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훈련 후 씻었던 모양인지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의 색이 평소보다 조금 짙었다.
크라바트도 매지 않고 단추를 두어 개 풀어둔 셔츠 사이로 어른어른 비치는 살결이 꽤 므흣, 아니 흐뭇했다.
‘오오오……. 오랜만에 근육……!’
더 보고 싶었는데 에사디엔은 나를 안내한 시종에게 도끼눈을 뜨며 서둘러 단추를 잠가버렸다.
너무 열중해서 봤나.
“에이… 너무해요.”
“대체 무슨 소리인가.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나올 테니 잠시만 앉아 기다리도록.”
시종은 눈총을 받자마자 웃으며 자리를 피한 후였다.
이제 둘뿐인데 에사디엔은 정말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인지 바로 몸을 휙 돌렸다.
“에사디엔.”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늘따라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곁에 있으면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금방 돌아오겠다.”
“싫어요.”
돌아보는 에사디엔에게 살짝 벌린 팔을 내밀어 보였다.
“보고 싶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에사디엔은 내가 계속 팔을 벌리고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와 안아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거 꿈도 못 꿨을 텐데.’
에사디엔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서야 비로소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옷 갈아입는 거,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거절하지.”
하지만 거절은 칼로 숭덩 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졸랐다.
“너무해요. 그럼 이대로 있어요.”
“그건 예의가 아닌…….”
“오늘만요. 안 그러면 놓아드리지 않을래요.”
곤란해하는 말을 끊으며 협박하자 머리 위에서 허, 하고 짧은 숨이 터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에사디엔과 눈을 맞추며 방싯 웃었다.
“네? 에사디엔.”
“도무지 이길 수가 없군. 알았다.”
이제는 긴 소파에서 에사디엔에게 기대앉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도, 나도.
에사디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긴 숨을 내뱉자 그가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 있나, 미뉴엘.”
“왜요?”
“그저 그대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불안해 보여서.”
놀라움도 잠시, 기쁨이 잔잔하게 물결치며 가슴에 퍼졌다.
‘에사디엔도 나를 보고 있었어.’
일방적이던 내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그의 시선을 내게로 당겨놓았다.
“손잡아 주세요.”
조심스레 펼친 큰 손이 내밀어졌다. 나는 에사디엔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밀어 넣고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오늘 쥬엘라 언니가 황제 폐하께 결혼 재가를 받았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에사디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가 영영 떠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한가. 자매들은 그런 것을 느끼고는 한다던데.”
“아뇨. 어차피 한집에서 사는데요, 뭘.”
“그러면.”
“셀레스테 영애가 황태자 전하의 시녀로 들어가게 됐어요. 폐하께서 영애를 가까이 두고 보고 싶다 하셨거든요.”
이유는 에사디엔도 알고 있을 터다. 황제가 첫눈에 보고 놀랐다면 그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
“그렇…군.”
역시나 대답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정말 라페슈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또다시 속에서 불안감이 몸집을 불리며 요동쳤다. 에사디엔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감이었다. 오늘 했던 착각들처럼 이것도 그저 착각이라면 좋겠다.
조급해진 나는 에사디엔에게 기댔던 몸을 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사디엔, 우리는 언제 결혼해요?”
“폐하와 대공이 먼저 합의를 하셔야겠지.”
“황제 폐하께서는 빨리하기를 바라세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
에사디엔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조급한 나를 탓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은 상관없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이번만큼은 에사디엔의 눈빛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잃고 싶지 않아.’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내게 익숙해진 에사디엔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를 안아주는 단단한 품도, 머리를 기대면 내 쪽으로 기울여주는 넓은 어깨도. 가끔 나를 보며 귓가를 붉히는 모습도, 이름을 불러주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도.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닌 라페슈를 향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솟으며 다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에사디엔…….”
숨을 길게 내쉬며 좋지 않은 생각은 모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만큼 더 꼭 에사디엔의 손을 쥐었다.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나한테 와요.
“…….”
여전히 말이 없는 에사디엔에게 나는 내 온 마음을 끌어모아 내밀었다.
“사랑해요.”
그 순간, 표정을 읽을 수 없던 에사디엔의 얼굴에 뚜렷한 균열이 일었다.
찡그린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에 나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에사디엔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 * *
에사디엔은 최근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잦았다.
‘에사디엔.’
여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부르는 것 같아 확 돌아보면 그를 몇 번이나 부르다 지친 시종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긴 소파 모서리에 털썩 앉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요.’
올곧게 에사디엔을 바라보던 눈, 확신에 찬 단단한 음성. 그의 어깨를 살며시 짚던 무게감까지 모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도 그는 의문이었다. 미뉴엘은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그녀의 연인도 분명 서로 그런 말을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떠났고 남은 것은 입에 담기에 좋지 못한 것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사디엔은 미뉴엘에게 솔직히 질문한 것을 후회했다. 상처받았음이 그대로 드러나던 눈과 살짝 벌어졌다가 떨리며 닫히던 입술까지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다.
