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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8)화 (18/130)

18화

“미뉴엘.”

잔뜩 우울해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에사디엔이 비틀리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얇은 장갑 위에 진 주름을 쓸어보던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전 괜찮아요.”

“아니다. 바쁘다더니 무리한 것이 틀림없어. 쉬는 편이 낫겠다.”

그래서가 아니에요.

나는 그 말을 삼키며 에사디엔의 손을 꽉 부여잡고 웅얼거렸다.

“같이 있고 싶어요.”

“또 오겠다. 그러니 이만 쉬어라.”

낮은 목소리가 편안하게 울렸다.

그의 목소리를 위안 삼아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뜬 나는 에사디엔이 옆에 내려둔 책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 책, 빌려드릴게요. 꼭 반납하러 와주세요.”

“그러지.”

도서실에서 현관홀이 이렇게 가까웠나?

에사디엔을 배웅하러 나간 나는 한동안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좀처럼 떨어지지 못했다.

“미뉴엘, 내가 가야 그대가 쉴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약속하지 않았나. 다시 오겠다고.”

“에사디엔.”

“그래.”

너무나 행복했기에 눈앞에 예고된 내리막이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에사디엔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늘 와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에사디엔은 머뭇거리다 결국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물씬 풍기는 시원한 향기를 맡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에사디엔도 어느새 이렇게 나에게 익숙해졌으니까, 그는 라페슈와 같은 표정을 짓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자.

* * *

그러나 애써 한 다짐이 무색했다.

바로 다음 날부터 나는 물음표 살인마로 각성한 라페슈 때문에 더 괴로워졌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네?”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라페슈가 양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미뉴엘 님하고 황자님이요. 저는 정말 동화에서 빠져나온 천사님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황자님은 참 멋진 분이시죠.”

입 안에 차를 흘려 넣으며 대충 대답했지만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지금껏 라페슈의 수다는 나에 대한 물음이나 자신의 취향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에사디엔을 만나고 난 다음 날부터 그에 대한 질문이 늘어났다.

조금씩, 조금씩 발밑에 물이 차듯이.

‘답답해.’

그래서 그런가 점점 더 가슴께가 답답해졌다.

“미뉴엘, 안색이 왜 그래.”

라망드가 걱정하면서 신성력을 내어주어도 그때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피곤해서 그런가…….”

라망드를 만나고 단 한 번도 그에게 무언가를 숨겨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원작 때문에 에사디엔도 라페슈를 좋아하게 될지 모른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나마 쥬엘라 언니가 급한 출장으로 며칠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었다. 언니가 있었다면 당장 모든 일을 멈추라고 했을 테니까.

“미뉴엘 님, 삼황자님과의 첫 만남은 어떠셨어요?”

또다시 찾아온 티타임. 마치 뇌물을 건네듯 라페슈가 내 쪽으로 복숭아 무스 접시를 밀었다.

“…….”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찻잔을 계속 쥔 채로 빙긋 웃었다.

“황제 폐하께서 약혼자끼리 친해져야 한다고 자리를 만들어주셨지요. 처음 보자마자 황자님께 반했어요.”

“서로 첫눈에 반하신 건가요?”

숨이 턱 막혔다.

라페슈는 그냥 물어본 거겠지만 내게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어도 신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사디엔은 ‘그런’ 감정을 믿지 않으니까.

라페슈가 마치 그것을 알고 우리 사이를 떠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았다. 가까스로 찻물을 한 모금 더 삼킨 후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까 심부름꾼이 왔다 간 것 같은데. 드레스 가봉일이 언제라고 했죠?”

“앗, 잠시만요. 이쪽에 적어두었는데!”

겨우 그 순간을 넘겼지만 그 뒤로도 에사디엔에 관한 질문은 자꾸만 이어졌다.

‘두 분은 언제 약혼하셨나요? 지체 높은 귀족 가문에서는 어릴 때부터 상대가 정해져 있다던데.’

‘일주일씩이나 밤을 새워 태피스트리를 짜서 드렸다고 들었어요! 황자님께서 그만큼 잘해 주시나요?’

‘황자님은 지난번에 오신 것이 두 번째 방문이셨다면서요? 주로 미뉴엘 님이 황자궁으로 가셨다고…….’

어디서 이야기를 이렇게 듣고 오는 것인지.

원래 내 성격이었다면 대충 넘기거나 아니면 신이 나서 아예 자리를 깔고 에사디엔 자랑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라페슈에게만큼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끝도 없이 예민해지기만 했다.

“황자님께서는 모친께 머리카락 색을 물려받으셨다던데…….”

“그런데, 셀레스테 영애.”

마침내 나는 이 상황에 넌더리가 났다. 정색을 하고 부르는 내게 라페슈는 윙크를 하며 말했다.

“아이, 미뉴엘 님. 왜 아직도 이름을 안 불러주시는 거예요?”

하. 어이가 없었다. 에사디엔에게 그토록 관심을 드러내면서 내 호감도 얻고자 하다니.

“그건 천천히 하지요. 그런데 셀레스테 영애는 황자님께 관심이 많은가 봐요?”

“아…….”

