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내가 정말 미친 모양이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자.
그렇게 생각한 에사디엔은 다시 책을 펼쳤지만 내용은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책장만 느릿느릿 무의미하게 넘어갔다.
그나마도 끝나니 새삼스럽게 색색 울리는 미뉴엘의 숨결이 의식되어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상태가 이상하다.’
기습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도, 암살자를 맞아 싸울 때도 이 정도로 몸이 딱딱하게 굳지는 않았다.
‘요즘 너무 나태해졌나.’
테오도르도 수도 로콰이트로 돌아왔으니 다시 훈련 일정을 짤 때가 되었다.
하지만 테오도르가 들으면 기겁했을 생각은 미뉴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나른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단박에 날아갔다.
“으음…….”
“이, 일어났나.”
“저 얼마나 잤어요……?”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나른한 목소리에 어쩐지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
어느새 입까지 말랐는지 겨우겨우 입술을 축이며 대답하자 놀란 미뉴엘이 그에게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게 오래요? 팔 저리지 않으세요?”
미뉴엘이야말로 그에게 기댔던 목이 아프지 않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에사디엔의 굳은 입은 단 한마디만 내놓았다.
“…괜찮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러면 저는 그만 가볼게요.”
미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사디엔은 이유 모를 상실감을 희미하게 맛보았다. 동시에 일주일 전이었다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을 흘렸다.
“아직 밝은데 서두르지 않아도…….”
“갈게요, 에사디엔.”
싱긋 웃으며 말을 자른 미뉴엘이 허리를 살짝 굽혔다.
‘아, 다시 이름을.’
에사디엔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
쪽.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말랑한 촉감이 에사디엔의 뺨에 머물렀다가 멀어졌다.
“……!”
몸도, 생각도 멈췄다. 에사디엔은 앉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까지 참고 있던 그는 미뉴엘이 떠나고 나서야 뻣뻣하게 손을 들어 뺨을 만져보았다.
“곤란하다고, 했는데도.”
그 부분만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 * *
농담이 아니라 나는 진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속 편하게 놀고먹기만 했던 지난날이여, 안녕.’
쥬엘라 언니는 정말 자신의 결정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다 내게 맡겨버렸다.
“우리 애기, 이 언니는 상단 업무로 뼈가 부서지게 바빠요.”
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언니가 엄청나게 바쁜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초인이다.’
쉴 새 없이 사람이 들락거리는 언니의 집무실. 모처럼 손이 비는 시간이라 나는 언니가 일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파르미안에서 통행세를 올렸다고 합니다.”
“주머니 찔러 넣은 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발작이야? 배는 진척 상황이 어떻지?”
“완성이 가깝다고는 합니다만 날짜를 더 단축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됐어. 괜히 당겼다가 사람도 잃고 물건도 잃는 수가 있어. 어쩔 수 없지. 이번 한 번만 더 교섭해 봐. 다음은 없어.”
수많은 안건과 지시가 숨 가쁘게 오갔다.
‘저렇게 일하면서 대체 연애는 언제 했담.’
나도 에사디엔 보고 싶다아아……!
“이것만 끝내면 가봐.”
어느새 상단 사람들이 물러갔는지 언니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응?”
“황자님 보고 싶다면서.”
“헉, 나 방금 소리 내서 말했어?”
언니는 풋, 웃으며 내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지난번 이후로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그으래. 너도 참 중증이다.”
“으으! 그마해.”
원래 한 번 말해서는 좀처럼 놔주지 않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다.
“아가씨, 손님이 왔습니다. 파로이 님께서 말씀하셨던 분이라고요.”
노크 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쥬엘라 언니는 언제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냐는 듯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그래. 올라와도 좋다고 전해라.”
오늘 만날 사람은 예비 형부, 기디온 파로이의 외가 친척이 들인 수양딸이었다. 사교계 수업과 신부 수업을 겸해서 언니의 시중을 들겠다나 뭐라나.
“언니는 사교계보다 상단 일에 집중하는데 뭘 배우겠다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뭐, 우리 집안에, 나 정도 자리에 있으면 마주치는 사람들도 거물급이잖니. 얼굴도장을 잘 찍어두고 운이 좋으면 좋은 줄까지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
“어… 그렇구나. 나도 나중에 그래야 하나?”
“네가?”
언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구 밑으로 들어가게? 황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러게?”
고민하면서 고불고불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뱅뱅 꼬자 언니가 정수리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미뉴엘 넌 다른 사람들 얼굴 익혀가면서 아부할 필요 없어. 백 번을 만나도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상대가 백 번 자기소개를 해야 마땅하지.”
“그래도 그건 좀…….”
“원래 권력이란 그런 거야. 알겠니?”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맞추는 언니의 붉은 눈은 다정하면서도 서늘한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태생부터 권력자란 이런 건가?’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역시 어색했다. 내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고 신전에서는 다들 신분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고 지냈으니까.
