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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0)화 (20/130)

20화

명령을 내리면서도 에사디엔의 상념은 과거를 떠돌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사이 황위에 오른 현 황제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조카를 가엾게 여겨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장례식 날, 에사디엔의 목에 선명히 남은 멍 자국을 보며 황제는 울었다.

‘미안하구나.’

돌이켜보면 그 눈물에는 아꼈던 동생이 망가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이 섞여 있었다.

“갑자기 어디에 가십니까?”

“카르이넨 대공저.”

에사디엔의 몸에서 그 멍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은 지금도 머릿속 깊숙이에 남아 있다.

그러니 자신이 미뉴엘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 같은 것일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상처 입고 싶지 않다.’

어머니처럼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미뉴엘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미뉴엘 생각이 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빌리는 것이 처음이라서일 것이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빨리 돌려주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기 때문에.

즉 책을 돌려주고 나면 자꾸만 미뉴엘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저에 미뉴엘은 없었다.

“삼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송구하오나 미뉴엘 아가씨께서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만…….”

솔직히 조금 김이 빠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미뉴엘이 섭섭해하겠지, 싶었다.

‘너무해요.’

새침하게 입술이 톡 튀어나온 채 투덜거릴 얼굴이 떠오르자 새의 부드러운 가슴 깃으로 간질인 것처럼 입가가 따뜻하게 올라갔다.

조금 전 마음을 다잡던 것이 무색한 모습이었지만 에사디엔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기다리겠다.”

“그러면 차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니다.”

집사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며 에사디엔은 그를 지나쳐 움직였다.

“도서실에 가 있도록 하지.”

지난번 방문했을 때 길을 기억해 두었으므로 에사디엔은 수월하게 도서실에 들어섰다.

책이 가득 쌓인 공간 특유의 냄새를 폐부 깊숙이 받아들이자 불안정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도서실. 여느 집안의 서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므로 그리 칭함이 마땅했다.

‘훌륭하군.’

두 번째 방문인데도 에사디엔은 벽을 따라 천장까지 닿은 서가의 규모에 감탄했다. 탑처럼 지은 사 층짜리 황실 도서관과는 또 다른 웅장함이었다.

무릎 높이의 바퀴 달린 북 카트에 빌린 책을 내려놓고 주변의 책장을 둘러보는 에사디엔의 귀에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삼황자님 아니셔요?”

돌아본 에사디엔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불타는 것처럼 새빨간 머리칼, 금화를 박아 넣은 듯한 눈.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그대는…….”

“라페슈 셀레스테라고 합니다, 황자님. 지난번에 여기에서 잠시 뵈었더랬지요.”

“기억한다.”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본 순간 들었던 기묘한 느낌은 둘째 치더라도…….

“어머, 영광이에요. 기뻐라.”

다가오는 라페슈의 얼굴을 에사디엔의 눈이 샅샅이 훑었다.

부드러운 아치형 눈썹, 크지만 살짝 끝이 올라간 눈매, 그러면서도 독특하게 진 쌍꺼풀 때문에 선해 보이는 인상. 도톰한 입술, 그리고 입술 선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흐리게 찍힌 점 하나까지.

어머니가 머리카락과 눈 색깔을 바꾸고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었다.

“아…….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요?”

집요한 시선에 라페슈가 민망했는지 조금 발그레해진 볼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말도록.”

가까스로 라페슈에게서 눈을 뗀 에사디엔이 책장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의식적으로 책등을 하나씩 훑었다.

『황금 비율의 정의』, 『원의 이해』, 『삼각 함수의 폭넓은 활용』…….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에사디엔의 뒤를 라페슈가 천천히 따라 걸으며 말했다.

“황자님께서도 책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에사디엔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책장의 제목들을 확인했다.

『불타는 알포노스』, 『아약스의 대장장이와 말』, 『말리스의 소금 해적단』.

“미뉴엘 님도 일하는 사이사이에 틈틈이 읽으시더라고요.”

미뉴엘 이야기에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려던 에사디엔이 멈칫했다.

바로 이 옆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웃던 미뉴엘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무언가가 머릿속을 문지른 듯 싹 걷혔다.

‘무슨…….’

에사디엔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도 잠시였다. 그 생각마저 뒤덮듯 옆에서 들쩍지근한 향내가 훅 풍겼다.

“아아, 손이…….”

에사디엔에게 달라붙듯 선 라페슈가 손이 닿을락 말락 한 책을 꺼내려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잠시.”

에사디엔이 라페슈를 만류하고 팔을 뻗었다.

“원하는 책이 이것인가.”

“네, 맞아요.”