라페슈는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활짝 웃었다.

“자꾸 물어봐서 기분 나쁘셨어요?”

“…….”

‘설마 저를 경계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뭐지, 이 사람. 날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게 아니었던가?’

그 생각과 동시에 내 속을 읽은 듯 또 한 번의 질문이 따라붙었다.

“미뉴엘 님, 제가 미뉴엘 님을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아아, 역시 기분 나쁜 사람이다. 최대한 좋게 넘기자는 생각을 깨부술 정도로.

“그게 진심이라면 황자님에 대한 질문은 그만둬요.”

“네? 아아… 역시 무례였나요?”

“뭐든 과하면 예의가 아니죠. 특히 그게 남의 약혼자에 대해서라면.”

“저는 그저 두 분이 멋져서…….”

“의도가 어떻든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군요.”

내 남자 건드리지 마. 원작이고 나발이고 국물도 없어.

싸늘하게 눈을 치켜뜨며 온몸으로 그런 메시지를 표시했다.

“죄송합니다…….”

라페슈는 끝내 개미만큼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모든 사과를 받아줄 필요는 없는 법이다.

다음 날, 그래도 내 눈치를 보기는 하는지 라페슈는 에사디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음 날. 라페슈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저어, 미뉴엘 님. 제가 트레고스난 경께 만남을 청하면 싫어하실까요?”

테오도르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보아하니 또 만나서 무안을 주려는 것은 아닌 듯한데, 태도가 바뀐 이유가 뭔지 궁금해져서 물었다.

“갑자기 왜요?”

“아아, 아무래도 지난번에 뵈었을 때 너무 무례했던 것 같아서요. 사과도 드리고 싶고…….”

무례하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트레고스난 경도 싫다고 하지는 않으실 것 같네요.”

“저어, 그럼 혹시…….”

그런데 이어 라페슈가 몸을 배배 꼬며 내뱉은 부탁은 뜻밖인 것을 넘어 놀랍기까지 했다.

“오페라라도 보러 가자고 청할까 하는데……. 혹시 미뉴엘 님도 함께 가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런 건 둘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난 아직 에사디엔하고도 둘이서 가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리고 둘이서만 있는 모습을 보여서 염문이라도 돌면…….”

라페슈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팔짱을 꼈다.

이미 내 마음의 균형추는 라페슈를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 예쁜 얼굴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양녀이기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백 번을 만나도 네가 기억하지 못하면 상대가 백 번 자기소개를 해야 마땅하지.’

라페슈에게는 ‘너는 누구의 이름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는 언니가 없다.

그 사실에 저열한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나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면 삼 일 후에는 일정이 없으니 그날로 하지요.”

“와아, 감사합니다.”

못 이긴 척 승낙하자 라페슈는 방긋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진심이었다. 나는 중간에 빠져나와 둘을 엮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계속 플렌드나 신전에서 지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쳤지만 밀려드는 일거리에 곧 묻혔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웬일이야? 짬이 났는데 네가 황성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다니.”

“…그냥. 선약이 있어서.”

긴장한 것이 표가 났는지 라망드는 놀려대던 것을 멈추고 잠시 나를 들여다보다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그럼 다녀올게.”

“너, 요즘 계속 안색도 안 좋잖아.”

“괜찮아.”

나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차마 플렌드나 님께 보이기도 부끄러운 계략을 짰노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 나 그만 가볼게.”

더 이야기를 나누면 들킬 것 같았다.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려는데 뒤쫓아온 라망드가 팔을 잡아챘다.

“악! 깜짝이야!”

“뭐 숨기는 것 같은데.”

“숨기기느은…….”

“너 지금 계속 눈 굴리는 거 알아?”

“내가? 아닌데? 내 눈은 오늘도 이렇게나 맑은데?”

또렷또렷하게 눈을 뜨며 속눈썹을 팔랑거려 보였다. 그러자 라망드는 무언가를 가늠하려는 듯 잠시 나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하긴, 네가 나한테 뭘 숨길 리 없지.”

“아하하…….”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괜히 삐져나온 라망드의 머리카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침묵한 채 내 반응을 살피던 그의 수려한 얼굴에 살벌한 웃음이 맺혔다.

“그렇지? 응?”

라망드는 내 양 볼을 사정없이 조물조물 주물러댔다. 용서라고는 없는 손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해야 했다.

어쩌면 그게 일이 꼬일 징조였을지도 모른다.

겨우 빠져나와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테오도르와 라페슈는 어색하게도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카르이넨 영애.”

“네, 그럼요.”

싱긋 웃으며 내 손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는 테오도르에게 속삭였다.

“셀레스테 영애의 마음이 달라진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아, 하하. 글쎄요…….”

뭐지? 어째 반응이 이상했다.

하지만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말끝을 흐리며 상체를 편 테오도르는 평소처럼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황자님께서 영애가 더 말랐다고 걱정하시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왜 이리 작으십니까? 훅 불면 날아가실 분처럼.”

“경한테 작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렇게 쿡 찌르듯 말하면서도 나는 활짝 웃었다.

‘에사디엔도 내 생각을 하는구나.’

가라앉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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