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카르이넨 가문이 위세를 떨치는 것은 북부 산맥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때문이다. 제국민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우리는 정령을 지킨다.”
정확히는 불의 정령이 잠들어 있는 정령석을.
봉인지의 위치는 기밀이지만 탐을 내는 자들은 어떤 수를 써서든 알아내고는 했다. 십 년 전에도 그런 식으로 제자리를 벗어난 정령석을 되돌리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나, 아니 ‘미뉴엘’이 정령석을 잡았다. 극한으로 단련한 기사나 마법사, 신의 사도(使徒)도 버티지 못할 힘을 평범한 어린애가 받아냈으니…….
‘진짜 미뉴엘은 그렇게 사라진 거였구나.’
그 자리에는 당연히 기사들과 어머니가 있었지만, 다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미뉴엘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심한 말이지만, 아직도 네가 어떻게 우리 틈을 비집고 들어왔는지 떠올린 사람이 없다.”
아주 잠깐의 접촉이었다고 했다. 마치 뜨거운 냄비를 잡았다가 놓친 것처럼 ‘미뉴엘’은 비명과 함께 곧바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 잠깐의 접촉으로 불의 힘 일부가 몸 안에 들어왔고 손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다.
“정령…이요.”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언제나처럼 울렁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 이게 울화가 아니고 정령 찌꺼기였어?’
보통 이 정도 되면 ‘공녀가 힘을 숨김’으로 장르 변경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어떻게 써먹을 수도 없고 그냥 지병이니, 원.
“너를 신전에 맡긴 건 신성력을 계속 공급받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미친 마법사가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탐구를 위해서라면 공녀가 아니라 공작이라도 납치하려는 마법사들이 많다고 덧붙이셨다.
이 세계는 마법이 생활과 깊숙이 결합한 곳이다. 마법사는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외가 있었다.
마법사가 출입하지 않는 곳. 희미할 정도로 약해진 생명력을 붙들어 북돋을 수 있는 곳. 마지막으로 이 비밀을 지킬 정도로 카르이넨과 사이가 돈독한 곳.
그곳이 플렌드나 신전이었다.
“아가, 네가 왜 이것을 묻는지 안다. 최근 나타난 불의 교단 때문이겠지.”
실은 불덩이를 흡수한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암살자, 가면남이 이황자라는 건 아직 가정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 경우 에사디엔의 말처럼 이황자는 나도 노릴 것이다. 에사디엔의 마음이 내게 넘어오면 넘어올수록 더욱더.
‘특이한 힘(?)을 목격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정령석에 손을 댄 걸 막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런 분께 또 다른 걱정거리를 얹고 싶지 않았다.
“그 집단과 정령이 관계있다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미뉴엘, 혹여…….”
“엄마.”
저는 편하게만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 사이비 종교 싫어해요. 완전.”
비록 내 머리는 복잡했지만 그 말에 부모님이 안심하셔서 다행이었다.
* * *
부모님은 내가 생생한 걸 확인하셔서인지 다시 외출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다. 물론 나는 좋다고 당장 에사디엔에게 날아갔다.
‘에사디엔을 함락시키는 것만 해도 벅찬데 무슨 일이 이렇게 빵빵 터지는 거야.’
그나마 이황자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볼 수라도 있지. 정령은 만날 수도 없고 얘기를 할 수도 없으니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건강해지고 싶은데.’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신전은 평화로웠고 라망드도 항상 곁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겪어보니 위험할 때 다른 사람의 뒤에만 있어야 한다는 게 썩 좋은 기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본디 몸이 그리 허한가?’
에사디엔도…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인지 허약한 걸 싫어하는 것 같았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포션 많이 챙기기, 외출할 때 라망드 대동하기 정도인가.’
그렇게라도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내 볼을 고운 손가락이 쿡 찍었다.
“또, 또 황자님 생각하니?”
“어… 으응?”
아니었지만 생각에 푹 빠져 있던 탓에 나는 다른 변명을 떠올리지도 못한 채 입을 뻐끔거렸다.
“이보세요, 귀염둥이 아가씨. 옆에서 떠드는 이 언니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시죠?”
“미안, 미안!”
쥬엘라 언니는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이다. 내가 방긋방긋 웃으며 싹싹 빌었는데도 양 볼을 잡고 쭉 늘였다. 자비 없는 손길이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자모태써… 자모태쓰니다.”
언니는 내가 잘못했다고 다섯 번이나 말하고서야 손을 놔주었다.
“우우, 아파.”
얼얼한 볼을 문지르며 째려봤지만 언니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준비를 시작해야 해.”
“그, 그러네. 어느새 날짜가 벌써…….”
에사디엔과 얽힌 일이며 정령 문제로 중요한 이벤트를 잊고 있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
“우리 막내, 설마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
“에이! 서, 설마! 하하하!”
예리하긴.
내 앞에서는 티를 잘 안 내지만 언니는 아무도 못 이길 완벽주의자다.
‘그런 성격 덕에 엄마에게 인정받고 가문의 상단을 이끌게 됐지만.’
그만큼 언니 눈에 차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이라니. 괜히 내가 다 감개무량했다.
‘흐음.’
나는 조용히 속으로 날짜를 꼽아보고는 결론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에사디엔의 선물을 마련하려면 아무래도 밤을 새워야겠어.’
