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미뉴엘은 요 앞의 나흘보다 더 빨리 귀가했다.
에사디엔이 선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테오.”
“예, 황자님.”
테오도르는 미뉴엘이 손도 대지 않은 망고를 잘도 처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미뉴엘이 제일 잘 먹는 것이 망고였는데 그걸 그대로 두고 간 것도 이상했다. 테오도르가 놀려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지.”
“예에?”
기겁한 테오도르는 마지막 망고 조각을 삼킨 뒤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갈 준비를 했다.
둘의 실력 자체는 엇비슷했지만 에사디엔은 의외로 집요한 성격이었다. 결착이 날 때까지 놔주지 않아서 그와 붙으면 항상 녹초가 되었다.
“아, 오랜만에 귀성했는데 좀 봐주십시오.”
“시끄럽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바득바득 테오도르를 끌고 대련장으로 향했다.
결국 테오도르도 너구리처럼 양쪽 눈에 멍을 달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섯째 날.
“…….”
시종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치우며 에사디엔의 눈치를 살폈다.
창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은 에사디엔의 심사는 멋들어지게 꼰 그의 긴 다리처럼 배배 꼬여 있었다.
“그… 황자님, 카르이넨 대공저에 사람을 보내볼까요?”
“무엇 때문에.”
“오늘 공녀님께서 오지 않으셔서…….”
“일이 있겠지. 고용한 사람도 아닌데 미뉴엘이 황자궁으로 매일 출근이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평소보다도 더 냉정한 말투였다. 가만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시종은 그만 조용히 물러났다.
에사디엔은 시종이 나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얼굴을 더욱 굳혔다.
‘역시 그렇군.’
사람이 말하는 애정이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되어서 물 밖으로 나온 생선의 목숨만큼이나 빨리 스러지는 법이다.
어머니를 보며 뼈저리게 그 사실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좋아하는 사람 두고 도망치는 짓 안 해요. 저는 책임질 거거든요.’
휩쓸리듯 그런 말을 믿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두 번은 없다.”
에사디엔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 * *
그러나 다음 날, 에사디엔은 그답지 않게 느지막이 일어나 멍하니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결국…….’
미뉴엘 생각을 멈추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인지 뭔지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아서 머리도 넘기지 않고 옷도 달랑 셔츠 한 장만 입은 채였다.
“황자님, 황태자 전하께서 오찬에 초대를…….”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겠다고 말씀드려라.”
만사가 귀찮아 누님의 초대도 거절했다.
선잠을 잔 탓에 머리마저 쿡쿡 쑤셨다.
멀거니 천장에 달린 장식을 눈으로 덧그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다각다각,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의욕 없던 모습은 거짓이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난 에사디엔이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갔다.
“미뉴엘?”
바깥에 보이는 것은 정말로 카르이넨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였다.
“황자님!”
황실에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뛰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 때문에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종종거리는 몸짓이 급한 마음을 그대로 대변했다.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
“뭔가 커다란 것을 가져오셨습니다.”
에사디엔이 눈을 끔벅였다. 어쩐지 그보다 시종들이 더 신난 것 같았다. 게다가 ‘뭔가 커다란 것’이라니.
“황자님, 보고 싶었어요!”
의문은 곧 풀렸다.
여느 때와 같이 인사하는 미뉴엘의 뒤로 커다란 원통 같은 것을 짊어진 시종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저게 뭘까.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 미뉴엘에게 신호를 받은 시종이 포장을 풀었다.
“짜잔!”
와아, 주변에서 탄성이 흘렀다.
“태피스트리로군요!”
“굉장한 장인의 솜씨 같습니다.”
시종들이 감탄하는 사이 에사디엔이 멍하니 그들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어제는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도 잊은 채였다.
“태피…스트리……?”
“황자님을 위해 제가 직접! 만들었답니다!”
더없이 뿌듯한 얼굴로 미뉴엘이 말했다. 쿡 찌르면 ‘에헴!’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제야 에사디엔의 시선이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훑었다. 색색의 실이 촘촘히 모여 큰 그림을 이루었다. 그건 바다를 바라보며 선 에사디엔, 그의 모습이었다.
“이것을… 그대가 직접…….”
직조기 앞에 온종일 앉아 있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허리가 아팠을 텐데.’
몸도 약하면서.
하지만 에사디엔의 속마음을 모르는 미뉴엘은 씩씩하게도 말했다.
“제 유일한 특기예요! 황자님께서 솜뭉치를 선물해 주셔서 저도 보답하고 싶었어요.”
태피스트리 곳곳을 누비던 에사디엔의 바닷빛 눈이 방실방실 뿌듯하게 웃는 미뉴엘에게로 향했다.
아무 말 없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미뉴엘의 웃음이 조금 머쓱해졌다.
“그… 솜뭉치는 터져버렸지만! 제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했지만 에사디엔은 좀처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기분을 대체.’
뭐라 말해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옆에서 함께 감탄하던 시종들이 태피스트리를 잽싸게 말며 물었다.
