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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1)화 (21/130)

21화

귀족 영양 같지 않게 성큼성큼 걷던 라페슈가 그렇게 생각하며 득의양양한 웃음을 만면에 그렸다.

“아무렴,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인데!”

앞으로는 다 잘 풀릴 거야. 기분이 좋아, 랄랄라!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

언제 나온 것인지 도서실 앞에 선 테오도르가 해괴한 것을 보는 눈으로 멀어지는 라페슈를 지켜보고 있었다.

* * *

“에사디엔.”

라페슈가 나간 뒤, 나는 양손으로 허리를 척 짚었다.

“셀레스테 영애하고 친해졌어요?”

“친해졌냐니.”

에사디엔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로 두 번 봤을 뿐인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가까이 붙어 계시던데요.”

“…….”

톡 쏘아붙이자 에사디엔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뭔데!

옆에서 테오도르가 작게 웃었다.

“황자님, 미뉴엘 양은 지금 질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냉큼 대답했다.

“맞아요.”

“그러시답니다.”

에사디엔은 여전히 의아해 보였다.

“질투?”

그는 왜 내가 질투심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금 슬퍼졌다. 반대의 경우에도 그는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거라는 표현으로 느껴져서.

그런 기분을 떨치려 허리에서 손을 떼고 주먹을 쥐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하고 단둘이 있었는데 당연히 질투하죠!”

“미뉴엘, 그대도 테오도르와 둘이서 오페라를 본 것 아닌가.”

“저희는 친구고요!”

“언제부터?”

얼핏 들으면 에사디엔도 덩달아 질투를 시작해서 추궁하는 것 같지만 그의 표정은 결단코 그렇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일 뿐인 담백한 얼굴. 담담한 어조.

“…….”

맥이 탁 풀린 나를 대신해서 테오도르가 말했다.

“황자님, 미뉴엘 양은 비참하게 차인 저를 불쌍히 여겨 오늘부터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차였다? 셀레스테 영애에게?”

“그렇습니다.”

“테오도르, 넌 좋은 기사인데.”

“미뉴엘 양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하 웃은 테오도르는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그래도 셀레스테 영애를 혼자 보낸 건 경우가 아니군요. 잠시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도서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둘이서 푸는 게 나을 거라는 배려이겠지만 나는 이미 기운을 잃은 상태였다.

에사디엔에게 더 뭐라 하는 대신 몸을 돌려 비척비척 윈도 시트에 가서 앉았다. 불과 며칠 전 에사디엔에게 기대 있던 그 자리였다.

에사디엔은 곧바로 나를 따라왔다.

“미뉴엘.”

“…네.”

내 앞에 선 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코앞에서 그의 얼굴을 봤다가는 바로 화가 풀릴 것이 뻔했으니까.

“책은 반납했다.”

아니, 이 황자가 정말!

얼굴을 보지 않겠다던 생각은 몇 초 만에 무너졌다. 어이가 없어 발딱 고개를 쳐든 내가 사나운 말투로 물었다.

“지금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세요?”

“이제 다시 봐주는군.”

역시 그걸 노렸던 것인지 에사디엔이 나를 똑바로 응시한 채 천천히 몸을 숙였다. 모서리에 팔을 짚은 그가 조용히 말했다.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

“…….”

진지한 사과였다. 그걸 듣고 보니 라페슈에게 질투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내가 너무나 유치하게 느껴졌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에사디엔이 다시 나를 불렀다.

“미뉴엘, 나를 봐라.”

에사디엔은 완전히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몸을 숙이다니. 황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그냥 여기 앉으세요.”

서둘러 에사디엔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자세를 유지한 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과를 받아주겠나.”

“무엇이든 하실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대 말대로다.”

그냥 사과를 받아들인다고만 말하면 되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거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말인데.

그리고 위험한 것은 언제나 그만큼 달콤하다. 그 달콤함에 도취된 나는 평소라면 꾹 참았을 일을 저질러버렸다.

양손으로 에사디엔의 아름다운 얼굴을 살그머니 감싸며 물은 것이다.

“그럼 입 맞춰도 되나요?”

엄지손가락으로 에사디엔의 도톰한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여기…에요.”

순간 에사디엔의 숨결이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번, 바로 이곳에서 그는 정색하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망설이고 있잖아?’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움직였다.

그러기를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뜬 에사디엔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승낙이 떨어지자 오히려 내 기분은 이상해졌다. 굉장히 기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금 생각해 보자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에사디엔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아니에요. 이건 취소.”

“뭐?”

멀어지려던 손이 에사디엔에게 붙잡혔다. 스킨십을 싫어하는 그라면 당연히 안도할 줄 알았는데 왜인지 뚜렷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째서?”

“보상처럼 하는 건 싫어요. 그건 억지로… 읍.”

말랑말랑한 것이 순식간에 말문을 막았다가 떨어졌다.

“어, 지, 지금.”

뭐가 지나갔지!

