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신기한 것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군.”
“저희 작은 언니하고 라망드가 워낙 걱정 인형이라…….”
하지만 덕분에 에사디엔을 치료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리 와보세요.”
나는 서둘러 포션을 손수건에 적셔 에사디엔의 상처에 꼼꼼히 발랐다.
“윽.”
“많이 아파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을 보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괴로웠다.
포션이 마르며 아물어가는 상처 위를 호오 불자, 에사디엔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냥 빨리 해줬으면 좋겠군.”
“아, 네!”
아무래도 그냥 마르는 것보다 더 따가웠나 보다.
저절로 울상이 지어지려는 찰나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이 왔나 봐요!”
다시 호출기를 급히 연타한 뒤 아까보다 더 빨리 에사디엔을 치료했다.
“발목도 걷어주실래요?”
“그, 여기는 내가 하겠다.”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잖아요. 요조숙녀도 아니고.”
“…….”
에사디엔은 더 막지 않고 몸을 숙여 바지를 걷었다.
문득 빨개진 에사디엔의 귀 끝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정말로 부끄러웠나 보네.’
미안하면서도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간지러워졌지만 에사디엔을 보면 가끔 그랬으므로 크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뉴엘?”
빨개진 건 귀 끝부분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게 의아했는지 시선을 맞춰오는 에사디엔의 눈꼬리도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그게 뭐라고.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미뉴엘.”
“어, 아, 네, 네.”
잔뜩 당황한 나는 삐걱삐걱 고장 난 인형처럼 움직여 에사디엔의 발목이며 손목, 칼에 베인 손바닥까지 모두 치료했다.
‘뭐야? 왜 더 잘생겨 보여?’
갑자기 왜 이러지? 지구를 부술 정도의 미모에 겨우 적응했나 했더니 이제는 아예 대기권을 뚫고 태양이라도 부술 것처럼 빛나 보였다.
“이리 다오.”
포션 병을 가져간 에사디엔은 무의식적으로 손수건을 찾았는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가 혀를 찼다.
“어쩔 수 없군.”
에사디엔은 조금 남은 포션을 덜어 내 손목에 발랐다.
“저는 괜찮… 아야.”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내 손목도 밧줄에 쓸려서 부르트고 피가 맺혀 있었다. 이런 상처를 지금껏 의식하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갑자기 몰려들었다가 포션에 밀려 사라졌다.
이어 에사디엔의 손이 내 뺨을 문질렀다.
“여기도.”
“으…….”
원래 먼지투성이 상처는 씻어내는 게 먼저지만 신성력은 말 그대로 만능이었다. 소독과 치료를 한 번에!
애써 딴생각을 하며 또 한 차례 따끔거림을 참아낸 내가 물었다.
“이, 이제 됐죠?”
“한 군데 더 있다.”
에사디엔은 마지막으로 포션에 적신 손가락을 들어.
“그, 저, 저깁?!”
“쉬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아까 펜던트를 물면서 따끔하다 했더니.’
시간을 길게 늘이기라도 한 듯 에사디엔의 손가락이 포션을 바르는 그 몇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귀에 못이라도 박는 것처럼 쾅쾅쾅쾅 요란하게 뛰었다.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꾹 감는 것과 동시에 벽이랑 똑같아서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 벌컥 열렸다.
“……!”
“미뉴엘, 이쪽으로 와라.”
에사디엔은 당장 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난입한 사람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단검이었던 펜던트는 어느새 장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놈들인가? 우리를 가둔 게?’
들어온 사람은 세 명이었다. 모두 검은색의 긴 망토를 두른 채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모습.
“분위기 좋은데?”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아예 밋밋한 가면까지 썼다. 방금 빈정거리던 그 사람이었다.
“연애질을 하고 계셨군? 우리는 밖에서 개고생하는 사이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누가 들으면 그쪽이 아니라 우리가 납치범인 줄 알겠네!’
하지만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싸늘하게 헛소리를 무시했다.
“정체를 밝혀라.”
“보면 모르시나?”
“누가 의뢰했지?”
“의뢰인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
비원에서 나타났던 암살자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대사였다.
‘같은… 집단 소속인 건가?’
최대한 뭐 하나라도 기억해 두려는 걸 어찌 알았는지 가면남의 얄미운 목소리가 내게 향했다.
“거기 분홍 머리 아가씨, 눈 굴리지 마. 어차피 아가씨하고 그 머저리는 여기서 못 빠져나갈 테니까.”
“…….”
“한날한시에 약혼자와 함께 비명횡사하다니. 참 낭만적이지? 고맙게 생각하라고.”
말 몇 마디로 이렇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자연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곱지 못했다.
“착각하지 마. 죽음이 과연 끝일까?”
“뭐라고?”
“우리를 죽인다고 너희들의 정체를 숨길 수 있을까? 착각하지 마. 카르이넨의 칼끝은 이미 겨눠졌으니까.”
“…….”
나름대로 잔뜩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깔았는데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안 통했나?’
그래서 다른 세력도 끌어들였다.
“…플렌드나의 손길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 수는 안 쓰는 게 나을 뻔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가면남이 폭소와 함께 빈정거린 것이다.
