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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2)화 (12/130)

12화

‘객기 부리다 황천길 가는구나!’

나는 왜 이렇게 목숨 걸 일이 많은 건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미처 ‘꺄악’ 중에 ‘악’이 나오기도 전에 에사디엔은 나를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이러니 무모하다고 하는 것이다.”

붙잡아 놓고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지 꽉 껴안은 품 안에서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확실했다. 비원 사건 이후로 에사디엔의 단단한 벽이 낮아졌다. 예전이었다면 아까 내가 그의 말을 기억한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했겠지.

‘다행이군.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나.’

하지만 지금의 에사디엔은 그러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며 설명했고 내 기분이 상한 듯하자 당황했다.

‘가랑비 작전, 너무 잘 듣는 거 아냐?’

이대로 에사디엔의 마음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젖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반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에사디엔은 다시 설득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러다 그대마저 노릴지도 모른다. 형님은 포기하지 않을…….”

“형님?”

에사디엔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중요한 단어는 나온 뒤였다. 잠시나마 즐거웠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이황자님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

“알고 있었던 거죠, 누가 의뢰했는지?”

“……미뉴엘.”

답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에사디엔의 가슴팍을 쥐고 흔들었지만 그는 휘청거리기는커녕 담담히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형님은 지금 치트룸의 대사로 가 계신다.”

치트룸. 우리 프레세리아 제국과 대사막을 사이에 둔 왕국의 이름이었다.

“그게 왜요? 다른 나라에 있더라도 의뢰 정도는 얼마든지 넣을…….”

거기까지 말한 나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리고 그만 움찔 몸을 떨었다. 에사디엔은 이황자가 직접 일을 실행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에사디엔, 너는 역시 짜증 나는 자식이야.’

아무리 막 나가는 암살자라도 말투가 이상하기는 했다. 의뢰인의 말을 전달하는 척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냥 시늉일 수 있었다.

“이황자님이 귀국했다는 증거를 잡을 수 없어서 그래요?”

에사디엔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둠이 더 내려앉은 까닭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답답해진 나는 발돋움하며 에사디엔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짝 붙였다.

“미, 미뉴엘.”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저까지 없애려고 했던 걸 잊은 건 아니죠? 저도 당사자라고요.”

“그건…….”

“비밀에는 비밀. 어때요?”

또 잠시 목소리 대신 바람과 숨소리만 흘렀다.

블랙홀처럼 시선을 잡아당기는 요망한 미모가 어둠 뒤로 숨어들자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더 알고 싶었다. 에사디엔이 숨기는 게 뭔지. 담담하고 차분한 겉모습 뒤에 가려진 진짜 모습이 어떤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마침내 대답이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그래. 나는 나를 노리는 사람이 형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하지만 이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니 부디 비밀을 지켜다오.”

“어째서 숨기려는 거예요? 폐하께서 믿지 않으실까 봐 그러는 거라면…….”

“아니다.”

에사디엔은 잠시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는 당신의 판단을 미루고 조사부터 하실 분이다. 나는 다만 그분에게서 가족을 빼앗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분명 형님을 내치실 테니까.”

“그런…….”

“미뉴엘, 나는… 나를 받아주신 폐하께 보은해야만 한다.”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나였다.

‘그게 보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본 황제는 에사디엔을 정말 아들처럼 아꼈다. 그런 황제가 훗날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하지만 황제를 생각하는 에사디엔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어서 나도 무턱대고 당장 일러바치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일단은 이황자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

그래도 황성에서 함께 자랐을 텐데 단순히 사이가 나쁜 것을 넘어 죽이려고 할 정도라니.

“알겠어요. 저도 비밀로 할게요.”

“이해해 주어 고맙군. 그러면 돌아가서 내게 파혼장을…….”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요!”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보통 비밀을 나누면 동지애 같은 게 생기는 거 아니냐고!

“아까 말했듯 형님이 아예 그대를 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켜줘야죠. 전 좋아하는 사람 두고 도망치는 짓 안 해요.”

그때, 아래쪽에서 우리를 찾는 목소리가 울렸다.

‘기왕 어두워진 거 여기서 하루 묵고 싶었는데.’

그랬다면 겸사겸사 에사디엔의 옆에 눕는 걸 노려볼 수 있었을지도…….

아쉬웠지만 기사들까지 묵을 숙소를 찾는 것도 일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뻔뻔하게 에사디엔의 목을 껴안았다.

“안아주세요. 저는 어두워서 잘 내려갈 자신이 없어요.”

부탁하는 주제에 당당하다고 뭐라 할 법도 한데 에사디엔은 군소리 없이 아까처럼 나를 안아 들었다.

만족스러움과 함께 희미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만 이러는 거겠지?’

애초에 에사디엔한테 접근한 사람은 나뿐이긴 하지만.

이 무뚝뚝한 상냥함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안아주시면 안 돼요. 알았죠?”

그래서 대놓고 말해 버렸답니다!

“…부상자를 이송하는 것뿐이다.”

아하? 부상자를? 공주님 안기로?

