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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1)화 (11/130)

11화

“실토해라. 나를 노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검을 회수한 에사디엔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얼굴로 가면남을 노려보고 있었다. 멋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다음에는 너’라는 뜻이 명백했다.

“조금만 더!”

바깥의 기사들도 거의 문을 뜯어내기 직전인 듯했다. 벽이 들썩이고 있었다.

“하아, 귀찮게.”

가면남은 꾸며낸 듯한 한숨과 함께 남은 동료 곁으로 휙 움직였다.

“에사디엔, 너는 역시 짜증 나는 자식이야.”

“뭐라……?”

“…라고, 의뢰인께서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

마지막을 고하는 듯한 뉘앙스에 에사디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가면남이 품에서 꺼낸 스크롤을 찢는 것이 먼저였다.

“읏!”

엄습하는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중앙이 뚫린 스크롤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성한 데가 남지 않은 손수건으로 대충 입가를 수습한 나는 에사디엔에게 비틀비틀 다가갔다.

“에사디엔, 또 다쳐서 어떻게 해요……. 기사들한테 포션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그대는.”

“…….”

딱딱한 목소리에 가슴이 시렸다.

‘그렇게 물어도 불꽃이 사라진 이유는 모르는데…….’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때마침 문을 부수며 들어온 기사들이 고마울 정도로.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황자님께서 지켜주셔서 괜찮아. 와줘서 고마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맨 앞으로 나선 기사가 물었다. 익히 아는 얼굴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기사의 눈은 그에 아랑곳없이 천장에 매달린 밧줄이며 바닥의 피 웅덩이를 지나쳐 분명 엉망일 내 얼굴에까지 닿았다.

머릿속에서 삼중창이 울려 퍼졌다.

망했어요.

망했어요.

망했어요!

‘엄마… 왜 부관을 저한테 붙이시냐고요…….’

이로써 기사들의 보고를 은폐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아직 축소할 수는 있다.

‘거꾸로 매달린 건 에사디엔이었고 피는 그냥, 그냥 잡아떼야지.’

그렇게 다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괘, 괜찮고말…….”

“공녀가 각혈했다. 포션이 있으면 주겠나.”

…끄덕였지만 에사디엔이 깨부쉈다!

‘아아아아아.’

나는 끝내 양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돌아가자마자 요양 확정이었다.

“라망드 사제가 만든 포션입니다.”

에사디엔은 포션을 받자마자 단호한 손놀림으로 뚜껑을 따 내게 내밀었다.

“전부 마시도록.”

“하, 하지만 에사디엔도 상처가……. 저는 치료하고 남은 거면 충분해요.”

“나는 돌아가서 치료해도 상관없다.”

‘아니, 그 예쁜 몸을 왜 이렇게 소홀히 해?’

울컥 화가 돋은 나는 다다다 쏘아붙였다.

“황자님은 상관없을지 몰라도 저는 있어요. 혹시 채찍에 독이라도 발려 있었으면 어떻게 해요?”

“독이었으면 이렇게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도는 독일지도 모르잖아요!”

점점 높아지려는 언성을 끊어준 이는 엄마의 부관이었다.

“한 병 더 있습니다, 아가씨.”

“…아.”

기사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그만 깜빡하고 있었다. 급격히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과 함께 포션 병을 에사디엔에게 밀어주며 물었다.

“고마워, 경……. 그런데 혹시 경의 겉옷을 벗어줄 수 있을까?”

이제 슬슬 긴장이 풀리니까 에사디엔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은 좋았지만 황성까지 그를 벗겨서 보내기는 아무래도 곤란했다.

“예? 아아.”

대뜸 옷을 내놓으라는 말에 잠깐 놀랐던 부관도 에사디엔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꺼이 옷을 벗어주었다.

“깨끗하지 못해 송구합니다만.”

“괜찮다. 조만간 보답하겠다.”

에사디엔도 기사라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치료하는 것을 보며 나도 포션을 조금씩 삼켰다.

청량하고 시원한 물이 넘어가자 쓰라린지도 몰랐던 목구멍이며 위까지 따끔따끔했다. 마치 엄청나게 강한 탄산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으으.”

“괜찮은가, 미뉴엘.”

“아, 네.”

“그렇다면…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나.”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헤어지면 꼼짝없이 며칠은 못 볼 게 뻔했다. 그럴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좋아요.”

“하지만 아가씨, 어서 귀택하셔서 사제에게 치료받으시는 편이…….”

부관이 막았지만 에사디엔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공녀가 포션을 다 마실 동안만 시간을 내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함구하도록. 나도 폐하께 고하지 않을 것이다.”

황자의 이름으로 명령한 에사디엔은 등을 돌렸다.

‘과연 우리 기사들이 저 명령을 들을까……?’

걱정이었지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에사디엔이 이끄는 대로 걷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 좁은 보폭이 답답했는지 에사디엔은 갑자기 나를 확 안아 들었다.

“으앗?!”

깜짝 놀라 포션 병을 움켜쥔 채 굳은 내게 늦은 설명이 툭 떨어졌다.

“지붕 위로 올라갈 거다.”

하지만 그러고도 꽤 오래 계단이며 복도가 이어졌다.

