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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6)화 (26/130)

26화

에사디엔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다 내 허리며 등을 껴안아 당기는 손도, 짧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도 모두 뜨거웠다.

뜨겁고 달콤했다.

“미, 미뉴엘.”

“에사디엔, 바보군요.”

나는 에사디엔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마주 대며 웃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 부근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저도 언제나 당신을 생각해요.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그래요.”

에사디엔은 말없이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좋아하니까요.”

“……!”

열기가 올랐던 바닷빛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릿해졌다.

‘이렇게 감정이 계속 널뛰어도 되는 건가?’

나 자신도 불안해질 지경이었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래요.”

에사디엔이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지, 무엇을 믿지 못하는지 나는 몰랐다.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면… 전 이만 멈출게요.”

“미뉴엘!”

처음이었다. 에사디엔이 목소리를 높인 건. 더불어 어깨를 움켜쥔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다가올 때까지, 불안해하지 않고 솔직히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줄게요.”

서서히, 아주 서서히 에사디엔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틈을 타 나는 그를 밀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가봐야 해요.”

에사디엔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가 벌인 일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으악!’

“아니, 역시 같이 가야겠다.”

그리고 에사디엔은 왜 이리 날 잘 따라오는지 모르겠다.

“아, 안 돼요.”

“어째서.”

내가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에사디엔은 조금 충격받은 듯이 물었다.

낯부끄러워서 도저히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정면에만 시선을 둔 채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속삭이듯 말했다.

“에사디엔… 입가에 연지 묻었어요…….”

정말이지 얼굴이 펑 터질 것 같았다. 에사디엔도 마찬가지였는지 흘긋 본 얼굴이 아까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알, 알겠다. 그러면 이따가 보지.”

“네, 이따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이것이었다.

‘부모님께 파혼하겠다고 언제 말씀드리지.’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한순간에 뒤바뀌다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방울방울 어렸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인사해 놓고도 여전히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미뉴엘.”

“네?”

“이것. 주고 싶었다.”

에사디엔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봉투인가 했는데 아주 얇은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상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장갑?”

“상점가에 갔다가 샀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예쁜 장갑이었다. 손목 끝단의 아스라하게 물든 듯한 핑크빛 레이스가 특히나.

“감사해요! 너무 예뻐요.”

그리고 이걸 준 에사디엔은 더 예뻤다.

“마음에 드나.”

“네. 엄청.”

“그러면 내가… 끼워줘도 괜찮을지.”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쑥스러워하며 손을 내미는 에사디엔의 모습이 흐뭇하게 보이는 것과는 별개였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의식하지 못한 채 손을 꽉 말아 쥐며 조금 물러섰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교환해도…….”

“그, 그게 아니라!”

“정말 괜찮다.”

“저도 정말이에요. 그… 아, 피로연 때 입을 드레스하고 더 잘 어울려서, 그래서 그래요.”

“그렇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 안쪽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저, 그, 정말로 갈게요.”

“그래.”

확 돌아선 나는 뛰듯이 걸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제 안 따라오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미뉴엘.”

“헙. 네?”

발소리도 없었는데.

어깨가 부드럽게 잡히며 몸이 춤추듯 돌려세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쪽.

간질간질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럼 조심하고.”

희미하게 웃은 에사디엔이 등을 돌려 저벅저벅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뭐야…….”

혼자 남은 나는 방금 스쳐 지나간 것이 믿기지 않아 입술을 매만졌다.

“웃는 거 처음 봐…….”

에사디엔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던 다짐이 벌써부터 마구 흔들렸다.

* * *

“심심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하릴없이 놀고먹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이 생겼어도 딱히 할 것이 없었다.

에사디엔에게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전처럼 황자궁에 매일매일 방문할 수도 없고.

“에사디엔 보고 싶어.”

“너, 오늘만 해도 벌써 그 말 서른일곱 번째야.”

책을 읽고 있던 라망드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잖아. 심심한걸.”

쥬엘라 언니의 결혼 선물로 들어온 목록도 전부 정리했고 일이 끝나면 읽으려고 미뤄둔 책도 다 읽었다. 성인식이며 다음 계절을 위한 드레스를 맞추는 것까지 모두 끝냈다.

더 이상은 할 일이 없었다.

“에사디엔은 뭐 하고 지내는 걸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반나절이 휘리릭 지나갔는데.

“새삼 하루가 참 기네…….”

“어휴. 그러면 뭐, 산책이라도 할래?”

선심을 베푸는 척 라망드가 말했지만 싫었다. 정말이지 딱 싫었다.

“산책을 또 하자고? 종일 산책만 시키려고 그래? 운동시킨다고 식후마다 꼬박꼬박 끌고 다니면서 무슨.”

“넌 운동이 필요해. 너무 허약하다고.”

“치…….”

너무 허약하다. 그건 엘가 언니도 내게 항상 하는 말이다.

‘아니, 그럼 단칼에 곰을 깍둑썰기하는 언니 눈에 대체 누가 허약해 보이지 않겠냐고. 우리 어머니?’

라망드는 내가 한가해지자마자 하루 세 번씩 산책을 시켰다.

“신전에서는 억지로라도 움직였는데. 집이라고 종일 눕거나 앉거나 둘 중 하나십니다? 응?”