“이봐요, 골 때리는 아가씨. 애인 뒤에 숨어서 조잘거리는 게 무서워서 다리가 다 떨리네요?”
‘우씨.’
나라고 앞으로 나서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에사디엔이 나를 붙든 힘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카르이넨의 칼도 눈이 있어야 겨눠지겠지.”
가면남의 발이 바닥을 툭툭 찼다.
“이 밑에는 화약이 묻혀 있어.”
마치 벚나무 아래에 시체가 있다고 지껄이는 듯한 투였다.
“아가씨도, 아가씨 가문의 기사들도 이 자리에서 증발할 거라는 뜻이야.”
“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차라리 나만 죽는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조금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고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나온 에사디엔은? 호출 신호에 응했을 뿐인 기사들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사디엔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저런 소리는 귀담아듣지 마라.”
“하지만…….”
“미뉴엘, 그대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어느새 바깥의 소란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이쪽에 출입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우리 기사들이야!’
이제 됐다!
나는 안도감과 함께 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그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쿠웅!
바깥에서 기사들이 문에 부딪치는 소리를 신호탄 삼아 에사디엔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가면남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는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또 다치면 안 되는데…….’
내가 가진 포션은 한 병뿐이었고 그나마도 다 써버렸다.
안절부절못한 채 지켜보던 내 눈에 내내 가면남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자들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둘 다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한 명은 품에서 두루마리 같은 것을 꺼내는 반면 한 명은 손으로 이상한 모양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두루마리……. 마법 스크롤인가.’
“그렇다면 설마.”
에사디엔이 덤벼들 거라는 것까지 예상한 건가?
‘가면남이 에사디엔을 막는 동안에 둘은 불을 지르고?’
불. 기억에 깊게 새겨진 매캐한 연기 냄새를 떠올린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사디엔은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을 무시하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아.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할 주제에.’
머릿속 한구석의 차가운 이성도 내게 속삭였다.
‘그냥 에사디엔이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기나 해.’
알고 있다. 애초에 불꽃이 튀길 정도로 격렬한 저 칼부림 사이를 지나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념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뜨겁고, 무섭고, 괴로운지 아니까.
공포는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욱 다른 사람들이 그 괴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사랑받는 공녀로 편안하게 살아온 나와 달리 기사가 되려고 평생 노력했을 문밖의 사람들이. 그리고 에사디엔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건 당연하잖아.”
중얼거리며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가면남의 검이 에사디엔의 어깨를 노린다. 그 뒤에서 주문을 외던 자의 기괴하게 뒤틀린 손 위로는 불씨가 일고 있었다.
점점 커지는 불씨를 보며 나는 몸을 날렸다.
‘플렌드나 님, 아니 누구라도 제게 힘을 주세요.’
아드레날린이 엄청나게 분비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심지어 칼의 궤적이며 어느새 수박만 하게 커진 불덩어리가 에사디엔의 등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도.
“옷도 안 입은 사람한테 치사하게 무슨 짓이야……!”
나는 솜뭉치를 키워 가면남의 시야를 방해하고 가까스로 불덩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지만.
‘이게 되네?’
에사디엔이 경악해서 내게 돌아서는 것이 느껴졌다.
“미뉴……!”
동시에 시간은 원래 속도를 되찾았고 불덩어리는 이변 없이 나를 덮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타 죽는구나.’
달아오른 손잡이를 잡는 건 우스울 정도로 큰 고통이 나를 덮쳤다.
“…….”
…덮치는 게 당연한데, 말이지.
‘어라?’
안 뜨겁다……?
분명 고통스러워야 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도통 잠잠하기만 해서 눈을 떠봤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몸을 내려다봐도 그을린 자국 한 점 없었다.
꺼억―
심지어 어디선가 트림 소리가 울렸다.
“꿈인가?”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중얼거리다 나 못지않게 경악한 암살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면 그쪽 마법이 비정상?”
“…미뉴엘.”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헛소리를 지껄였다.
“들었어요, 지금? 나만 들었나? 누가 트림했느우웨엑.”
‘어어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장 눈앞이 시뻘게지고 있는데도 믿기가 힘들었다. 왜 내가 지금 갑자기 피를 토하고 있는 건지.
“미뉴엘!”
뒤늦게 피 냄새가 코를 후려쳤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꿇으면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열이 치받는다거나 속이 울렁거리는 등의 전조 증상조차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갑자기’였다.
“욱, 커흡.”
계속해서 피를 토하는 나를 감싸듯 돌아선 에사디엔이 가면남에게 살벌하게 칼을 휘둘렀다.
“무슨 저주를 걸었지?”
“넌 눈이 없냐? 저 아가씨가 흡수했잖아, 불을!”
지지 않고 검을 휘두르면서도 가면남은 스크롤을 든 자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그가 또다시 마법을 쓰도록 두지 않았다.
푸욱!
검이 스크롤을 관통해 피륙마저 뚫리는 소리가 짧게 울리고, 이미 피 냄새로 가득한 실내에 비릿한 냄새가 한 겹 더 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