‘정말 내가 느려서 그랬나 보네.’

설령 그렇더라도 에사디엔이 먼저 안아준 건 처음이라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라니!

‘이대로 자고 싶다.’

실제로 살짝 졸 뻔했지만 다행히 그러기 전에 바깥 공기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우와…….”

뻥 뚫린 시야를 채운 풍경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느새 해는 저 너머로 기울고 있었고 하늘에는 주황과 파랑, 보랏빛이 은은하게 뒤엉켰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도시의 불빛이 총총히 떨어진 별처럼 아른거렸다.

‘어?’

우리가 함정에 빠진 건 도시 한복판, 광장에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까지 일부러 데려왔다고?

‘왜 굳이 그런 짓을.’

에사디엔이 경사진 지붕에서 평평한 곳을 찾아내 나를 내려놓았다.

“여기는 그대가 앉기에 적당할 것이다.”

“여, 여기에요?”

물론 위험한 곳은 아니겠지만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에사디엔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안심해라. 이 앞에 살짝 솟은 창이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에사디엔은 내 손을 떨쳐내지 않고 옆에 앉아주었다.

야경을 바라보는 에사디엔의 옆모습은 낯선 장소에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갇혔던 곳에서 여기에 올 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헤맨 적 없었다.

에사디엔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이 저택은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다.”

“그랬…군요.”

이 저택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낮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황족은 갈 것 같지 않은 카페를 알고 있었던 것부터, 광장의 지리가 익숙해 보였던 것까지.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카듀렌에서 살았을 줄이야.

“어머니는… 아니, 아니다. 이곳을 지키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뭔가 말하려던 에사디엔은 감사 인사만 건네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미소 지으려고 했지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딱딱하게 입꼬리를 들썩이는 것으로 그쳤다.

화약이 폭발했다면 이 저택도 멀쩡하지 않았을 것이다.

‘암살자들이 굳이 여기까지 에사디엔을 데려왔다는 건 함께 묻어버리겠다는 뜻이었나?’

개인적인 증오가 물씬 느껴졌다.

“저기, 에사디엔.”

그가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어 신비한 빛깔의 금발이 쏟아지듯 흔들렸다.

“혹시 의뢰인이 누구인지 아는 건가요?”

에사디엔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명백한 회피였다.

“…조금 전에는 어떻게 한 거지?”

“뭐가요?”

“불을 흡수한 것.”

“그, 그냥 사라진 줄 알았어요. 뜨겁지도 않았고, 그래서…….”

에사디엔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잔잔하지만 속내를 꿰뚫을 것 같은 시선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못 봤어요. 그냥 당신에게 그게 날아가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음.”

목소리도 그에 따라 작아져서 마지막에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불이 제일 무섭거든요.”

“그런데 왜 뛰어든 거지? 그대는 너무 무모하다.”

용케도 그 소리를 들어놓고는 한다는 게 무모하다는 잔소리였다.

이러니 내 입이 댓 발 튀어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당신도 절 몇 번이나 감쌌잖아요.”

“황자라는 지위 이전에 나는 기사다. 그대를 지키는 게 당연하다.”

“저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미뉴엘.”

작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이름이 마치 이제 그만하라는 뜻 같았다. 코끝이 찡해져서 나는 그만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도 알아요. 지난번에 하셨던 말씀 기억하고 있…….”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네?”

“나는 부족하게나마 검을 다룰 수 있다. 몸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미뉴엘, 그대는 아니잖은가.”

고개를 들었다. 에사디엔은 여전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우연이든 요행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든……. 원인이 완전히 밝혀지기 전에는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조금 움찔했다. 짚이는 것이 있기는 했으니까.

‘내 울화가 아무래도 수상한데.’

다만 드러내서 말하지 못하는 건, ‘수상쩍다’는 생각뿐이고 정확히 울화 때문이라는 근거가 없어서였다.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게다가 나는 평화롭고 편하게만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이다. 숨기자는 제안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망설이는 건 에사디엔 때문이었다.

“의뢰자를 찾아야죠. 그냥 두면 계속해서 시도할 텐데,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해요?”

“괜찮을 거다.”

“에사디엔, 그건 장담할 수 없어요. 아흔아홉 번을 넘겨도 백 번째에 목숨을 빼앗기면 끝나는 거잖아요. 절 혼자 두고 떠날 생각이세요?”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빛 덕분에 에사디엔의 눈이 커다래진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시 그런가.”

잠시 후 흘러나온 말은 묵직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톡 쏘아붙였다.

“혹여나 그것 때문에 파혼하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정곡을 찔렸는지 맞잡은 에사디엔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나는 짐짓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이에요. 아까는 저를 지키는 게 당연하다면서요?”

“무, 물론이다.”

“그런데 파혼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요?”

“그렇지만 미뉴엘…….”

“됐어요. 이만 갈래요.”

나는 에사디엔의 손을 휙 털어내듯 놓은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가 지는 속도는 빠르기만 해서 이미 발밑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당당한 척 발을 옮겨 디뎠다.

‘붙잡겠지. 붙잡을 거야. 붙잡아라!’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 걸음, 두 걸음을 옮길 때까지 에사디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세 걸음째. 드디어 내 발이 쭉 미끄러졌다.

“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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