미뉴엘보다 조금 키가 큰데도 이 정도는 무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에사디엔이 꺼내준 책을 라페슈가 품에 소중하게 꼭 껴안으며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에사디엔은 가볍게 겸양을 표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상한 기시감이 발목을 잡았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등을 떠밀며 라페슈의 곁에 서기를 종용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자꾸 시선이 닿는 것도 곤혹스러운데 라페슈도 계속 그를 보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휘어지는 금빛 눈을 보며 에사디엔은 생각했다.

‘어머니도 예전에는 저렇게 활짝 웃으셨을까.’

그래서일까, 라페슈를 보고 있으면 미뉴엘이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오로지 라페슈만 있는 것처럼, 그녀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황자님께서도 외로우실 때가 있나요?”

“…….”

어느새 라페슈는 한 걸음 더 다가서 에사디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실은 저… 친구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 말을 시작으로 라페슈는 묻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수양딸로 받아준 가문에는 감사하고 있지만 아직 대하기가 어렵다, 카르이넨 공작저에 오면 또래인 미뉴엘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등등.

“저, 미움을 산 건 아니겠죠…….”

라페슈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동안 에사디엔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가는 당장이라도 ‘내가 친구가 되어주겠다.’라는 말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말을 마친 라페슈가 다시 금빛 눈을 굴려 에사디엔과 시선을 맞추었다.

“…….”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조금 전 에사디엔이 책을 빼낸 공간의 옆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책이 기어코 넘어졌다.

툭.

결코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둘 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에사디엔?”

그리고 마치 누가 계획한 것처럼 그들 모두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셀레스테 영애.”

둘의 어깨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움찔 떨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미뉴엘의 곁에는 테오도르가 함께 서 있었다.

“손가방을 찾으러 간다더니. 급하게 오페라 하우스에서 나갔다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어요.”

“아, 아무래도 좁은 곳에 있다 보니 머리가 아파져서…….”

“폐소 공포증이 도졌나요?”

“네, 정말이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라페슈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테오도르에게도 사과했지만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에사디엔은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테오가 화를 낸다?’

테오도르는 어지간한 일은 하하 웃으며 넘기는 호인이다. 그가 저런 태도를 취하다니, 보통 마음이 상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잠깐 들으니 셋이서 만난 후 말도 없이 혼자서만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라페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두 분, 함께 오셨나 봐요. 사이가 조금 가까워지셨나요?”

“네, 덕분에요.”

“아, 정말 잘되었네요. 기뻐요.”

“하지만 극 중간에 나와서 아깝게 되었어요.”

“그건 괜찮…….”

선량하게 웃는 라페슈의 말을 미뉴엘이 가차 없이 잘랐다.

“다른 분과 가실 때는 말없이 사라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영애는 이제 오페라를 보러 가지 않을 것 같지만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라페슈는 울상을 지으며 에사디엔을 흘긋 보았다.

‘봐요, 미뉴엘 님은 저를 싫어하신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역성들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미동도 하지 않고 미뉴엘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도 내는군.’

당연히 미뉴엘도 사람이니 그럴 수 있지만 낯선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를 내는 것도 꽃 같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생소했다. 게다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시나마 잊었다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오, 오늘 있었던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잠시 에사디엔의 반응을 기다리던 라페슈는 그만 포기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 좋은 저녁 시간 보내셔요. 저는 이만…….”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라페슈는 천천히 걸어 도서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탁.

닫힌 문에 등을 기댄 라페슈는 고개를 숙이며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아.”

잠시 후 들어 올린 그녀의 얼굴은 아까와는 딴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네.”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한 건 셀레스테 가문에 입적해서 수도로 올라왔을 때까지였다.

꾸역꾸역 연줄을 타고 카르이넨 대공저로 들어와 만난 미뉴엘은 누가 봐도 입이 벌어질 만한 미인이었다. 대공가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잠시 잊었을 만큼.

나름대로 미모에 자신이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친해지고 싶었던 라페슈와 달리 미뉴엘은 이상할 정도로 그녀를 슬슬 피했다.

‘영애께서는 오페라를 좋아하십니까? 다음에 혹시 시간 되시면…….’

지조 없는 테오도르 따위가 들러붙지를 않나.

그러던 중에 우연히 만난 에사디엔은 정말이지 세상을 혼자 사는 미모였다.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며 곁에 있던 미뉴엘마저 가려졌다.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은 이 상황을 두고 일컫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의외였어.’

에사디엔도 테오도르처럼 자신을 보자마자 반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단둘이 남게 되어서 일부러 곁에 달라붙었는데도 갑자기 껴안으며 고백하지 않다니…….

‘역시 술을 먹여야 하는 건가? 취하면 솔직해질 테지.’

그렇게 라페슈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이 얼굴은 그의 어머니를 복사, 붙여 넣기 한 것처럼 닮았다고 했으니 절대 거부하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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