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는 못 들었어. 응,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나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서자 덩치 커다란 남자가 나를 보며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카르이넨 영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 트레고스난 경?”
일단 이 양반이 왜 파로이 가문 사람이라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좋은 기회였다.
‘원작 남녀 주인공의 만남!’
둘 사이에 빨리 불을 붙여서 약혼시켜 보내버려야지.
나는 테오도르가 건넨 서류를 보다가 슬쩍 그를 살피고는 그만 풋 웃어버렸다.
‘테오도르는 라페슈한테 첫눈에 반했나 보네.’
어떻게 알았냐고? 그야 내가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를 살피는지는 관심도 없이 그녀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걸.
‘그나저나 작은 형부네 친척이 참 희한하게 얽혔구나.’
어차피 데릴사위로 들어올 테니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서류를 찬찬히 살피다 보니 테오도르가 온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외가 쪽 친척이 라페슈의 셀레스테 자작가에 친가 친척은 테오도르의 트레고스난 백작가라니.
‘원작에서도 그랬던가?’
고민하는 사이에 정신을 차렸는지 테오도르가 내게 말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기디온 형님께 들었습니다. 영애가 결혼 준비를 돕고 계신다고요.”
“네. 언니가 워낙 바빠서 제가 대행하고 있어요.”
“신뢰받고 계시는군요.”
테오도르가 놀라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보통 귀족 가문에 머리 큰 형제가 셋 이상 있으면 그때부터는 아귀다툼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집안은 이미 언니들의 능력이 확실한걸.’
첫째 엘가 언니는 어머니의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기사였다. 다음 대공위는 그녀의 것이었다.
둘째 쥬엘라 언니는 똑똑한 머리와 상재로 우리 집안의 상단을 오 년 만에 제국 제일로 만들었다. 상단은 이미 그녀의 것이다.
‘그리고 언니들의 사랑은 내 것.’
나는 얌전히 사랑받으며 넘치는 부를 누리기만 하면 됐다. 생일마다 장원이며 농장, 섬을 선물 받는데 무엇 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는가.
그래서 나는 웃으며 이렇게만 말했다.
“물론이지요. 가족인걸요.”
작게 감탄한 테오도르는 다시 라페슈에게 집중했다. 이제 조금 용기도 냈는지 말을 건네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다.
“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다음에 혹시 시간 되시면…….”
“아뇨. 차를 마시면 잠을 잘 못 자서요.”
“어… 지금 드시는 것은…….”
“이건 허브차입니다.”
“수색이…….”
붉었다. 애초에 다 같은 주전자에서 우린 차였지만 라페슈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말했다.
“허브, 차입니다.”
“예……. 아, 혹시 영애께서는 오페라를 좋아하십니까? 다음에 혹시 시간 되시면…….”
“아뇨. 폐소 공포증이 있어 딱 싫네요. 제가 좀 촌스러워서.”
엄청난 철벽이었다.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마무리에 오히려 말을 꺼낸 테오도르가 더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취향 문제인데 촌스럽다니요. 전혀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이 아닙니다.”
“네.”
아이고야. 내가 테오도르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너구리라고 놀린 거 절대 용서 안 하려고 했는데.’
테오도르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조심스럽게 라페슈에게 물었다.
“라페슈 양, 혹시 트레고스난 경이 마음에 들지 않던가요?”
“네.”
와, 단호해라.
“저는 평생 저만 봐줄 지고지순한 남자가 좋거든요.”
그거야 나도 그렇지만, 라페슈의 말투는 마치 테오도르가 바람피울 종자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라페슈 양은 어떻게 그런 걸 알아요? 얼굴을 딱 보면 나오나요?”
그렇게 묻자 라페슈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테오도르에게 철벽을 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어, 아, 네.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오호호… 예감이랄까요.”
“그렇구나아. 감이 좋은가 봐요.”
“가, 가끔 한 번씩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감이란 중요하지요.”
“네. 마, 맞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땀을 흘리니, 라페슈.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라페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 입을 열지 않았다.
* * *
매주 돌아오는 황가의 티타임.
황제와 황태자, 에사디엔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요즘은 우리 아가가 보이지 않는구나. 이제는 오지 않겠다던?”
여름이라 입맛을 잃을까 저어된다며 올라온 레몬차를 후룩 마시던 황제가 갑자기 운을 띄웠다.
“아가란 누구를 칭하시는 것입니까, 폐하.”
황실에 아기가 태어나지 않은 지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잠시 고민하던 에사디엔이 결국 포기하고 묻자 황태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당연히 미뉴엘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너도 참.”
아가, 아가라. 물론 체구가 작고 피부도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하지만 아기라고 하기에는…….
“흠흠.”
자신도 모르게 미뉴엘을 떠올리던 에사디엔이 황제의 헛기침 소리에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아, 둘째 공녀의 결혼식 준비 때문에 바빠서 당분간은 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에사디엔의 대답을 듣자마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둔한 녀석을 보았나.”
“예?”
“그쪽에서 오지 못하면 너라도 가서 얼굴을 비추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에사디엔, 대공저에 몇 번이나 방문해 보았느냐.”
