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카르이넨 영애, 파로이 영식.”
장내로 들어선 에사디엔이 쥬엘라 언니와 기디온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잠시 에사디엔이 내 쪽을 바라보며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두루마리를 펼쳐 언니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시는 축하 선물입니다.”
황제와 황태자는 호언장담한 대로 엄청난 선물을 보냈다. 황제는 루비 광산을, 황태자는 한 손에 쥐기도 버거운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깎아 만든 잉크병을.
“정말이지 통이 크시네요.”
“황실과 대공가 사이가 어떤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겠지요.”
다들 감탄하며 박수를 쳤지만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가기만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좋은 날이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라페슈는 만개한 꽃처럼 웃었고 그녀를 대하는 에사디엔의 태도도 퍽 정중했다.
‘나한테는… 내 고백은 그렇게 뻥 차놓고서.’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에사디엔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귓가에는 그간 쌓아 올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심하게 아팠다.
“미뉴엘, 표정 풀어.”
“…….”
“미뉴엘.”
“어? 응?”
뒤쪽에서 작게 말해 준 라망드 덕분에 비로소 숨을 길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앞에 나서서 에사디엔을 상대하는 쥬엘라 언니를 제외하고, 다른 가족들이며 파로이 집안사람들이 모조리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그렇게 티가 났나.’
부끄러워져서 볼이 달아올랐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 보이자 비로소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잘했어. 이따 끝나고 나면 얘기 실컷 들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응?”
라망드가 속삭이며 작게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은 건 알지만 힘을 내라는 뜻이었다.
“…응.”
라망드의 손에서 청량한 신성력이 물씬 밀려들어 왔다. 그 힘이 열기를 가라앉히고 나서야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마워, 라망드.”
차분함을 되찾자 다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더불어 내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장하다, 우리 미뉴엘.”
보랏빛 눈이 아름답게 휘었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세상에서 제일.”
어라라. 플렌드나 님의 자식은 모두 아름답기 마련이라고만 하던 녀석이 웬일인지 모르겠다.
“야, 그래도 우리 언니보다 예쁘면 안 되거든?”
톡 쏘아붙였더니 라망드는 어깨를 들썩이며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신부는 논외지.”
“그럼 인정.”
그렇게 말하며 키득키득 웃어대자 라망드가 안심한 듯 말했다.
“이제야 좀 낫네. 그럼 나는 저쪽으로 가볼게. 황자님 오신다.”
그렇게 말하며 라망드가 떠난 자리. 바통을 넘겨받듯 에사디엔이 와서 팔을 내밀었다.
라페슈는 셀레스테 가문의 자리로 가서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간혹 이쪽으로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미뉴엘.”
에사디엔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의 팔에 손을 올리지 않자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뿐. 올려다본 에사디엔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기만 했다.
“아직 이동할 것도 아닌데요. 괜찮아요.”
나는 일부러 방긋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라페슈와 함께 온 이유를 물어볼 뻔했지만 다행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런가.”
아름다운 바닷빛 눈동자가 꾹 다물린 내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에사디엔과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텐데. 참 이상했다.
‘아……. 또 열받는 것 같아.’
당장 에사디엔의 멱살을 잡고 추궁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멱살은커녕 그에게 매달린 꼴이 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조금만 참아. 응?’
하지만 나를 다독이던 라망드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나는 가까스로 말을 돌릴 수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닌 듯한데.”
“아닌데요. 안부 물으려고 한 거 맞아요.”
“그런가. 알겠다.”
뭐가 ‘알겠다’야. 대체 뭐가.
속이 부글거렸지만 억지로 잡아 누르며 속속 도착하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 이제 슬슬 다른 준비를 해야 해서요. 황자님께서는 저쪽 상석에 앉으시면 돼요.”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고 쥬엘라 언니와 기디온이 입장할 때, 그 앞에서 꽃을 뿌릴 아이들을 준비시켜야 했다. 자리를 뜨기에는 참 좋은 핑계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에사디엔을 대화 중인 엘가 언니와 테오도르 쪽으로 밀어두고 나왔다.
“휴우.”
“미뉴엘.”
“헙.”
그런데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던 에사디엔이 곧장 나를 쫓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왜 따라와?’
