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정말?”
미뉴엘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에사디엔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배부른데……. 그래도 알았어.”
라망드의 접시와 비교하면 미뉴엘의 것은 거의 양이 줄지 않은 새 음식처럼 보였다.
에사디엔은 집사며 쥬엘라 공녀의 심정에 깊이 공감했다.
‘저렇게 먹으니 만날 때마다 더 마르는 거군.’
오히려 황자궁에서보다 집에서 더 조금 먹는 것 같았다.
양이 좀처럼 줄지 않는 미트볼 때문에 미뉴엘이 분투하는 사이, 에사디엔은 조용히 집사를 불러 카듀렌 광장에 위치한 카페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래도 그곳의 ‘고기 치즈 샌드위치’는 한쪽을 다 먹었으니까.
* * *
행복한 시간이었다.
에사디엔, 라망드. 내게 소중한 사람 두 명이 다 곁에 있다니 꿈만 같아서 위도 조금 늘어난 것 같았다. 그 힘으로 최대한 열심히 먹었지만…….
“아아, 역시 이 이상은 무리야.”
터질 것 같은 배에 손을 올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라망드가 조금 웃었다.
“그럼 이리 줘. 그래도 너치고는 정말 많이 먹었다.”
라망드는 익숙하게 내 접시를 가져갔다. 남은 것을 큼직하게 썰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 참 복스럽기도 했다.
‘저게 다 들어가다니.’
그것도 신기하지만 라망드의 배는 아무리 먹어도 튀어나오기는커녕 판판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인체의 신비였다.
“큼.”
라망드의 먹방을 한참 구경하는 도중 에사디엔이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눈썹만 미미하게 솟은 각도를 보아하니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한참 고민해 봐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너무 빤히 관찰했나. 시선을 알아차린 에사디엔의 눈이 이쪽으로 굴러왔다.
“에사디엔, 한 접시 더 달라고 할까요?”
그의 접시는 한참 전에 깨끗이 비어 있었다.
“괜찮다.”
“음……. 맛이 없었어요?”
뷔페에서 배불리 먹고 나오는 길에 ‘이 집 먹을 거 없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가?
“아…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니. 이럴 때는 솔직히 묻는 것이 답이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에사디엔이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으니까 물어본 거지.
표정 변화가 다채롭지 않은 그를 계속 관찰하다 보니 나한테도 에사디엔 전용 감식안이 생겼다.
하지만 천천히 감았다 뜬 그의 눈매가 순둥순둥하니 부드러워졌으므로 나는 이만 넘어가기로 했다.
잠시 후, 라망드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식사가 끝났지만 이대로 에사디엔과 헤어지기는 싫었다.
‘모처럼 만났는데 이렇게 빨리 보낼 수야 없지!’
에사디엔의 성격상 오늘 방문은 그가 원했던 것일 리가 없다. 식사도 끝났으니 그대로 돌아가려고 할 것도 훤히 보였다.
“저희 저택에 도서실이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책을 좋아하는 그가 거절하기 힘든 주제를 제안했다. 최소한 책 한 권을 읽는 동안은 함께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도서실?”
아니나 다를까 흥미가 돋았는지 에사디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예!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생각했다.
‘쌓인 일을 부탁한다, 미래의 나!’
우리 집안사람들은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북부에 있는 본성은 아예 별관의 일 층과 지하가 모두 도서관일 정도였다.
“왜 도서실이라고 했는지 알겠군.”
서재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넓은 공간을 연신 둘러보며 에사디엔이 감탄했다.
“황실 도서관보다는 많이 아담하겠지만요.”
“그래도 거기는 워낙 사람이 많아서. 여긴 고즈넉하니 좋은데.”
에사디엔의 얼굴에 매달린 미소가 예뻤다. 저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
“편하실 때 한 번씩 놀러 오세요.”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에사디엔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고맙지만… 대공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지.”
“물론입니다, 전하.”
그 대답은 나와 같은 분홍색 머리칼을 지닌 사람에게서 나왔다. 내게 그것을 물려준 카르이넨 대공님의 남편. 즉 우리 아버지였다.
“아빠!”
“그래, 아가.”
아버지도 옆구리에 이미 책 두어 권을 끼고 계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연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방문하여 미안하오.”
“아닙니다. 황자님께 대공가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책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생명을 가지는 법이니까요.”
“고맙군.”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부드럽게 웃은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 뒤 나는 에사디엔이 책을 한 권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손을 끌고 숨겨진 것처럼 안쪽에 자리한 윈도 시트에 앉았다.
평소에는 햇빛이 강하게 드는 것을 막으려 닫아두는 나무 덧창까지 열고 에사디엔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헤헤.”
발끝에서부터 행복이 넘실넘실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웃음소리를 내자 에사디엔이 왜 그러느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데이트하는 것 같아서요.”
입가에 손을 올려 자그맣게 속삭였더니 에사디엔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왜 부끄러워하세요?”
처음 이러는 것도 아닌데.
갸웃거리며 묻자 그는 서둘러 부인했다.
“아, 아니다.”
“하지만 귀가 빨개졌는걸요?”
“읏.”
에사디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은 정말이지 세상 최고로 귀여웠다.