엄청나게 동요하는 나와 달리 에사디엔은 차분하게 나를 응시하다 다시 한번 얼굴을 내렸다.

이번에는 느릿하게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겹쳐졌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야가 캄캄해진 탓에 다른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에사디엔의 향기, 조금 떨리는 그의 입술,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크게 뛰는 내 심장 소리 같은 것들.

말랑말랑한 입술이 맞닿아 뭉그러질 때마다 눈앞에 작은 불꽃이 하나씩 터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환희의 순간은 짧게 지나갔다. 내 아랫입술을 입술로 지그시 한 번 잡아 문 것을 마지막으로 에사디엔은 얼굴을 떼며 물러났다.

“…….”

“…….”

어색하면서도 열기 어린 침묵이 흘렀다.

에사디엔은 잔뜩 굽혔던 몸을 쭉 펴며 헛기침을 했고 나는 엄청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내가! 에사디엔하고!

‘꿈? 이거 꿈인가?’

손가락 사이를 살그머니 벌려 에사디엔을 훔쳐보았다. 그도 귀가 빨개진 것을 보니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세상에, 내가! 에사디엔하고!

‘진짜 입을 맞췄어!’

여기가 침대 위였다면 베개를 내리치며 오두방정을 떨었을 텐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 지르기를 참는 것뿐이었다.

“미뉴엘.”

흠, 하고 다시 목을 울린 에사디엔이 나를 불렀다.

베개를 때리지 못하는 대신 나는 잔뜩 눌려 있던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에사디엔을 와락 껴안았다.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가뿐히 나를 받아 안았다.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

에사디엔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이미 질투고 뭐고 마음이 다 풀린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용서할게요.”

“고맙다.”

그런 대답에도 에사디엔은 성실하게 용서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몸을 조금 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서 이 말을 자주 전하지 못한 것 같다.

“좋아해요.”

“…….”

에사디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사디엔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반응이 처음과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확연히 거부감을 드러내던 처음과 달리 지금 에사디엔의 눈에는 희미한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 슬픔도 언젠가는 벗겨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에사디엔,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래…….”

그제야 에사디엔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건 그가 내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라 단지 수용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에사디엔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도 더 잘 기다릴 수 있었다.

“왜 그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눈을 피하려는 것처럼 내 머리에 턱을 살짝 얹으며 에사디엔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네?”

“아니다, 아무것도.”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에사디엔은 불안함에 휩싸여 뭔가를 확인하려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다음 날. 사무실에 들어온 라페슈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나를 보고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나는 라페슈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테오도르와 담백한 친구 사이가 되었으니 이제 그와는 결혼으로 엮일 일이 없을 터다. 무엇보다 어제 에사디엔과 함께 있으면서 애정을 잔뜩 충전했으니까.

‘바로 오늘 실연한 사람 앞에서 너무들 하십니다?’

테오도르는 투덜거렸지만 장난인 것을 나도 에사디엔도 잘 알았다.

“미뉴엘 님, 초대장의 답장이 모두 도착했어요.”

“네. 불참하는 분이 있던가요?”

“아뇨……. 아, 스트라우스 가문에서 가주님의 장례식과 일정이 겹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여기, 테이블 배치도요.”

라페슈는 내가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배치도를 건넸다.

그래도 일은 꽤 잘해서 다행이었다. 그것조차 아니었으면 난 도저히 라페슈와 함께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은 라페슈가 내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영애.”

“네?”

“아…….”

무심코 라페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을 뻔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일을 덜면 좋은 거지, 뭐.

“아니에요. 테이블 하나만 빼면 되겠네요.”

스트라우스 가문 건은 테이블 하나를 빼는 대신 다른 테이블의 간격을 넓히는 것으로 해결했다.

조문에 대해서 집사에게 일러두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군요.”

황제는 귀족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지만 가장 먼저 초대장을 받고 또한 가장 마지막으로 초대장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다.

특히 두 번째로 초대장을 보낼 때는 결혼하는 커플이 함께 방문해서 직접 황제에게 바쳐야만 했다. 양가 부모 외에도 황제에게까지 결혼 허락을 받는 셈이었다.

‘굳이 결혼까지 간섭해야만 하나 싶지만.’

귀족의 결혼은 가문 간의 결합인 것도 사실이다.

지금이야 그저 절차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예전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며 황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탄생하지 않도록 했다는 모양이다.

쥬엘라 언니에게 일정을 전달하자 언니는 뭔가 바삐 써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우리를 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 벌써 그렇게 됐구나.”

이제는 정말로 결혼식이 가깝게 다가왔다.

예비 형부는 이미 대공저로 짐을 옮겼고 연회장은 결혼식 전날 도착할 생화 장식만 기다리고 있었으며 드레스도 거의 완성 단계였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셀레스테 영애. 미뉴엘, 너도.”

“아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마지막 손님까지 돌아가고 마무리가 될 때 끝나는 것이다. 이건 연회를 준비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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