“으악! 잔소리쟁이!”

내 몸은 산책 좀 한다고 나아질 몸이 아니라고!

하지만 가족들도 다 라망드한테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다들 내심 나를 억지로라도 운동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몰라. 나 에사디엔 만나러 갈래.”

“뭐?”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라망드가 이마를 꾹 누르는 바람에 다시 벌러덩 눕게 되었다.

“야, 라망드. 뭐야, 이 손 안 치워?”

“안 치워. 너, 황자님께 기다려주겠다고 했다며?”

“벌써 며칠이나 못 봤다고. 빨리 나를 일으켜준다면 유혈 사태는 없을 것입니다.”

부리부리하게 눈에 힘을 줘봤지만 어쭙잖은 협박의 대가는 매서운 딱밤이었다.

“아아!”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와서는.”

“아프잖아! 예쁜 이마에 혹 나고 멍들어서 시퍼레지겠네. 책임져!”

“어휴.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엄살은.”

라망드는 또다시 혀를 쯧쯧 차며 나를 일으켜주었다.

“엄살 아니거든? 진짜, 정말로 엄청 아파.”

사실 반쯤은 엄살이 맞았지만, 이마가 욱신거린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었다. 울상을 짓자 라망드의 목소리도 그제야 조심스러워졌다.

“…어디 봐.”

이마를 문지르던 내 손을 떼어낸 라망드가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다가왔다.

“후우.”

뜨겁고도 부드러운 숨결이 묵직하게 이마에 닿았다. 함께 전해진 미량의 신성력이 화끈하던 이마의 통증을 가라앉혔다.

“이제 안 아프지?”

가까워진 거리 그대로 라망드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림자가 드리웠는데도 반짝이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씩 웃었다.

“응. 우리 라 첨지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호흡에도 신성력을 섞다니.”

“간지러우니까 그만 칭찬해.”

“부끄러워하기는. 이제 우리 라망드가 숨만 쉬어도 어지간한 사람은 다 낫겠어.”

드디어 라망드가 피식 웃었다.

“그런가.”

좋았어. 분위기가 풀어졌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아무튼 나는 황자궁에 다녀올 테니까!”

“진심이었어? 어쩐지 웬일로 오래 참는다 싶더라니.”

“잠시, 정말 잠시 에사디엔 얼굴만 보고 올 거야. 부담은 안 줄 거라고.”

“어이구, 그러셔.”

“응! 그러셔!”

나는 코대답을 하는 라망드를 뒤로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그런데 다시 나와 보니 응접실이 텅 비어 있었다.

“어? 그새 어딜 갔지. 누가 급하게 부르기라도 했나?”

오래 걸린 것도 아니고 딱 십오 분밖에 안 지났는데.

그런데 웬걸. 마차를 타러 갔더니 사라졌던 라망드가 안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 깜짝이야! 라망드,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냥 나도 같이 가려고.”

“네가? 왜?”

“생각해 봤는데, 내가 같이 가는 편이 너도 조금 덜 민망할 것 같아서.”

“민망?”

그런가?

‘그냥 한 번 껴안기만 하고 오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아예 방문하지 않고 발길을 뚝 끊어버리면 에사디엔도 섭섭할지 모른다. 옷을 갈아입으며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것도 끝낸 뒤였다.

‘그런데 쟤가 왜 저러지?’

고개를 갸웃하는 도중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라망드, 황성 구경을 하고 싶었던 걸까?’

라망드는 서멘더 지역 출신이었으므로 황성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껏 혼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라망드 생각을 못 했다는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뭐야, 그 눈은.”

“아냐, 아냐. 빨리 가자.”

“아, 뭐냐니까.”

“아무것도 아냐. 자, 여기. 내 손 잡아.”

나는 라망드에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 손을 번갈아 보더니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지금 날 예비 미아 취급하는 거야?”

“눈치는 빨라서. 어허, 팔 떨어진다아?”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라망드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오늘도 라 첨지는 라 첨지였다.

‘하여간 귀엽긴.’

웃는 걸 들키면 라망드가 또 뭐라 할 것이 뻔했다. 최대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내게 라망드가 물었다.

“그런데 오늘도 이 장갑이네. 요즘 이것만 끼는 것 같은데.”

“헤헤. 눈치챘어?”

빙그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올라왔다.

에사디엔이 준 장갑은 세탁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내 손에 머물렀다.

‘너무 좋아.’

이걸 끼고 있으면 에사디엔을 보지 못해 허전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너 원래 드레스 색하고 맞춰서 끼잖아.”

그랬다. 언제나 장갑을 벗지 않는 내게 장갑은 패션 아이템이자 생필품이었다. 당연히 소재와 색깔별로 몇 켤레씩 있었고 장갑만 진열한 서랍장도 있었다.

오늘처럼 푸른색 옷을 입는 날은 하늘색이나 남색 장갑을 꼈겠지.

“괜찮아. 하얀색은 어디든 다 잘 어울려.”

“황자님이 선물한 거라 그런 건 아니고?”

“당연히 그런 거 맞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뿌듯한 표정을 짓자 라망드가 몸을 떨었다.

“와, 소름 돋아. 누구세요? 미뉴엘 카르이넨 양은 어디 가셨는지?”

“이 라 첨지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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