그러는 사이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풍성하게 컬이 진 붉은 머리와 금빛 눈을 가진 미녀가 들어와 치맛자락을 잡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페슈 셀레스테라고 합니다.”
툭.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이 툭 떨어지면서 그녀와 내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어머, 괜찮으세요?”
그렇게 물은 그녀는 바로 몸을 굽혀 깃펜을 주워 건넸다. 전혀 귀족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라페슈 셀레스테……. 바야흐로 여자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 * *
그 첫 대면 이후로 나는 최대한 라페슈를 피했다.
결혼식 준비 때문에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대부분을 함께 보내기는 하지만 일 이야기 외에는 되도록 나누지 않으려 했다.
‘지친다. 에사디엔 보고 싶어.’
라페슈가 여자 주인공이라서냐고? 그거야 당연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뉴엘 님, 이것 좀 드시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캐러멜인데…….’
‘미뉴엘 님은 밝은색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여기에 레이스를 잔뜩 달면 예쁘겠어요.’
‘미뉴엘 님.’
‘미뉴엘 님!’
뭐만 봤다 하면 ‘미뉴엘 님, 미뉴엘 님.’ 언니가 아니라 내 시녀처럼 구는 게 호흡 곤란이 올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쟤 진짜… 왜 저러지?”
원작의 ‘라페슈’는 ‘미뉴엘’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테오도르와 만나기 전까지는 사막 지역 근처에서 살았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 수도로 올라온 것도 이상하고…….
“아, 모르겠다.”
접점이 단 하나도 없는 사이였으니 내 행동으로 달라졌다고 볼 수도 없다.
하여튼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지는 사람이었다, 라페슈는.
“흐아. 여기는 아무도 없지?”
지금도 둘이 남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핑계를 대고 정원으로 도망 나온 참이었다.
라페슈가 권하는 것은 전부 내 취향과 반대라 더 괴로웠다. 게다가 예비 형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막 대할 수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어질어질했다. 우둘투둘한 나무 표면을 짚으며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여기서 뭐 해? 미뉴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주인이 라망드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너무 놀라서 숨을 멈췄던 모양이다.
“쿨럭, 컥! 쿨럭, 켈록!”
“정말 너한테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라망드는 익숙한 한숨과 함께 내 등을 두들겨주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흘러들어 오는 신성력이 편안했다.
“어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아, 미안.”
사제님다운 질책을 하면서도 이곳저곳 흐트러진 데를 정리해 주는 손길은 세심하기 그지없었다.
기침 때문에 열이 오른 뺨을 토닥여주고,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살짝 풀리려는 리본을 다시 매주고.
오늘도 라 첨지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게…….”
지금 라페슈 여기 없지? 다시 한번 주변을 휘 둘러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게, 셀레스테 영애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하늘의 조화란 말인가. 그녀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시야에 빨간 머리카락이 빠끔히 들어왔다.
“저 부르셨어요?”
으아아아악!
나는 파르르 떨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게 보이는지 마는지, 라페슈는 방긋 웃을 따름이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미뉴엘 님.”
도, 도와줘, 라 첨지.
내 간절한 시선을 받고 라망드가 미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뉴엘은 저와 잠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몸이 허약해서 꼬박꼬박 운동을 시켜줘야 하거든요.”
강아지 산책시키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그러시군요. 공작저에 상주하시는 사제님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뵙기는 처음이네요.”
“저도 공작저에 일을 배우러 오시는 분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뵙기는 처음이군요.”
분명 둘 다 사교적인 얼굴로 웃고 있는데 왜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중간에 끼인 나만 괜히 등에 진땀이 흘렀다.
“호…호호. 제가 로콰이트에는 처음이라. 라페슈 셀레스테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라망드 플렌드나입니다. 미뉴엘과는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같이 자란 소꿉친구죠.”
“미뉴엘 님께서 신전에서 자라셨다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라페슈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 내 뒷조사까지 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라페슈는 공작저에 들어오고 나서 나와 처음 만난 것이니까. 무엇보다 뒷조사를 했다면 그렇게까지 내 취향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가까워 보였구나.”
라페슈가 황금 같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하지만 아쉬우시겠어요, 사제님.”
“무슨…….”
눈살을 찌푸리며 라망드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아, 아가씨. 여기 계셨습니까?”
정원에 옹기종기 선 우리 쪽으로 집사가 바삐 걸어왔다.
“파로이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구나.”
라페슈에게서 벗어날 생각뿐이라 미처 시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라망드가 물었다.
“나도 같이 갈까?”
“뭘 물어보고 그래?”
라망드가 옆에 있으면 라페슈도 조금 자제하겠지 싶어 반색하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도 미뉴엘 님 손…….”
뒤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나는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