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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19)화 (19/130)

19화

“자, 미뉴엘 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라페슈는 평소보다 더 달콤하게 웃으며 자신과 테오도르 사이를 가리켰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사이에 있으면 두 분이 대화하기 불편하실걸요.”

라페슈의 권유를 가볍게 건너뛰고 다른 자리에 앉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트레고스난 경, 오늘 셀레스테 영애가 경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나와 테오도르의 시선이 모두 라페슈에게 꽂혔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버릴 줄은 몰랐던지 라페슈는 잠시간 당황한 기색을 비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어, 지난번에는 처음 뵌 자리에서 무례한 언사를 보였던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트레고스난 경.”

“아닙니다. 저야말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네에……. 신사분과 이야기하는 일이 드물어서 제가 그만 방어적으로 대했나 봐요.”

“그러시다면 제가 조금 천천히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오오오, 과연 남자 주인공. 테오도르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직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흥미진진한 순간, 마치 배경 음악처럼 서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아, 이런.’

라페슈의 대답이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꾹 누르고 자세를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딘가 처절한 분위기의 서곡이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라페슈가 테오도르에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별실 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이라도 급했나?’

그러나 그 후 본격적인 극이 시작되고 일 막이 끝나도록 라페슈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군요. 휴게실에 뭔가 두고 왔다면서 나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테오도르가 걱정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내 머리를 둔탁하게 치고 지나갔다.

‘당했구나!’

테오도르와 라페슈를 이어주려던 나처럼,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내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왜?’

에사디엔을 보며 넋을 놓았던 라페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불안감이 토할 것처럼 목젖을 치고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경고했잖아. 라페슈도 받아들였고.’

아직 아무런 증거도 쥐지 못했다. 함부로 사람을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이곳 하인에게 셀레스테 영애를 찾아보라고 이르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막이 끝나 갈 즈음.

우리는 라페슈로 추측되는 인상착의를 한 영애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떠났다는 문지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때마침 여주인공은 비장한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점점 고조되는 극의 분위기와 달리 테오도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한 적은 처음입니다.”

하기야 테오도르도 황당할 터였다. 라페슈가 사과를 하기에 분위기가 호전되었다고 여기고 다가갔더니 놀란 새처럼 달아나 버렸으니.

안쓰러워져서 그의 팔뚝을 두어 번 두들겨주었다.

“이번 막만 끝나면 나가죠.”

“…예.”

테오도르의 고개가 침울하게 떨어졌다.

극이 상영되는 중간에 나온 터라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조금 서늘해진 공기를 들이마시니 살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어… 그래요.”

안쓰러워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이 선택을 매우 후회하게 되었다.

“제가 그렇게 별로입니까?”

어지간히 상처가 컸던 모양이다. 테오도르는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주정뱅이처럼 비슷한 한탄을 반복했다.

“저도 제가 잘생기지 않았다는 건 압니다. 매일 거울을 보니까요. 그래도 노력하면 호감 정도는 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 아니. 잠깐만요, 트레고스난 경.”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 테오도르 정도면 꽤 괜찮은 외모인데, 그렇게 비하하는 건 플렌드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라망드가 뭐라고 했더라.’

“플렌드나 님의 자식은 모두 아름다워요.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두세요.”

“카, 카르이넨 영애?”

짐짓 사제님들 흉내를 내며 엄숙하게 말하자 의외였는지 테오도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황자님하고 제 얼굴이 똑같다는 말입니까?”

윽.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저기요!”

“그것 보십시오.”

발끈함 반, 어이없음 반으로 눈썹을 찌푸리자 내 세 배는 될 것 같은 어깨가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이 양반, 안 그럴 것 같은데 은근히 그런 데 신경 쓰는구나.’

나는 한숨을 폭 쉬며 그의 무릎을 탁탁 두들겼다.

“저는 황자님을 좋아하니까 황자님이 최고로 보일 수밖에 없는걸요.”

“…….”

“사람을 사귀는 데 외모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잖아요. 분명 언젠가는 경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길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그럴까요.”

“당연하죠.”

짚신도 제짝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라페슈는 테오도르의 짝이 아니게 된 모양이었다.

‘원작이 비틀린 이유가 뭘까.’

내가 테오도르 말고 에사디엔에게 반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라페슈는 관계가 없는데.

애초에… 라페슈는 지금 사막 경계 지역에서 고달프게 살고 있을 시기다. 그런 그녀가 돌연 다른 집안에 입양되어서 수도로 올라온 것 자체부터 이상했다.

“…영애. 카르이넨 영애.”

