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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8)화 (28/130)

28화

누군가가 방문했던 것이 분명한 응접실을 역시 처음 보는 시종들이 정돈하고 있었다.

‘너무, 너무 많이 변했잖아.’

나와 에사디엔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진녹색의 긴 소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꽃무늬가 자잘한 일인용 의자들만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초콜릿이 잔뜩 남은 접시가 있고, 그 옆에 놓인 찻잔에는 연지 자국이 선명했다.

‘황태자가… 왔을 수도 있지.’

씨근덕거리려는 숨소리를 가까스로 참으며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시종에게 물었다.

“원래 있던 시종들은 어디로 갔지?”

“시종장님의 허가 없이는 황실 내부의 인사에 대해 발설할 수 없습니다.”

“하.”

하도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이 절로 났다.

원칙상 그게 맞지만, 사실 시종들이 어디로 이동했느니 하는 정도는 수도 귀족들의 가벼운 가십거리일 정도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종은 한 꺼풀만 들치면 뻔히 보일 것조차 알려줄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거였다.

‘내가 아무리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나는 드물게 정색하며 시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말해 보게.”

“예?”

“꼭 두 번씩 말해야 하나?”

“사, 삼황자 전하의 약혼녀이신 카르이넨 공녀님이십니다.”

“그래서, 자네 생각에는 시종장이 발설하지 말라고 할 것 같은가? 황제 폐하께서 딸처럼 여기시는 내게?”

“그것은…….”

“쯧.”

조금 더 추궁하려고 기세를 올리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람.’

‘친정의 권력까지 끌어다가’ 원하는 걸 달성하려던 원작의 미뉴엘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되었네. 그럼 이만.”

휙 돌아서서 걷는데 예의 그 시종이 종종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방문했던 사람이 황태자일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내 예감은 자꾸만 석연치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난번, 황성에 방문했을 때 에사디엔은 외출 중이었고 라페슈도 그때쯤에는 퇴근했을 거라고 황태자가 말했었다.

‘라페슈는 황제가 부르는 날마다 일찍 퇴근한다고 했지.’

그날도 둘이 함께 외출한 거라면?

문득 꽉 말아 쥔 장갑 낀 손에 시선이 닿았다.

‘상점가에 갔다가 샀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때는 너무 기뻐서 그냥 넘겼지만 황족인 에사디엔은 굳이 황성을 나가 상점가에서 쇼핑할 필요가 없었다.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 때처럼 라페슈와 에사디엔이 한 마차에 타고 돌아다닐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좋지 않아졌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서 여전히 뒤를 따르던 시종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말일세.”

“아, 예.”

“라페슈 셀레스테 영애가 황자궁에 방문한 적이 있는가?”

“예.”

아까보다는 다소 고분고분해진 태도였다.

“몇 번이나?”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혀 즐겁지 않은데 입술은 제멋대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시종이 답을 거부하는 걸 보니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더불어 조금 전 황자궁에 들어왔던 방문객이 라페슈일 것이라는 짐작도 더욱 굳어졌다.

“그렇군. 실례했네.”

다시 등을 돌려 황자궁에서 빠져나오는데 기분이 퍽 이상했다.

대체 이게 무슨 감정일까? 허탈함? 배신감? 그것도 아니면 맷돌 손잡이가 빠짐?

뭐가 됐든 에사디엔의 얼굴을 보고 딱 한 마디만이라도 듣고 싶은데 그게 이렇게도 어려울 줄은 몰랐다.

“하아……. 그렇다고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께 부탁할 수도 없고.”

한숨 섞인 푸념을 중얼거리며 마차 문을 열었을 때였다.

“왔어?”

안에 예기치 못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라망드?!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급하게 나가기에 걱정돼서.”

“그, 그랬나?”

아무리 그래도 뒤따라와서 기다리다니. 통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얼떨떨하기만 했다.

문을 연 채 굳어 있는 내 손을 잡아끌며 라망드가 덧붙였다.

“요즘 네 방에 둔 포션이 많이 줄기도 했고.”

윽. 사용인이 채워둔다고만 생각했지 라망드가 직접 세어보는 줄은 몰랐는데.

“황자님은… 안 계셨나 보네.”

표정에서부터 티가 났나 보다. 나는 쿠션에 몸을 묻은 채 그냥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할래? 집에 들어갈까?”

“응.”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가 급하게 대답을 고쳤다.

“아니야. 생각이 바뀌었어. 시내에서 적당히 좀 걸어 다니다가 들어가자.”

이를테면 상점가라든가.

“웬일이야? 네가 걷자는 소리를 다 하고.”

“네 말도 틀린 데가 없는 것 같아서. 너무 집에만 있어도 우울하다며.”

아무리 집이 대형 리조트보다 넓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암.

사실은 황성 밖을 돌아다니는 에사디엔과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어서였지만 내가 생각해도 구질구질한 터라 차마 라망드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라망드는 바로 마부에게 뭔가를 지시했고, 우리는 곧 로콰이트의 어딘가에 도착했다.

“여기는 어디야?”

“번화가 끝자락이라고 할까. 저쪽으로 가면 네가 드레스를 맞췄던 디자이너의 가게가 있고, 이쪽으로 가면 주택가가 나오지.”

