 기사들을 호출하는 마도구다.
‘변복 데이트라는데 우리 가족들이 잔소리도 한마디 없이 순순히 보내줬어. 그게 더 수상해.’
황실이야 어떨는지 몰라도 우리 부모님이나 언니들은 분명 내게 몰래 호위할 기사들을 붙였을 거다.
언제 기사들이 진입할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우리가 함께 있는 편이 구조가 쉬울 것은 당연했다.
“엣! 취!”
거창한 재채기 소리와 함께 나는 마침내 에사디엔의 앞까지 도착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그 밧줄, 힘으로는 못 끊는 건가요?”
옛날에 봤던 영화에서는 이렇게 붙잡히면 밧줄을 끊거나, 아니면 고문하러 다가오는 사람의 목을 역으로 조르던데.
하지만 내 질문을 들은 에사디엔은 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되나 보네.’
에사디엔도 꽤 실력이 좋은 기사라고 들었는데 안 되는 걸 보면 역시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무슨 수를 써서든 일어서는 것이었다.
“흐아앗!”
이번에는 그래도 몇 번 시도한 끝에 일어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지쳤지만 나는 이를 악물며 에사디엔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옷깃 사이로 목걸이가 스르르 흘러나와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미뉴엘?”
“아플 텐데 미안하지만 이 목걸이를 끊어주세요.”
목걸이 줄 끝에서 달랑거리는 건 검 모양의 펜던트였다. 카르이넨 가문의 문장과 똑같이 생긴 검.
사실 일반 펜던트는 아니고 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크기가 변하는 마도구다.
“후.”
에사디엔은 짧게 숨을 몰아쉰 후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정확히 펜던트를 물었다.
‘대단하네…….’
인상조차 쓰지 않는 그와 버둥거리다 굴러서 여기까지 온 내 모습을 비교하니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아비판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조심조심 무릎을 꿇고 다시 내려간 에사디엔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이걸 손에 쥐여줄게요. 단검을 상상하면 커질 테니까 그걸로 밧줄을 끊도록 해요.”
물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손이 베일 것이다. 에사디엔을 여기서 더 다치게 해야 한다니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손 베이는 게 아파서 목이 따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잡았다가는 베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아갈 수도 있었다.
“…….”
에사디엔은 아무 말 없었지만 내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숨결이 떨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게 못마땅해서인지, 아니면 먼지투성이인 내 모습이 웃겨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제와 똑같이 숨결이 섞이고 있었지만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밖에는.
‘떨리면 괜히 이상한 데 찌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에사디엔의 눈을 보지 않은 채 최대한 빨리 펜던트 끝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에사디엔은 몇십 번 연습한 사람처럼 그와 내 손목을 묶은 밧줄을 끊었고, 마지막으로 완전히 몸을 접어 발목의 줄까지도 풀어냈다.
‘무슨 폴더블 핸드폰인 줄 알았네.’
감탄하는 것도 잠시, 나는 서둘러 귀걸이를 풀었다. 달랑거리는 크리스털을 돌려 빼자 손톱보다도 작았던 것이 퐁! 소리와 함께 손에 꽉 찰 정도로 커졌다.
“그건 뭐지?”
“치유 포션이에요.”
라망드가 성수에다가 자신의 신성력을 꽉꽉 눌러 담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