즐겁지 않은 라페슈 생각에 빠진 사이 집에 도착했다.

‘본의 아니게 방치해 버렸네.’

날 에스코트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아직도 우울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까보다는 덜했지만 도저히 이대로 보내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경, 식사하고 가세요.”

“예?”

“이대로 보내면 술을 세 통은 족히 비우실 것 같네요.”

정곡을 찔렸는지 테오도르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쓸었다.

첫눈에 반했다지만 그는 짧은 시간이나마 라페슈에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를 이해해.’

나도 에사디엔을 보자마자 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까.

“그리고 있잖아요, 경.”

“예.”

“우리, 친구 할까요?”

“예에?”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에에에에’하고 끝을 울리며 퍼졌다. 여기가 산이었다면 분명 메아리가 들렸을 것이다.

“귀 아파, 테오도르.”

“죄, 죄송합……. 그런데 뭐라고요?”

나는 일부러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테오라고 부르는 편이 나으려나.”

“…….”

잠시 묵묵히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미소가 서서히 돌아왔다. 장난기가 어려 있으면서도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 이래야 테오도르지.

“아니, ‘할까요?’라고 물은 다음에 바로 확정입니까? 대답도 안 듣고?”

“싫어?”

“뭐,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십 대 초반의 장난꾸러기들처럼 킥킥킥 웃으며 들어서는 우리를 하인이 반겨주며 말했다.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아가씨. 황자님께서 도서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정말?”

에사디엔은 이제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게 버릇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나도 미리 알려두고 황자궁을 찾아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반색하는 내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저는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요?”

“무슨 그런 말을 해? 에사디엔하고는 단짝이면서.”

“아무리 그래도 둘이 있고 싶을 것 아닙니까?”

“괜찮아. 자, 빨리 이쪽으로!”

막무가내로 이끄는 내 손에 테오도르는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강한 기사인 그에게 내 힘 따위는 생쥐가 당기는 것이나 다름없이 느껴질 텐데도.

* * *

에사디엔이 예고 없이 대공저를 방문한 것은 그저 빌린 책을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전날 책을 다 읽고 난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미뉴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으니까.

‘빌려드릴게요. 꼭 반납하러 와주세요.’

꿈속에서도, 새벽에 일어나 검을 휘두르면서도, 아침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나중에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들여다보던 하늘빛 눈동자마저 떠올랐다. 책에 무언가 에사디엔으로서는 알 수 없는 마법적 장치라도 되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아…….”

한숨을 쉬는 에사디엔의 모습을 시종이 놀란 눈으로 보았다.

‘식사는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으시지?’

오랫동안 황자를 모셨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다리를 달달 떨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황족의 시종이라면 한미한 집안이기는 해도 귀족 자제다. 당연히 읽고 쓰기는 기본이었다. 에사디엔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책을 슬쩍 훑어봤지만 평범한 역사서였다.

『수감된 에우네아스』

제목으로 보아 내용은 아마도 파르미안 공국이 세워지기까지의 일대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책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종은 추측하기를 포기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자님,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걸리는 것이라.”

꿈에서 깨어난 듯 시종을 바라보던 에사디엔이 잠시 후 아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만 미뉴엘 생각이 난다고 어찌 말하겠나.

적당히 건조한 사이를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미뉴엘은 정말로 어려운 존재였다.

‘황자님, 좋아해요!’

천진한 웃음과 선물 같은 애정은 어떤 공성추보다도 강력했다. 단단히 쌓아둔 벽이 거리낌 없는 고백에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끝까지 에사디엔이 이성을 붙들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너를 증오한단다.’

어머니는 황녀의 신분으로 몰래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하룻밤 불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임신 소식을 알리자 남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설상가상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실을 알게 되어 진노한 선황의 명으로 어머니는 황성에서도 쫓겨났다.

물론 황족의 신분이므로 거리에 나앉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으로 그녀는 미쳐버리고 말았다.

‘에사디엔, 나의 작은 천사. 네가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창백한 얼굴로 병석에서 그리 말하는 어머니를 보며 슬픔을 느꼈던 나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단다.’

하지만 지금도 에사디엔은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의 디엔, 언제고 네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갓 짜낸 양젖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정이란 아침 해 앞의 안개보다도 더 빨리 흩어진다는 걸 기억하렴.’

나를 떠올리렴. 언제나…….

“황자님?”

“아.”

시종의 부름에 에사디엔은 그제야 굳었던 눈을 깜빡였다. 흐려졌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돌아왔다.

“피곤하시면 오수에 드시겠습니까? 침실은 정돈해 두었습니다.”

에사디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차를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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