“지난번에 병문안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황제와 황태자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고는 짠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당연히 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나마도 주변에서 떠밀어 방문한 것이 아니냐. 그 뒤로는 가본 적이 없지?”
에사디엔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는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숙인 정수리 위로 한탄처럼 잔소리가 쏟아졌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에사디엔, 네가 스스로를 황자궁에 가둔 듯 사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차로 목을 축인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것만은 알아두어라. 이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숭고한 마음도 퍼붓기만 하면 마모되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아들은 듯하니 기쁘구나. 이제 그대로 나가서 마차를 타면 된다.”
“예?”
놀란 에사디엔이 내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제와 황태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만면에 띠며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대공저로 보내실 생각이셨구나.’
에사디엔의 등줄기에 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렀다.
“하오나 미리 방문 서신도 넣지 않았는데…….”
“깜짝 방문이라는 것이다, 얘야. 게다가 너는 혼자서 며칠이고 고민하다가 그만둘 것이 빤히 보이니 우리도 어쩔 수 없구나.”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울리던 황제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에사디엔은 대공저의 현관홀에 발을 내디뎠다.
계획에 없이 방문한 에사디엔만큼이나 카르이넨 대공저의 집사도 당황스러운지 머뭇대고 있었다.
하지만 집사는 온갖 손님을 맞이하며 이골이 난 전문가였다. 곧 정신을 다잡은 그가 에사디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천한 자가 여쭙습니다. 미뉴엘 아가씨가 바빠 이제야 식사를 시작했습니다만, 혹시 황자님께서도 점심 전이시라면 같이하시겠습니까?”
조금 전까지 차를 마셨으므로 별달리 허기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에사디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미뉴엘이 식사를 방해받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지.”
미뉴엘은 일 층 응접실에 딸린 꽤 큼직한 테라스에 있었다.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가자마자 에사디엔의 눈에는 턱을 괸 채 햇볕을 쬐는 미뉴엘의 옆얼굴이 확 들어왔다.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보자 짓궂은 황제 때문에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잘 지냈나 보군.’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 장난 그만 치고 먹는 데 집중해.”
“싫지롱.”
“간지럽히기 전에.”
“간지럽히면 더 못 먹지롱.”
미뉴엘의 맞은편에 사람이 있었다.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사제라고 했던가.’
미뉴엘과 장난을 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웠다.
“미뉴엘 아가씨, 삼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응?”
누가 여기에 왔다고?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이쪽을 본 미뉴엘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활짝 피었다. 햇빛을 잔뜩 머금어 밝게 빛나는 그 모습에 꽉 쥐었던 에사디엔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에사디엔!”
미뉴엘은 그의 이름을 반갑게 외치며 발딱 일어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옷자락을 잘못 밟았는지 휘청거리는 모습에 에사디엔이 반사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보다 라망드가 빨랐다.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부축하는 라망드의 모습에 에사디엔은 그만 멈춰 서고 말았다.
“…….”
에사디엔의 눈이 미뉴엘의 팔이며 허리를 야무지게 붙든 라망드의 손에 붙박였다.
“또, 또.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큰일 났지. 라망드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어이구, 하여간 말은 잘해요.”
라망드와 미뉴엘, 둘 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소꿉친구라는 말을 되새겼지만 어째선지 에사디엔은 그 손이 너무나 신경 쓰였다.
“아, 놀라라. 에사디엔! 와! 이거 꿈이에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미뉴엘은 금방 라망드에게서 떨어져 에사디엔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였다면 보자마자 달려와서 껴안았을 텐데, 어지간히 믿기 힘들었는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다가 폭 안겨왔다.
“미리 전언을 보내셨다면 마중하러 나갔을 텐데요.”
“미안하다. 갑자기 오게 되어서.”
에사디엔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미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가슴팍에서 울리는 말을 듣자 그제야 품이 가득 찬 것 같았다.
에사디엔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손을 들어 미뉴엘의 등을 살며시 쓸어내리던 그가 물었다.
“그런데 미뉴엘… 그대는 그새 또 마른 건가.”
“막내 아가씨께 식사량을 늘리셔야 한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황자님.”
이때다, 하듯이 옆에서 집사가 변죽을 울리자 미뉴엘이 서둘러 반박했다.
“아니에요! 저 엄청 많이, 잘 먹고 있는데요!”
“그래. 알겠으니 일단 마저 들지.”
에사디엔치고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미뉴엘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그의 팔을 꼭 껴안고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뵈어 영광입니다, 황자님.”
미뉴엘의 품에서부터 슥 타고 올라간 라망드의 시선이 허공에서 에사디엔의 눈과 부딪쳤다.
“반갑군, 플렌드나의 사제.”
찰나 간 심상치 않은 눈빛이 마주친 것도 잠시, 둘은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평범한 인사를 나누었다.
스쳐 지나간 긴장감을 알아채지 못한 집사가 다시 미뉴엘에게 말했다.
“아가씨, 황자님께서도 함께 식사하실 것이니 천천히 다 드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