“에사디엔.”
방글방글 웃으며 부르자 눈을 가린 채로 그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후……. 왜 그러나.”
“뽀뽀해도 돼요?”
“…….”
잠시 에사디엔의 몸이 뚝 굳었다.
그리고 몇 초 후 손을 내린 그가 정색하며 낮게 외쳤다.
“그대는 정말이지……!”
하지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카르이넨이다.
방해물이던 팔이 사라지자마자 냅다 에사디엔의 볼에 입을 맞췄다.
쪽.
벌써 두 번째 뽀뽀였다.
팽팽하면서도 부드러운 피부에 입술이 닿아 눌리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거기에 더해서 서서히 붉게 물드는 얼굴을 지켜보는 것도.
에사디엔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 곧 자신 쪽으로 기운 내 어깨를 꽉 잡고 원위치시켰다.
“책을, 읽지.”
띄엄띄엄 끊겨 나오는 목소리에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역시 부끄러운 거예요?”
“미뉴엘.”
하지만 에사디엔은 금세 원래의 태도를 회복했다. 그의 입에서 단호하게 내 이름이 흘러나오자 나도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알았어요. 이제 방해 안 할…….”
그러나 그 순간 뒷덜미에서 정수리까지 쭈욱 타고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히익!”
심상찮은 반응에 에사디엔도 놀라며 책을 덮었다. 이어 내 어깨를 붙잡고 이마며 볼을 짚어보는 손길이 꽤 다급했다.
“미뉴엘, 어디가 안 좋은가.”
“아, 아니……. 지금 굉장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어요…….”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바로 근처에 라페슈가 있다고!
“불길하다니…….”
에사디엔이 조금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그 뒤를 이어 하프 선율처럼 고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머, 미뉴엘 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아다녔답니다.”
아아, 역시나.
내 등은 그만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세, 셀레스테 영애, 어떻게 여기까지…….”
나는 삐걱거리며 가까스로 인사했다. 그런데 웬걸, 응당 돌아와야 할 반응이 없었다.
‘오늘 입은 옷도 굉장히 잘 어울리세요!’라거나, ‘제가 이걸 가져왔는데 드셔보세요.’ 같은.
라페슈는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영혼을 빼앗긴 듯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초점이 흐려진 눈, 그러면서도 에사디엔의 얼굴에 고정된 시선, 발갛게 상기된 얼굴, 흥분된 미소.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라페슈는 에사디엔에게 반했다.
내가 에사디엔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얼굴도 아마 저랬겠지 싶은 모습이었다.
‘어째서? 라페슈는 테오도르와 이어져야 하는데, 왜…….’
원작에서 라페슈가 에사디엔과 급격히 가까워지는 시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라페슈가 테오도르와의 관계 탓에 심적으로 아주 힘들 때였고 에사디엔도 술에 취해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제발. 에사디엔만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에사디엔을 돌아보았다.
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냉랭한 것도 경직된 것도 아닌 처음 보는 묘한 표정으로 라페슈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껏 에사디엔이 누군가를 그렇게 집요하게 쳐다본 적은 없었다. 지금껏 그토록 들이댄 내게도.
“…….”
서글퍼져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심장은 말 그대로 바닥에 쿵, 내동댕이쳐진 상태였다.
사방을 두르며 벽에 가득 채워진 책들마저 와르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은 이야기의 중심, 이야기의 주인이다.
‘만약 라페슈가 에사디엔을 원한다면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남자 주인공에게 반하지 말자는 생각 자체가 여자 주인공과 싸우는 운명대로 흘러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행복을 모두 바쳐도 이야기의 주인인 라페슈를 이길 수는 없다고 이미 원작이 증명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래서 피했던 것인데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엘, 미뉴엘.”
“아, 네? 네!”
“괜찮은가?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느새 에사디엔은 상체를 살짝 숙여 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
영혼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바닷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아, 네. 잠시 다른 생각을 했나 봐요.”
나는 숨을 조금 몰아쉬며 웃는 얼굴을 꾸며냈다.
“에사디엔, 이쪽은 라페슈 셀레스테 영애라고 해요.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 준비를 도우러 와주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페슈가 치맛자락을 쥐며 무릎을 살짝 굽혀 보였다.
“셀레스테 영애, 이분은 제 약혼자이신 에사디엔 로콰이트 삼황자 전하세요.”
“반갑군.”
에사디엔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지만 라페슈는 처음 그에게 반했던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야, 약혼…자요?”
“…그런데요.”
“미뉴엘 님, 약혼하셨다고요?”
맑은 금빛 눈동자가 나와 에사디엔 사이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게다가 에사… 아니, 삼황자님하고요?”
“네.”
“대체 언제요?”
그렇게 몇 번이나 묻자 에사디엔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딱딱하게 되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라페슈는 떨리는 눈으로 에사디엔과 나를 번갈아 보다 새파래진 얼굴을 푹 숙이고는 물러갔다.
‘어떡하지.’
라페슈도 에사디엔에게 반해 버리다니.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나는 손가락을 마주 잡고 마구 쥐어뜯었다. 나를 조금씩 더 받아주는 에사디엔에게 취해서 내가 반한 것처럼 누구든 그에게 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