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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2)화 (22/130)

22화

“후후, 제법인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 줬어.”

“다 플렌드나 님 덕분이지.”

봄이면 돌아오는 대제전 때마다 플렌드나 신전에서도 연회가 열렸다.

사도님이며 고위 성직자들, 다른 나라의 고위 귀족들까지 방문했기에 신전에서 수학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연회를 주최하는 데 도가 텄다.

어느 나라의 예법에도 어긋나지 않는 접대,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플렌드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만한 차림과 꾸밈새.

결혼식 준비는 처음이었지만 신전에서의 연회 준비와 몇 가지 다른 점을 익히니 금방이었다.

“그러네. 플렌드나 님께 감사할 점이 또 있었어.”

내게 웃어 보인 쥬엘라 언니가 라페슈에게 혹여 아쉬웠던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뇨, 저는 여기에 들어온 것만 해도 너무너무 꿈만 같은걸요. 하지만…….”

“하지만?”

“쥬엘라 님이나 미뉴엘 님과는 그다지 가까워지지 못한 것 같아 그게 아쉬워요…….”

라페슈가 수줍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 맘대로 우리 언니 이름을 부르는 거야.’

나와 가까워지지 못했다는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쥬엘라 언니는 순식간에 떨떠름해진 내 표정을, 다음으로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흘긋 보고는 말했다.

“그렇게 느꼈다니 애석한걸. 모레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갈 텐데, 셀레스테 영애도 함께 가지요. 황성에 대해서도 궁금할 테니.”

“와아, 정말 감사합니다!”

라페슈는 두 손을 맞잡으며 감격한 듯 외쳤다. 사랑스럽기는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미뉴엘, 너도. 폐하께서 널 보면 좋아하실 거야.”

“알겠어.”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황제는 나를 굉장히 예뻐해 주었는데 생각보다 오래 얼굴을 비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잘됐다. 모처럼 뵐 수 있겠네.’

물론 황성에 들르는 김에 겸사겸사 에사디엔도 보고 오려는 심산도 있었다.

* * *

이틀 후,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황성에 방문한 라페슈는 엄청난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마야?”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라페슈의 얼굴 곳곳을 뜯어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오래전 잃은 여동생을 너무나도 닮았군.”

황제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야 로콰이트. 에사디엔의 어머니이자 황제가 지극히 아끼던 여동생.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라페슈가 폐황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했어.’

라페슈는 흔들리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안과 흥분이 마구 뒤섞인 얼굴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에사디엔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뚜렷한 기쁨이 느껴져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장을 잘 찍어두고 운이 좋으면 좋은 줄까지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지.’

라페슈가 처음 대공저에 들어왔던 날, 쥬엘라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라페슈는 정말로 신분 상승을 원하는 걸까?’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황제와 함께 나와 있던 시종장은 우리를 접견실이 아니라 황제며 황태자, 에사디엔이 매주 모여 차를 마시는 곳으로 안내했다.

‘나도 두어 번 와보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왔어도 변한 것이 없는 내부를 둘러보며 생각하던 나는 잠시 움찔했다.

‘설마 내가 온다고 특별 대우해 주신 건 아니겠지.’

눈치를 살폈지만 황제는 평소처럼 허허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시종들도 놀라는 기색 없이 매끄러웠다.

그럼 그렇지. 자의식 과잉이었다.

“아아, 잠깐. 시종장.”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차를 준비하려는 시종장을 황제가 만류했다.

“예, 폐하.”

“오늘 차는 셀레스테 영애가 우린 것으로 마시고 싶군.”

“하오나, 폐하.”

황제가 독에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종장은 언제나 그가 먹고 마시는 것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한다고 들었다.

특히 차는 여러 통에 잎을 섞으며 독을 넣을 가능성이 커 시종장만 우린다고도.

“괜찮네. 영애, 내게 차를 한 번 대접해 줄 텐가?”

“네? 저요? 아, 네. 네!”

황제가 직접 청하는데 거부할 수 있을 리 없다.

라페슈는 벌떡 일어서기는 했지만 굉장히 자신 없는 얼굴이었다.

‘으음. 조금 불안한데.’

아니나 다를까. 차를 우려본 적이 없는지 라페슈는 자잘한 실수를 많이도 저질렀다.

우리는 그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그쪽을 최대한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맛은 예의로 덮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거, 아마도 집에 있는 거하고 같은 찻잎일 텐데…….’

다들 형식적으로 찻잔을 입에만 댔다가 아무 말 없이 내려놓았고 라페슈도 맛을 보았다가 서둘러 설탕을 퐁당퐁당 담가댔다.

오로지 황제만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 이건 마야와 딴판이구나. 그 아이는 일곱 살 때부터 자기가 우린 차가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지.”

그 정도라면 에사디엔의 어머니는 세기의 티 마스터임이 분명했다.

“자, 그러면 약속한 것을 받아볼까. 물건은 준비됐나?”

무슨 밀거래하는 마피아 같은 말투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라페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떨리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받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반면 언니와 기디온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제는 이미 받아보았을 초대장을 펼쳐 다시 한번 신중히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응? 그런데…….’

황제의 답을 기다리는 사이 조금 이상한 느낌이 스쳤다.

