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렇게 아웅다웅해 가면서 황자궁에 도착했지만 막상 에사디엔은 외출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황자님께서 계셨다면 무척 반기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시종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닐세. 황자님께서는 요새 잘 지내시나?”
“예. 많이… 바빠지셨습니다.”
바빠졌다고?
‘황제나 황태자가 무슨 일을 맡기기라도 했나.’
궁금했지만 시종을 붙들고 이것저것 캐묻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으므로 그만두었다.
‘다음에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마음에 나는 몇 번이고 에사디엔의 궁을 돌아보았다.
“뭐 해, 미뉴엘.”
라망드가 재촉할 때까지.
그리고 며칠 후,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는 엘가 언니를 따라서 나도 황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에사디엔은 외출 중이었다.
‘정말 많이 바쁜 모양이네…….’
아무튼 온 김에 같이 시간을 보내자는 언니의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아가, 우리 예쁜 미뉴엘도 같이 왔어? 내가 오늘 길몽을 꿨나?”
황태자는 반색하며 우리를 반겼다.
특히 원래 약속 상대인 엘가 언니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나를 반기며 껴안는 바람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워낙 친해서 그런지 언니나 황태자나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셀레스테 영애는요? 모습이 안 보이네요.”
예의상 물었지만 어느 정도 소식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도 여주인공이니까.
여기서 만날 줄 알았는데 본궁에라도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어진 황태자의 대답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폐하께서 말벗으로 부르셔서 본궁에 갔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마도 귀가하지 않았나 싶다.”
조기 퇴근이라니. 직장인의 즐거움이잖아.
“잘 지내나요?”
“글쎄다.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더구나.”
황태자의 대답이며 시녀들을 둘러싼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곳 사람들과도 썩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황자님은 요즘 맡은 일이 있으신가요? 바쁘신 것 같던데.”
“에디가? 녀석이 요청하면 출정에 포함시키기는 해도 다른 일은 굳이 시키지 않아. 눈에 띄는 걸 워낙 싫어해서.”
“아, 그렇군요…….”
엘가 언니와 황태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계속 차만 마셨다.
‘왜 또 이렇게 불안한 거지.’
누가 등허리에 얼음을 문지르고 간 것처럼 오싹했다. 그 느낌을 없애려 따뜻한 차를 계속 흘려 넣고 또 넣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 * *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에사디엔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로 안부를 묻는 것은 처음이라 어색하네요.]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내 근황에 이어 돌고 돌아 시간이 되면 오랜만에 한번 보자는 말로 끝맺었다.
하지만 다음 날 오후 늦게 황실 전령의 손에 들려 돌아온 답은 이랬다.
[황태자 전하께서 긴히 시키신 일이 있어 짬을 내기가 어렵다. 미안하다.]
편지를 쥔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삐이―
귓가에 쨍한 이명이 울리면서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어제 낮에 황태자를 만나서 물어보지 않았다면 이 말을 믿었겠지.’
어지러워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았을까?’
내 병문안을 왔던 에사디엔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어도 신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
‘황태자와 에사디엔, 둘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사랑은 서로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에사디엔을 믿어야 하는 걸까?
황태자 전하께서는 외부자에게 알리기 힘든 일이라 없다고 말씀하셨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
또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게 정령의 힘 부스러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여전히 적응은 되지 않았고 내 안에 무슨 꺼지지 않는 숯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미뉴엘, 들어가도 돼?”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라망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눈알마저 화끈거려 눈을 꽉 감았다. 팔이 힘없이 툭 떨어지고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저녁 먹어야지. 이만 내려가자.”
“…….”
라망드와 나는 불과 삼십 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좀처럼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뉴엘?”
그런데 계속 답을 하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문을 살짝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도.
“미뉴엘! 왜 그래!”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
“미안해. 괜찮아?”
내 이마며 볼을 짚는 라망드의 손이 시원했다. 나도 모르게 끙끙대며 시원한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자 그가 혀를 찼다.
“또 열나잖아.”
라망드는 단숨에 나를 안아 올려 침실로 데려갔다.
“식사는 내가 가져다줄 테니까 쉬고 있어.”
하필이면 오늘따라 나는 허리를 꽉 조인 옷을 입고 있었다.
라망드는 침대에 나를 앉힌 채 등 뒤의 리본을 헐겁게 풀어주려고 했지만, 나는 힘없는 손을 가까스로 저으며 막았다.
“왜?”
“엄마, 아빠한테 걱정 끼치기 싫어. 그냥 식사하러 갈래.”
“신성력으로 가라앉히는 건 임시방편인 거 알잖아.”
“지금은 그거면 돼. 정말이야. 아파서가 아니라 그냥 좀…….”
“그냥? 네가 아픈데 ‘그냥’이 어디 있어.”
눈썹을 찌푸린 라망드의 시선이 아직도 종이를 꼭 쥐고 있던 내 손에 닿았다.
“이것 때문이야?”