“후우.”
에사디엔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자궁 이곳저곳에는 미뉴엘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계속해서 그녀에 대한 생각만 하게 될 것 같았다.
“어디 가십니까? 황자님.”
“산책. 따라올 필요 없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하다. 괜찮으니 따르지 마라.”
당장 수행하려는 시종들을 말리고 에사디엔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용서할게요.’
하지만 목소리는 또다시 들려왔다.
‘바깥에 나오기까지 했는데. 이번에는 대체 왜?’
눈썹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이자 그제야 주변의 소음이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는…….”
도서관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에사디엔 주변으로 자료를 신청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사서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가 코끝에 닿자 반사적으로 카르이넨 대공저의 도서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 이런.’
얼굴이 순식간에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동시에 에사디엔은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에서 빠져나왔다.
사실 에사디엔은 그때까지만 해도 미뉴엘과 그런 접촉을 할 생각이 없었다.
성인식이 지나기 전에는 허튼짓하지 말라는 황태자의 으름장도 으름장이지만, 누구보다도 에사디엔 자신이 결혼 전에는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 입 맞춰도 되나요?’
말간 눈으로 그렇게 도발할 때는 언제고.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생각 끝에 수락했건만 취소란다. 무슨 보상처럼 하는 건 싫단다.
좀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에사디엔도 그때만큼은 순간적으로 발끈해서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괜찮, 았던 거겠지. 미뉴엘도.’
와락 안겨오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듯하다.
“싫다고 했으면서.”
아직도 미뉴엘은 에사디엔에게 너무도 어렵고 조금은 원망스러운 상대였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는데…….”
미로 안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왜 누군가가 계속해서 떠오르는지. 왜 그 자신이 상처 입는 것보다 상대의 아픔이 점점 더 신경 쓰이는지.
에사디엔은 그 이유를 몰랐다. 아니, 스스로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모두 마음속 외딴 탑에 몰아넣고 열쇠를 쥐고서도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
그것이 에사디엔이었다.
“어머, 황자님. 여기서 이렇게 뵙네요.”
그때였다. 가벼운 목소리가 멀거니 하늘을 보던 에사디엔에게 인사를 건넸다. 흘긋 돌아본 그의 눈에 장미만큼이나 붉은 곱슬머리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라페슈가 황태자의 시녀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미뉴엘에게서. 그리고 아무래도 그녀는 라페슈를 영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황자궁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으니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셀…….”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던 에사디엔은 그러나 그 생각도, 심지어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잊고 몸을 움찔 떨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라페슈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에사디엔의 머릿속을 가득 점거하고 있던 미뉴엘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황자님?”
그리고 마침내 라페슈가 에사디엔의 앞에 멈춰 서서 그를 불렀을 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마저도.
오랜만에 맞는 조용함이었다.
“도서관에 다녀오시는 길이셔요? 직접 책을 고르시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하지만 고요함을 반갑게 여긴 것도 잠시. 지난번 라페슈와 마주쳤을 때 에사디엔을 동요시켰던 감각이 고스란히 다시 찾아들었다.
들러붙는 듯한 단내, 억지로 박자가 어긋나게 뛰는 것 같은 심장.
“아아. 셀레스테 영애는 황태자 전하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다.”
“네에. 지금은 황제 폐하께서 부르셔서 갔다가 조금 일찍 퇴근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아서요.”
그 한마디로 에사디엔은 라페슈가 받는 취급을 알 수 있었다.
‘어지간히 누님의 마음에 들지 못했나 보군.’
에사디엔의 어머니를 끔찍이 귀애했던 황제는 라페슈를 보며 동생과의 추억을 떠올리려 했을 터다.
하지만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의 시녀로 들이기에는 배운 것이 없었다. 본궁 시녀는 다들 외궁에서 최소한 삼사 년 이상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자꾸 황제가 자작가로 사람을 보내 라페슈를 불러들이면 괜한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다.
‘그걸 예상하신 누님께서 핑계를 대고 적당한 자리에 집어넣으셨을 테지.’
“황자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다.”
“아까 한숨을 쉬고 계시던걸요.”
“음.”
어느새 그들은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혹시 미뉴엘 님 때문에 그러세요?”
에사디엔은 여전히 대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라페슈는 어쩐지 감이 온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두꺼운 벽이 느껴졌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공략하기 쉬워 보였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머리를 맞대면 쉽게 풀린다던데요? 그리고 저, 미뉴엘 님하고 친하거든요.”
“지난번에는 미움을 샀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이제 친해졌어요.”
“그런가.”
그러나 에사디엔은 여전히 미심쩍게 여기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