“그래? 잘 아네, 라망드.”

“게으름뱅이 미뉴엘 양과 다르게 나는 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거든.”

“그게 다 내 가이드가 되려고 그런 것 아니겠어?”

눈을 찡긋하자 라망드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다. 그럼 어디로 가실까요, 영애?”

연극처럼 과장된 태도로 내민 라망드의 손에 짐짓 거만하게 손끝을 얹으며 답했다.

“이왕 나온 것, 쇼핑이나 해볼까요?”

“기꺼이 모시지요.”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신나게 들어간 보석상에는 생각보다 시선을 끄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대공저로 보내줘.’라는 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슥 한 번 둘러보고 나오는 내게 라망드가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안 사?”

“별로……. 집에 있는 것보다 나은 게 없더라고.”

“어이구. 아무렴 그러시겠지.”

“역시 그렇지? 언니들이 주문 제작해 준 건데……. 아, 그러고 보니까 쇼핑을 하고 싶으면 그냥 우리 상단에 주문하면 되는 거였네.”

“말이 나온 김에 구경 갈래? 상단 로콰이트 지부.”

“그거 좋은 생각이다.”

다른 목적이 있는 산책이었지만 라망드와 시시덕거리는 건 의외로 기분이 나아지는 데 효과가 있었다. 서멘더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나기도 하고.

덕분에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천천히 중심가로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손에 쥔 뭔가를 연신 사람들에게 권하는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뭘 파는 거지?”

“알아볼까?”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고개를 저으려던 찰나, 지나가던 사람에게 떠밀린 아이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저런.”

바구니에서 색색의 실 같은 것이 쏟아졌다. 울상을 지은 아이는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먼지를 털어냈다.

그걸 보니 지나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아이에게 다가가 뭐라 말을 하더니 이쪽으로 데려왔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귀족을 대하는 것은 처음인 모양이다. 아이는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굽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고개 들어도 돼. 여기 사제님도 계셔. 다친 데는 없니?”

“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 네가 파는 것이 뭔지 보여주겠니?”

“예……?”

제 바구니에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보다. 화들짝 놀란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고는 나와 라망드를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흠.”

뒤에서 기사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바구니를 그에게 내민다. 기사는 보자기를 걷고 안에 이상한 것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우리에게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우와. 팔찌잖아?”

색색의 실을 가닥가닥 엮어 만든 일종의 소원 팔찌였다.

“라망드, 기억나? 나도 어릴 때 이런 걸 만들어서 너한테 줬잖아.”

신전에서 직조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색실이야 넘쳐났고 아무렴 태피스트리보다야 팔찌가 더 완성하기 쉬웠으니 초반에는 팔찌 만들기에 심취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 네가 소원을 빈 후에 계속 매고 있으면 끊어지는 날 이뤄진다고 해서 정말로 끊어질 때까지 착용했지.”

“아하하. 맞다. 그랬지.”

같은 나이인데도 라망드는 뚝심 있는 아이였다. 나는 금세 손목이 근질거려서 빼버렸는데.

“그러고 보니 네 소원은 뭐였어?”

“…….”

그때까지만 해도 술술 얘기하던 라망드의 입이 딱 닫혔다.

‘왜 말이 없어?’

혀라도 깨물었나 싶어서 돌아보자 실 팔찌를 손바닥에서 굴리던 그의 목덜미가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라망드?”

“어? 응?”

게다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기까지 한다.

“그, 그런 건 원래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거야.”

수상쩍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라망드, 너 혹시…….”

“혹시? 혹시 뭐?”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 거지? 맞지?”

맨날 나한테 그런 것도 금방 잊어버리느냐면서 구박하더니!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추궁하자 라망드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곧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눈치만 빨라서는.”

“너, 이제 나한테 분홍색 금붕어라고 놀리면 가만 안 둬.”

나는 라망드를 쿡쿡 찌르며 잠시 웃다가 아이를 향해 물었다.

“저기, 나는 이거 전부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될까?”

“네?”

아이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그리고 또다시 기사의 헛기침이 이어졌다.

“아, 그게, 이게 다 몇 개인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가 불쌍했던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부가 나섰다.

“저, 공녀님. 아마도 팔찌 하나에 동화 한 닢 정도 될 겁니다요.”

동화 백 닢에 은화 한 닢, 은화 열 닢에 금화 한 닢으로 치환된다. 마부의 말은 대충 은화 한두 닢 정도 주면 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 혼자 들고 가기에는 큰돈이다. 나는 라망드에게 몇 번 들었던 뒷골목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음. 너는 부모님하고 함께 사니?”

“아… 아닙니다, 공녀님. 부모님은 안 계시고 고아원에서 살아요.”

공녀님이라. 마부가 한 번 칭한 것을 그대로 배우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래. 그럼 그리로 가자꾸나.”

기사도, 마부도, 당사자인 아이도 깜짝 놀라서 반대했지만 라망드만큼은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았다.

“공녀님께서 지시하셨으니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요.”

먼저 마차에 올라타는데 뒤에서 라망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금 감동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왜 원하는지 다 아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라망드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그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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