글씨보다 여백이 더 많은 편지였으므로 라망드가 그 내용을 훑는 데는 이 초도 걸리지 않았다.
라망드의 눈이 조금 벌어졌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후우.”
한숨과 함께 그가 말했다.
“너… 눈에 실핏줄까지 터졌어. 눈 감아.”
“응…….”
나는 눈을 감으며 라망드에게 기댔다.
“숨, 길게 쉬어.”
온몸으로 안아주는 그에게서 신성력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라망드만큼이나 익숙한 라망드의 힘.
이 순간 나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고치 안에 들어 있는 나비 같았다. 이 안온한 곳에서는 마음이 평화로워질 줄 알았는데 자꾸 에사디엔만 떠올랐다.
‘자꾸만 그대가 생각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쁜 황자님 같으니.
‘이제는 나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요.’
에사디엔을 오래 본 테오도르에게 조언을 구해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는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 후 다시 사막 지역으로 파견을 나간 상태였다.
“기다린다는 소리 따위 하지 말걸.”
결국 나는 후회 어린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할걸.”
황자궁 문턱이 마르고 닳도록 드나들면서 에사디엔 옆을 지키고 있을 걸 그랬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늦었고 일은 조금씩 더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 * *
시든 강아지풀처럼 우울한 나날이 또 며칠 흘러갔다.
이황자와 에사디엔 사이에 있었던 일이 내 손에 들어온 것도 마침 그때쯤이었다.
“세상에. 이건 뭐,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일방적인 괴롭힘이잖아.”
에사디엔이 황성에 들어갔을 때부터 괴롭힘은 바로 시작되었다.
자잘한 폭행은 하나하나 세기 입 아플 정도로 많았고 그중에서도 이런 짓까지 했나 싶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에사디엔이 기사 수행을 막 시작했을 때 수련 기사들을 매수해서 그에게 린치를 가한 것.
두 번째는 산악 훈련 때 에사디엔에게만 잘못된 지도를 준 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려고 시도한 것.
“그때 구해 준 게… 유가티스 카르이넨. 우리 엄마하고 기사단이라고?”
‘약혼을 받아들인 것은 폐하와 대공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무슨 은혜인가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구나.”
사건을 덮는 데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에사디엔이 납치당했던 사건은 당연히 황제에게 보고가 들어갔고, 이황자는 진노한 황제 앞에서 싹싹 빌었지만 치트룸으로 출국 ‘당했다.’
물론 명목은 유학이라지만 지금껏 제국에 돌아온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면 누가 봐도 반쯤은 추방이었다.
나는 얄팍한 보고서를 덮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미뉴엘을 뛰어넘는 악역이 있었네.”
에사디엔이 황자가 된 건 고작 아홉 살 때였다. 대체 그런 어린애가 뭘 잘못했기에 이황자가 그렇게도 괴롭혔단 말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은 에사디엔이 그 모든 일을, 자신을 받아준 황제를 위해 묵묵히 감내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팠다.
에사디엔을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라망드를 도왔듯 그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보고 싶어…….”
이런 연민도, 요즘 나를 감쌌던 괴로움도 모두 에사디엔을 좋아하니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제야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믿어야겠지.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내 생각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던 그 말을 믿어야겠지.
“보고 싶어요, 에사디엔.”
예전처럼, 마치 작은 우리 둘만의 공간 같던 에사디엔의 응접실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얼굴을 보고 괜찮다고 말해 주면 정말 다 괜찮아질 것 같은데.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피를 조금 토했다.
“읍, 흑.”
지난번에 불덩어리를 흡수한 후 울화가 조금 더 극성스러워진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누가 보기 전에 피가 묻은 손수건을 벽난로의 잿더미 밑으로 밀어 넣었다. 서두르는 손끝이 원인 모르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공녀님.”
하지만 그날 모처럼 애써서 세웠던 다짐은 얼마 후 황자궁을 방문하자마자 부스러져버렸다.
“…….”
에사디엔은 더 이상 편지에 답장도 없었고,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공녀님?”
낯선 시종을 보자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기분이 수직으로 하강했다.
한때 밥 먹듯 황자궁을 들락거려 시종장만큼이나 황자궁 시종들의 면면을 잘 아는 사람이 나였는데.
지금 내 앞에서 안색을 살피는 이 사람은 단언컨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닐세. 황자님께서 분주하신 게 자네 잘못은 아니니.”
“황자님께서 돌아오시면 방문하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되었네.”
고개를 가로젓고는 곧바로 시종을 지나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고, 공녀님?”
“자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닐세. 궁이 다소 바뀐 것 같아 잠시 둘러보겠네.”
그래. 에사디엔의 보금자리가 바뀌었다.
낯선 시종. 조금씩 바뀐 장식. 그로 인해 달라진 분위기.
‘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대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내실에 가장 가까운 응접실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끈적거릴 정도로 단 초콜릿 냄새가 확 끼쳤다.
“…….”
나는 말을 잃은 채 내부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