“황자님, 이건 침실 벽에 거는 것이 좋겠지요?”
이것을 받아도 될지, 그것조차 모르겠는데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걸려고 하다니…….
하지만 미뉴엘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에사디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그렇게 해라.”
그리고 허락이 떨어진 순간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으윽…….”
미뉴엘이 가슴께를 누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너무 귀엽잖아!’
에사디엔의 반응은 누가 봐도 선물을 처음 받아본 사람 같았다. 감동해서 일렁이는 그 눈이라니.
‘으으, 안아주고 싶어.’
한편 에사디엔의 심장은 덜컥 떨어졌다. 역시 너무 무리한 탓에 어디가 아픈 건가 싶었다.
“미뉴엘, 지금 당장 의사를, 아니 사제를…….”
그때였다. 결국은 마음 가득 들어찬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미뉴엘이 그를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황자님, 좋아해요!”
반사적으로 그녀를 받아 안은 에사디엔은 숨을 헉, 들이켰다. 베스트며 겉옷을 하나도 갖춰 입지 않은 탓에 얇은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낭창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파르르 떨리는 하늘빛 눈동자는 오롯이 에사디엔 한 사람만을 담고 있었다.
‘눈이 이렇게 예뻤던가.’
그래, 미뉴엘의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이른 새벽 밝아오는 하늘처럼.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억눌렀을 뿐.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에사디엔의 손이 홀린 듯 올라가 그녀의 눈가를 쓸었다.
“황자님…….”
간지러웠는지, 아니면 떨려서인지 미뉴엘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마저 꽃잎 같은 핑크빛이었다.
눈가에 이어 속눈썹을 조심조심 매만진 에사디엔의 손이 어느새 붉어진 뺨을 쓸고 흰 목을 거쳐 머리 아래를 받쳤다.
그의 얼굴이 점점 미뉴엘에게 기울었다.
‘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미뉴엘은 눈을 감은 채로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숨결이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으니까.
쿵쿵쿵쿵.
온몸이 심장으로 변한 것처럼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는 건가, 드디어!’
첫! 키! 스! 를!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미뉴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어느새 얇은 눈가의 피부까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던 에사디엔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사랑스럽게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사디엔의 이성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에사디엔은 홀린 듯 어루만지던 미뉴엘의 얼굴을 단박에 놓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시선은 벽에 박힌 자수정 장식 주변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자신의 한심함에 놀라서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황자님……?”
한편 미뉴엘은 기다려도 아무런 접촉이 없자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분명히 키스가 이어질 분위기였는데 웬걸, 에사디엔은 꼿꼿이 서 있다가 가까스로 이런 말을 내뱉었을 뿐이다.
“…떨어져.”
“네?”
“너무 가깝다. 떨어져라.”
미뉴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히잉…….”
억울했다. 너무너무 억울했다.
에사디엔의 품에 얼굴을 묻어봤지만 한숨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미뉴엘.”
“알았어요.”
그래도 경직됐던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는 것에 만족하고 미뉴엘은 그를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하지만 미뉴엘은 포기를 모르는 카르이넨 집안사람이었다. 긴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 에사디엔의 옆에 찰싹 달라붙자 다시 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너무 밀접한 접촉은 곤란하다.”
“하지마안.”
에사디엔과 팔짱을 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어깨에 고개를 폭 기댄 미뉴엘이 처량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황자님, 저 일주일이나 밤을 새워서 너무너무 피곤해요.”
밤을 새운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알았으므로 에사디엔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동안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러 돌아갔던 것도, 어제 방문하지 않았던 이유도. 묻지 않고 오해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천천히 하지… 그랬나.”
“하지만 곧 저희 둘째 언니 결혼식인걸요? 제가 준비를 맡게 되어서 바빠질 거라고요.”
미뉴엘은 옅은 졸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뵙지 못할 것 같아서……. 꼭 그 전에 드리고 싶었어요.”
조금 전 미뉴엘이 얼굴을 묻었던 가슴께가 욱신거린 것 같았다.
‘보지 못한…다고.’
하지만 에사디엔은 그 감각을 착각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도 미뉴엘이 어깨에 머리를 부비자 그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주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러웠다.
“아, 좋다…….”
만족스럽게 배시시 웃던 미뉴엘은 에사디엔의 눈과 비슷한 색의 실을 찾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저귀는 듯하던 목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곧 조용히 멎었다. 그리고 에사디엔의 어깨에 실린 무게감이 조금 늘었다.
‘정말로 피곤했나 보군.’
그를 위해 고생한 사람이 이토록 그에 대한 신뢰를 온몸으로 드러내며 곤히 잠들었다. 아무리 무감한 에사디엔이라도 가슴이 뭉클하지 않기는 어려웠다.
‘몸도 약한데… 불편하게 자다가 또 어디가 아파지는 것은 아닐까.’
에사디엔은 그런 것을 염려하며 큰 손으로 미뉴엘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다 침대에 눕혀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는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