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라페슈의 이마 한쪽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에이, 아니에요. 지난번에 제가 실수한 뒤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많이 친해졌는데……. 미뉴엘 님은 수줍음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러신 걸 거예요.”
“그런가.”
수줍음이 많다? 에사디엔에게는 그 말이 어색했다.
‘미뉴엘에게 수줍음이 많았던가?’
분명 처음 만난 날 그에게 잘생겼다고 대놓고 말했다. 약혼자라는 게 기쁘다고도 했는데.
‘오히려 적극적인 편 아니던가.’
표현이든, 스킨십이든.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미뉴엘 생각을 하는데도 심장이 미친 듯 뛴다거나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번과… 같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라페슈가 곁에 있었다. 그렇다면 셀레스테 영애에게는 미뉴엘에 대한 이야기를 편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자꾸 라페슈에게 시선이 닿으려고 하는 건 불편했지만 어차피 대화할 때는 상대와 마주 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일단은 미뉴엘의 친구라고 했으니.
“그러면 함께 내 궁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겠나.”
“어머, 영광이에요.”
라페슈가 거절할 리 없다.
황자궁으로 향하는 내내 에사디엔은 말이 없었지만 라페슈는 들뜬 마음을 누르느라 바빠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삼황자궁에 들어와 보는구나!’
화려함의 극치인 황태자궁이나 황제의 본궁과 달리 황자궁은 상대적으로 장식이 적고 깔끔했다. 눈에 띄거나 요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에사디엔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시종은 에사디엔이 웬 여자를 데려오자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다만 그가 안내한 곳은 미뉴엘이 에사디엔과 시간을 보내던 안쪽의 개인 응접실이 아닌 바깥쪽 입구에 가까운 응접실이었다. 라페슈는 그것을 모른 채 싱글싱글 웃었다.
하지만 에사디엔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는 억지웃음만 겨우 남아 얼굴에 매달려 있었다.
‘뭐야, 이거. 쌍방 삽질이야?’
아니, 아니다. 미뉴엘은 에사디엔을 좋아하는 마음을 서슴지 않고 드러냈다. 과거의 망령에 얽매여 삽질하는 건 에사디엔 혼자였다.
‘하, 참. 미뉴엘… 좋은 건 혼자 다 주워 먹는구나.’
처음에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계속 거부당하다 보니 라페슈의 마음도 비틀렸다.
한쪽만 일방적인 관계는 지치게 된다는 건 라페슈와 미뉴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게다가 에사디엔에게 욕심을 가진 이상 이제 라페슈는 미뉴엘을 순수하게 좋아할 수 없었다.
‘제국 최고의 가문, 엄청난 부, 미모를 가졌으면서 에사디엔까지 쉽게 손에 넣다니.’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라페슈로서는 솔직히 말해 배알이 뒤틀렸다.
‘어디 마음고생 좀 해보라지.’
사이가 틀어져서 에사디엔이 내게 오면 더 좋고.
그렇게 생각하며 라페슈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도와준다?”
“황자님께서는 먼저 본인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러려면…….”
라페슈는 순수해 보이는 웃음을 흠뻑 머금었다.
“당분간은 미뉴엘 님을 만나지 마시고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지셔야겠네요.”
* * *
“디엔, 내가 놀라운 소식을 하나 들었다.”
“무엇입니까, 폐하.”
예의 티타임이었다. 황태자는 미룰 수 없는 일정 때문에 잠시 황성 밖으로 출타한 상태. 황제와 에사디엔,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셀레스테 영애를 황자궁으로 초대했다고.”
“예.”
에사디엔은 놀라지도 않고 긍정했다. 황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 중 황제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혹시 셀레스테 영애에게 마음이 가더냐?”
“예?”
“요즘 우리 아가가 통 입성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아닙니다. 미뉴엘은…….”
사랑한다고, 했다.
욱신.
그때를 떠올리자마자 라페슈를 만나고 조용해졌던 가슴에 둔통이 일었다.
‘이건 죄책감인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에사디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뉴엘은 바쁩니다. 둘째 공녀의 결혼식이 코앞이지 않습니까.”
황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마음이 뜬 것 같지는 않거늘.’
하지만 은둔자에 버금가는 에사디엔 녀석이 누군가를 자신의 궁에 초대했다. 심상하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셀레스테 영애는?”
“물을 것이 있어 잠시 만났을 뿐입니다.”
황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이쯤 해야겠군.’
다 자란 녀석의 인간관계를 너무 캐묻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이미 캐물었다는 자각도 없이 황제는 그리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셀레스테 영애 말이다.”
“예.”
“다소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더냐.”
이상한 점이라. 에사디엔은 들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혹시 폐하께서도 느끼신 것인가.’
라페슈와 마주하면 찾아드는 고요함. 이유 모를 끌림.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분이 못내 걸렸다. 그래서 에사디엔은 짐작되는 다른 이유를 내놓아 보았다.
“어머니를 많이 닮아 그러십니까.”
“그래서 눈이 가기는 했다만. 사람이 닮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점 위치까지 닮은 건 기묘할 정도기는 해도.”
하지만 마야와 닮은 것은 얼굴뿐. 다른 부분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아무튼. 그 영애가 자작가로 입양된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게 들었습니다.”
“영애에게 큰 도움을 받은 셀레스테 자작이 입적한 거라고 하더구나.”
이상한 점은 그것이다.