‘라페슈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라페슈가 순진한 눈으로 생긋 웃어 보였다.

‘설마. 이것도 착각이겠지.’

“자. 그러면 선언을 해볼까.”

내내 장난스러웠던 황제의 얼굴이 비로소 진지해졌다.

“나, 황제 알렉시오스 아모단 로콰이트는 유서 깊은 두 가문의 결합을 축복한다. 쥬엘라 카르이넨과 기디온 파로이의 혼인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노라.”

“감사드립니다.”

“서로 돕고 보듬으며 살겠습니다.”

담백한 쥬엘라 언니와 달리 기디온은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 그 모습에 모두 크게 웃었다.

“하하하, 카르이넨 대공가에 공처가가 한 명 더 늘어나는구나.”

흐뭇하게 웃던 황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에사디엔도 이처럼 잘해야 할 텐데 말이다.”

갑작스럽게 화제가 에사디엔 쪽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내게 시선을 돌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 에사디엔은 언제쯤 데려가 줄 생각이냐.”

이거 빨리 결혼하라는 뜻이지?

나는 방긋 웃으면서도 말끝을 흐렸다.

“저야 물론…….”

‘당장이라도 하고 싶죠.’

결혼하면 에사디엔도 카르이넨의 사람이 된다. 이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황자는 그를 쉽게 노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사디엔의 생각은 어떨까?

게다가 우리 언니들도 문제였다. 지금도 바로 내 맞은편에 앉은 쥬엘라 언니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도 참. 모두의 마음이 모이고 때가 맞아야 혼인을 한다고, 제가 결혼하기를 청할 때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원에 면한 유리문을 벌컥 열며 들어온 황태자가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황제의 호탕한 면을 쏙 빼닮은 사람이었다.

“어험, 그때야 그때고…….”

“국정을 살피는 사람은 언제고 태도가 변하면 안 된다고 하신 분도 폐하십니다.”

“에잉, 쯧.”

기억이 확실히 나는지 황제는 더 반박하지 않고 혀만 찼다.

황태자는 씩 웃으며 나와 쥬엘라 언니의 어깨를 차례로 두들겼다.

“둘 다 정말로 오래간만이구나. 미뉴엘, 너는 폐하 말씀에 부담 느끼지 말고. 쥬엘라는 정말로 축하한다.”

“어머, 황태자 전하. 말로만 축하하시면 섭섭하지요.”

황태자는 큰언니와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 사이니만큼 쥬엘라 언니도 자주 함께 어울렸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서로를 대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녀석. 물론 준비한 게 있으니 기대하시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겠사옵니다.”

작은 웃음이 흘렀다.

잠시간 더 대화를 나눈 후 슬슬 일어나려는 우리를 황제가 붙잡았다.

“잠시만 기다려보게나.”

“하명하십시오.”

“이것은 개인적인 부탁이네만……. 셀레스테 영애, 시간이 나면 황성에 들러 이 늙은이의 말벗을 해주겠나?”

아직 쌩쌩한 중년이시면서 늙은이라고 하시기는.

그나저나 라페슈는 정말로 엄청난 줄을 잡았다. 여동생의 아들인 에사디엔을 황자로 들였다는 데서 알아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얼마나 폐황녀를 아꼈는지.

“그러면 제 시녀로 들어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황태자가 제안했다.

“네 시녀 말이냐.”

“예. 제 시녀 중 한 명이 아이를 가져서 그녀가 쉬는 동안 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일단 팔 개월 정도 시녀로 두어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생각나실 때 불러 보시기 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나야 좋다만 영애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지.”

라페슈는 사람들의 시선에 살짝 주눅이 든 것 같으면서도 몇 분 사이 적응했는지 떨지 않고 대답했다.

“저야 가문의 영광입니다만, 지금은 카르이넨 가문에서 일을 돕고 있어서…….”

“이런, 셀레스테 양.”

쥬엘라 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쪽은 마무리 단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가 왔는데 붙들 정도로 우리가 야박하지는 않답니다.”

“하, 하지만 미뉴엘 님께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그거야 가족이니까 하는 말이었지요. 도우러 와준 셀레스테 양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 부담 느끼지 말아요.”

언니는 후후 웃으며 황태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 황태자 전하, 앞으로 셀레스테 양을 잘 부탁드립니다. 총명하고 배우는 것이 빠른 영애였답니다.”

“짐이 사람을 뺏은 것 같아 괜히 미안하군. 공녀, 그대가 섭섭하지 않을 결혼 선물을 보내도록 하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리저리 오가며 척척 진행되는 이야기에 나는 한마디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이제는 라페슈를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그거야 그렇지만…….

마주 보고 있던 에사디엔과 라페슈의 모습이 머리에 새겨 넣은 듯 잊히지 않았다. 아무리 라페슈가 그의 어머니를 닮아서라고 생각하려 해도…….

‘불안해.’

일행들이 나를 황자궁에 내려주고 돌아간 후에도 나는 조금 우울했다.

황성은 매우 넓었고 에사디엔은 황자궁을 거의 벗어나지 않으니 라페슈와 마주칠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왜 이토록 불안한 것일까.

“미뉴엘?”

시무룩하게 안쪽 응접실로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내실 문이 열리며 느슨한 옷차림의 에사디엔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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