에사디엔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데이트에 대한 보답, 받은 그날로 엉망이 되어버린 솜뭉치에 대한 사과를 담아서.
무엇보다도 결혼식 준비가 시작되면 거의 한 달 동안은 만나기 힘들어질 테니 내 선물을 보며 에사디엔이 나를 떠올리기를 바랐다.
“좋아.”
나름대로 밤샘 각오를 다지며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언니한테는 결혼식 준비 때문에 마음을 다지는 것으로 보인 모양이다.
“우리 막내가 이렇게 커서 언니 결혼식을 다 도와주고 말이야.”
언니는 잔뜩 감동한 듯 내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부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볼을 마구 잡아당길 때는 언제고!
“으악. 일부러 내 성인식 때쯤으로 날짜 잡은 건 아니고?”
“얘는.”
루비처럼 아름다운 눈이 해사하게 접혔다.
“최대 효율을 노린 거지.”
저렇게 웃는 걸 보니 예비 형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안 봐도 수목 드라마였다.
“네, 네. 말씀 받자와 올리겠습니다요.”
피식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언니도 짓궂은 웃음을 마주 흘리며 날 마구 간지럽혔다.
“쪼끄만 게 어디서 그런 말투를 배워 온 거야?”
“아, 싫어! 아하하하! 그만해!”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소파 위를 뒹굴던 내 눈에 문득 오늘도 화창한 하늘빛이 들어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지 붉은빛이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 선물은 에사디엔의 눈을 닮은 색으로 해야겠다.’
벌써 그를 또 보고 싶었다.
* * *
“전 이만 가볼게요, 황자님.”
미뉴엘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사디엔의 눈이 그녀의 얼굴과 시계를 번갈아 스쳤다.
“지금?”
“네.”
깔끔한 대답에 곧고 긴 눈썹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데이트’ 이후로 회복한 미뉴엘은 다시 황자궁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공가 상단주인 둘째 공녀로부터 다량의 궤짝과 함께 편지가 날아왔다. 굉장히 긴 미사여구와 형식적인 예의를 걷어내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동생이 원래도 새 모이만큼 먹는데 한 차례 앓은 후 더 심각해졌다. 그 애가 먹을 것은 이쪽에서 댈 테니 협조를 바란다. 물론 거부한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것임.’
마지막에 협박성이 다분한 구절이 있었지만 에사디엔은 진지하게 동의했다.
미뉴엘은 너무 작고 가느다랗다. 그가 그녀의 육탄 공세를 차마 밀어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고로 그때부터 그는 미뉴엘이 오면 꼬박꼬박 뭐라도 꼭 챙겨 먹였다.
“식사요? 먹고 왔는데…….”
“그러면 간식이라 생각하고 먹도록.”
미뉴엘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에사디엔의 권유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런 나날이 일상으로 굳어지나 싶더니. 뭘 먹여보기도 전에 미뉴엘이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오늘은 차만 마시고 갈게요.”
“하지만.”
“괜찮아요. 당분간 식사는 준비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에사디엔은 차마 꺼내지 못한 반문을 삼켰다.
‘어째서.’
평소대로라면 해가 저물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에사디엔이 권유해야만 못 이겨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미뉴엘이 요즘 들어서는 차 한 잔 마시기가 무섭게 곧바로 귀가하는 것을 반복 중이었다.
“미뉴엘.”
“네?”
맑은 눈이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자 에사디엔은 또 한 번 말문이 턱 막혔다.
왜 빨리 돌아가느냐, 누가 기다리기라도 하느냐고 묻는 것도 모양이 이상했다. 애초에 자신이 관여할 문제도 아니었다.
“아니다.”
“으음?”
미뉴엘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에사디엔은 귀가 조금씩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그럼 내일 뵈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그나마 작별 인사는 달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에사디엔은 자신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고심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순간 보랏빛 눈을 가진 사제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으나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하지만 넷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황자님, 오늘도 보고 싶었어요!”
언제나처럼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온 미뉴엘은 찻잔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황자님, 그럼 전 이만.”
“가는 건가?”
“네.”
“…….”
에사디엔의 시선이 미뉴엘의 얼굴 곳곳을 누비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티끌 한 점 없던 그녀의 눈 밑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뭐, 뭐가 묻었나요?”
에사디엔이 그토록 뚫어지게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놀란 미뉴엘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니, 아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부정에 착각이었을 거라 어림짐작한 미뉴엘은 다시 한번 인사하고 떠났다.
창가에 서서 마차에 올라타는 그녀를 지켜보던 에사디엔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데이트’ 이후로 미뉴엘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째서지.”
자신은 꼬박꼬박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에사디엔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그렇게 맞이한 다섯째 날.
미뉴엘의 눈 밑에 어린 그림자는 더 이상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졌다. 마치 에사디엔처럼 밤을 새우기라도 한 듯.
“오, 카르이넨 영애. 오랜만에 봤더니 너구리가 되셨군요.”
마침 미뉴엘과 비슷한 시간에 황자궁을 방문한 테오도르가 장난삼아 농담을 던졌다.
“너, 너구리요? 그렇게 심해요?”
미뉴엘의 보송보송한 뺨이 사과처럼 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