셀레스테 자작은 작은 상회를 여럿 가진 부호다. 하지만 남부 사막 지대에서만은 고전하던 중 라페슈의 조언으로 몇 가지 아이템에 집중하면서 상승세를 탔다.
사막 도적들의 약탈도 예측하여 피해를 줄였다고 했다.
“사막 경계 지역에서 자라 이해가 깊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쎄다.”
이것저것 떠보았지만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라 차라리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자작과 처음 만났을 때도 살롱에서 그리치오의 시를 읊어 시선을 끌었다고 했지.”
그리치오는 로프제의 제자이며 엔티클로의 스승인 시인이다. 스승이며 제자보다는 명성이 덜한데 셀레스테 자작은 마침 그리치오를 더 애호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자작의 눈에 들게 되었다는 라페슈는 로프제며 엔티클로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데 자작에게 추천했다는 물건들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박또박 말하더구나.”
‘마치 외운 것처럼.’
황제는 그 말까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에사디엔은 곧바로 알아챘다. 자신과 같은 이유가 아니라 내심 실망한 채 듣던 그의 낯이 굳었다.
“폐하, 그 말씀은…….”
“음.”
계속해 보라는 듯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스테 영애가 치트룸의 간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막 너머의 국가, 치트룸. 제국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물론 경계 지역 백성들이 도적질하는 것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곳이었다.
“영애는 자작가로 들어가기 전 템페스트 남작가의 적녀였다. 모종의 이유로 치트룸에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 다만.”
황제는 다시 팔걸이를 두들겼다.
그러기를 잠시.
“‘불의 교단’에 대해 들어보았느냐?”
“테오도르가 말한 적 있습니다. 사막 도적뿐만 아니라 그 교단에서도 조금씩 문제를…….”
에사디엔의 낮은 목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혹시.”
“그래. 짐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
불의 교단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불 자체를 숭배한다는 단체였다. 그것만으로도 분란 거리인데 불에 공양한답시고 방화를 저지르고 다니니 더더욱 문제였다.
당연히 황제는 곧바로 불의 교단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그에 저항하는 것과 별개로 특권층에 교세를 늘려야겠다는 생각도 당연히 할 법했다.
“그래서 네게 관찰을 맡겨볼 생각이다. 때마침 네가 영애와 가까워진 듯하니…….”
“잠시 대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래. 우리 아가는 뭐라 할지 모르겠다만.”
“폐하!”
황제는 껄껄 웃었다. 침착한 녀석은 놀리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었다.
“이만 물러가라. 누설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에사디엔은 마음을 다해 말했다.
황제도, 황태자도 어머니에게 학대당했던 그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이만큼 자라게 해주었다.
언제건 은혜를 갚고 싶었다.
‘어떻게든 파헤치겠다.’
그렇게 다짐한 에사디엔이 나가고 얼마 후. 황제는 문득 이마를 치며 개탄했다.
“아, 이런.”
“미편하시옵니까, 폐하.”
“아니다.”
황제는 곧바로 반응하는 시종장에게 손을 내저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가에게는 말해도 좋다고 할 것을.’
카르이넨의 둘째 공녀는 제국의 상권을 주도하는 거대 상회의 주인. 충분히 도움을 기대할 법했다. 물론 누설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미뉴엘은 논외였다.
‘설마하니 그 정도 융통성은 있겠지.’
이때까지만 해도 황제는 미처 몰랐다. 에사디엔이 그의 상상 이상으로 고지식한 놈이라는 사실을.
* * *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날씨도 맑고 장식도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건 우리 언니였다.
“언니, 정말 잘 어울려. 입으니까 더 예쁘네.”
“우리 막내가 잘 골라줘서 그렇지.”
첫째 엘가 언니는 후계자이기 때문에 북부의 본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정말 추웠는데.’
겨울이었고 평년보다 추운 해였다. 몸이 약하지만 추위에는 강한 편인 나도 덜덜 떨 정도였다.
그래도 눈 내린 풍경과 붉은 장식이 어우러져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여름.’
햇빛이 쨍쨍하단 말씀. 게다가 둘째인 쥬엘라 언니는 그런 전통에서 자유롭다. 때문에 그대로 로콰이트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머, 황실 마차예요.”
“황실에서 선물이 왔는가 보군요.”
창문가에 있던 손님들의 대화 소리에 에사디엔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어떡하지.’
나는 바짝 긴장했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진 후로 처음 보는 에사디엔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하지.’
오늘이 언니의 결혼식이라 다행이었다. 내가 에사디엔에게 달라붙지 않고 얌전히 있어도 가족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삼황자님께서 오셨군요. 참 잘 자라셨어요. 뵐 때마다 놀란다니까요.”
“호호, 저도 그래요. 음? 그런데 저 빨간 머리 영애는 누구지요?”
…라페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창가 쪽으로 향한 귀만 세 배는 커진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입매를 가리려고 일부러 물을 들이켰다.
“누구기에 황자님께서 저렇게 에스코트를. 막내 공녀와 약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어머. 트레고스난 경도 함께 오셨네요.”
창가의 귀부인들과 나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가 같이 있었다면 조금 안심이지만…….’
이상했다.
‘라페슈는 오늘 결혼식에 참석하니까 황성에 들어가지 않는 날일 텐데.’
어째서 에사디엔과 함께 황실 마차를 타고 나타난 걸까. 의문을 가지자 갑자기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입 안이 꺼끌꺼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