오늘따라 에사디엔이 낯설게 느껴졌다.
발을 조금 더 빠르게 놀려봤지만 보폭 차이가 나니 붙잡히는 건 금방이었다.
“미뉴엘.”
사람 없는 복도에 우리 둘의 발소리와 함께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왜 나오셨어요?”
“역시 화났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그래. 이유를 알면서 그런 건지 들어나 보자.
“그대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고…….”
뭔가 말을 덧붙이려던 에사디엔이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보고? 그리고요?”
보고서? 보고타? 아니면 ‘복어’를 잘못 들은 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에사디엔은 답해 주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니다. 아무튼, 왜 화가 났지.”
그냥 다 말해 주면 안 되는 걸까. 평소였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제 화를 낼 기력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글쎄요. 화가 났다기보다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어째서. 기쁜 날이 아니던가.”
“네. 맞아요. 기뻐요, 엄청.”
싱긋 웃어 보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놓칠세라 에사디엔이 서둘러 옆에 따라붙었다.
“그런데 왜…….”
“황자님.”
나는 에사디엔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조용히 말했다. 그가 다가오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막았다.
“황자님은 제 마음을 밀어내셨어요. 그러고는 오늘 황성에 갈 이유도 딱히 없었던 셀레스테 영애를 만나서 함께 오셨죠.”
꼭꼭 씹어 먹듯 말했다.
“약혼녀인 제 앞에서 테오도르도 아닌 전하께서 직접 에스코트하셨고요.”
“…….”
“그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이유가… 이유가 있었다.”
그렇겠지.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
“네. 미리 제게 말씀하실 수도 없는 이유였겠죠. 그렇죠?”
“…….”
또 말이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황자님은 언제나 그러셨지요. 제게 전부 보여주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에사디엔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그가 나로 인해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든 순간 나는 더 이상 모르는 척, 보이지 않는 척할 수 없었다. 에사디엔의 마음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이제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내 마음은 처음부터 커서 더는 자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죄송해요. 이유가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도저히 황자님의 마음이 제게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네요.”
“미뉴엘, 그대는…….”
흔들리는 눈으로 내 눈빛을 감내하던 에사디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사이로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너무 빠르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워.”
에사디엔의 말 뒤로 예전에 들었던 말이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그대가 내게 보이는 것만큼의 감정을 돌려줄 수 없다.’
가랑비에 옷 젖듯? 다 착각이었다. 우리 관계는 그때부터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거였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말해도 에사디엔은 메아리를 돌려주지 않았다. 스펀지처럼 흡수하기만 했다.
‘처음부터 깨달았어야 했는데.’
나는 비틀거리려는 몸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눈물이 솟아서 눈앞이 흐릿해졌지만 어떻게든 흘리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입술은 웃음을 그려냈다.
나는 카르이넨이다. 그리고 플렌드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결코 추하게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게 황자님께서 제게 주시는 답이군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잡으며 황족을 향한 예를 표해 보였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돌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걸었다. 뒤에서 에사디엔이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잠시만. 미뉴엘.”
“…….”
그러자 쫓아온 에사디엔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미뉴엘,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다오.”
“그보다 더 저를 부정하실 것이 남으셨나요?”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다만, 나는…….”
‘왜 이러는 거지.’
지금껏 에사디엔이 이 정도로 동요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울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가, 천장을 봤다가, 목깃을 잡아당겼다가, 애꿎은 목덜미를 문질렀다가.
그 끝에 한숨을 푹 내쉰 에사디엔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꾸만 그대가 생각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너무 놀라면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쏙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멍하니 반문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며 다소나마 맑아진 눈에 에사디엔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디를 가도 그대 생각만… 나서.”
에사디엔은 내 시선을 피한 채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이상해진 것 같다.”
에사디엔의 목부터 이마, 그리고 입가를 가린 손까지 죄다 새빨갰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확신한 순간 충동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그저 셀레스테 영애에게 상담하려고 했을 뿐인데…….”
“에사디엔.”
입을 가린 에사디엔의 손을 치운 나는 놀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멱살을 냅다 잡아 내렸다.
두 입술이 부딪치면서 우리 사이의 거리는 0이 되었다. 둘 중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귓가를 온통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