“네. 아는데 다른 부상자는 그냥 어깨에 짊어지셔야 해요. 포대 자루처럼요.”

“황자에게 누가…….”

나는 에사디엔을 확 째려보며 반복되는 변명을 끊었다.

“그냥 알았다고 하세요.”

“아, 알겠다.”

당황했는지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나는 속으로 탄식을 삼켜야 했다.

‘귀여워 보이면 게임 끝이라던데.’

아무래도 정말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약혼자라서 다행이지 뭐야.

실내로 통하는 가파른 계단을 지나온 후, 나는 에사디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했다.

“파혼 얘기 또 꺼내지 마세요. 저는 책임질 거거든요.”

“그대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아뇨. 그런 책임 말고요.”

“그러면 무슨……?”

무슨 책임이긴.

나는 손가락으로 에사디엔의 탄탄한 가슴을 쿡 찔렀다. 씨익, 사악한 웃음은 덤이었다.

“전 이미 황자님의 벗은 몸을 봤으니까요.”

“……!”

와. 지금 에사디엔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겨두지 못한다는 게 죽어서도 한이 될 것 같다.

* * *

스펙터클했던 첫 외부 데이트에서 귀가한 후. 나는 회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틀 내내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어.”

뚱하니 중얼거려도 들어주는 거라곤 에사디엔이 선물한 꽃밖에 없었다.

라망드를 졸라 신성력을 불어 넣은 꽃은 시간이 지나도 처음 받았던 날처럼 싱싱했다.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나는 보들보들한 꽃잎을 살살 어루만지며 에사디엔을 걱정했다.

아무리 성인이라도 암살 위협은 큰일이다.

지난번에는 내가 앓아누워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도 아닌데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미안하고 보고 싶었다. 신전에서 그랬듯 담이라도 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는 못 하지…….’

당장 방에서 나가기만 해도 사람이 몇이나 따라붙을 텐데.

그래서 선택한 것은 정공법.

마침 부모님께서 함께 차를 마실 시간이었다. 나는 심호흡과 함께 어깨와 허리를 곧게 펴고 두 분을 찾아갔다.

“엄마, 아빠. 궁금한 게 있어요.”

“왔구나, 아가. 기다리고 있었단다.”

미리 기별도 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문을 뻥 차고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두 분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음! 난 역시 부모님 손바닥 안이군!’

만약 내게 반항기가 넘쳤다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덜 귀찮아서 좋지, 뭐.’

즐겨! 누려! 사랑받는 막내딸 포지션!

아무렇지 않게 그런 걸 받아들이는 나를 부모님께서 재미있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분들로서는 ‘막내딸 is 뭔들’이겠지만.

“그래. 우리 아가가 궁금해하는 게 있다고?”

“네. 이황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보통은 정보 길드 같은 걸 찾는 게 정석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이황자를 털어서 나올 먼지가 아니었다. 일단은.

“삼황자님이 아니라? 의외로구나.”

“시숙이 될 분이잖아요. 어쩐지 에사디엔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흐음.”

아버지는 꼰 다리 위에 깍지낀 손을 올리며 물었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맺힌 채였다.

“그게 엊그제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는 거니?”

나도 지지 않고 방긋 웃었다. 어머니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 내내 조용히 차만 마셨다.

“그건 말씀드리지 못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딸의 비밀을 존중하겠다는 듯 넘겼지만, 내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아버지는 이황자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쥘 것이다.

방금 내 대답은 ‘네!!’라고 쩌렁쩌렁 외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미모로만 대공의 남편 자리를 거머쥔 분은 아니시지, 아빠도.’

이제 나는 이황자의 ‘먼지’가 필요해졌을 때 아버지께 물어보기만 하면 됐다.

‘굳이 어렵게 정보 길드를 찾아갈 필요 있나.’

“솔직히 제 생각이 틀렸으면 하지만요. 혹시 엄마하고 아빠는 두 황자님의 관계에 대해 아시나요?”

“네 추측이 맞았다, 아가.”

어머니는 달각 소리도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황자가 삼황자를 싫어하는 건 전부터 유명했다.”

“그가 치트룸의 대사로 간 이유 중에는 그런 불화도 있다고들 한다만 글쎄. 풍문만 들리다 사라졌지.”

‘유명하다지만 큰 사건으로 불거질 정도는 아니었나.’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황족들의 개인 궁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건 아마도… 에사디엔이 함구했기 때문이겠지.

또 가슴이 쿡 쑤셨다.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아직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잖아요. 친구도 없고.”

예전 일들까지 알고 싶었으므로 내 또래 영애보다는 부모님 세대를 통해 확인하는 게 더 나았다.

“그래. 우리 아가가 궁금하다는데 못 해줄 게 뭐가 있겠니.”

“감사해요. 그런데… 저,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이번에는 뭘까, 우리 따님?”

수도로 돌아오고 연애를 시작하니 궁금한 것도 많아졌나 보다. 부모님은 지금 상황을 그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계시는 듯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나는 이 가벼운 분위기를 박살 내야만 했다.

“저도 이제 제 몸이 약한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요.”

두 분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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