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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29)화 (29/130)

29화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미뉴엘.”

“으응, 라망드?”

“왜 또 음흉하게 웃고 있어?”

“야! 이 예쁜 얼굴의 어디가 음흉하다는 거야? 눈 비비고 잘 봐.”

찰랑거리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기고 방긋 웃으며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랬더니 라망드의 반응이란.

마른세수하는 손 사이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플렌드나 님,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야, 라망드 플렌드나!”

바락 소리를 쳤는데도 라망드는 좀처럼 얼굴을 들지 않았다.

밤하늘 같은 남색 머리칼 사이로 조금 발그스름해진 귀 끝이 톡 튀어나온 게 오늘따라 유난히 얄미워 보였다.

“아, 언제는 플렌드나 님의 자식은 다 예쁘다며!”

“그래. 그 말은 맞는데…….”

“뭐, 맞는데 뭐.”

그제야 얼굴을 드러낸 라망드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갑자기 차분하기 짝이 없어진 말투로.

“예쁜 건 예쁜 거고. 음흉한 건 음흉한 거고.”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음흉하대!

또다시 으르렁대려던 때였다. 바깥에서 고아원에 도착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좁은 정원에 마차가 들어서자 아이들이 신기했는지 하나둘씩 창문에 매달려 구경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다 함께 저녁마다 모여서 팔찌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색실을 사들일 수는 없을 테니 의상실에서 쓰다 버리는 걸 얻어 왔겠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이들의 눈에는 호기심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깃들어 있었다.

“번쩍번쩍한 마차가 나 귀족이요, 하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지, 참.”

“응?”

“아니, 얼른 대금을 치르고 떠나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긴.”

역시 라망드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금방 알아듣고는 마부 곁에서 기다리던 아이를 불러 물었다.

“원장실은 어디 있는지 알려줄래?”

“들어가서 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방이에요.”

“고맙다. 플렌드나의 가호가 함께하길.”

라망드의 미소에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마부가 사탕이라도 물려줬는지 볼 한쪽이 볼록 튀어나온 모습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났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건강하렴.”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준 후 라망드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고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거미줄도 없고 정성 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입구 바로 오른쪽……. 찾기는 쉽네.”

바깥에서든 위층에서든 무슨 일이 생겨도 재빨리 뛰어가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 소녀에게 굳이 묻지 않았어도 들어오자마자 위치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보여서이기도 하지만, 굳게 닫힌 원장실 문이 무색하게도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소리 때문이었다.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 미안하다, 팔로스. 내가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도저히 융통할 수가…….”

“약속하셨잖아요! 시험에만 통과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하셨으면서!”

“나도 그럴 줄 알았다만……. 미안하다. 이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다 필요 없어요. 이제 원장님 말은 절대 안 믿을 거예요!”

쾅!

원장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그러고는 웬 남자아이가 총알처럼 뛰어나오더니 우리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저편으로 뛰어갔다.

낡은 문이 다시 닫히지 않은 채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안됐네…….’

익숙하다면 익숙한 모습에 안타까움을 담아 소년이 사라진 쪽을 잠시 응시하던 나는 라망드에게 이끌려 원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누, 누구십니까?”

기운이 빠진 듯 앉아 있던 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들을 챙기느라 밥을 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볼이 홀쭉하니 들어간 남자였는데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꽤 맑았다.

“구매한 팔찌의 대금을 지급하러 온 사람이라네.”

내 눈짓을 받고 기사가 은화 두 닢을 내밀었다. 원장은 그것을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이가 걱정되어 이런 곳까지 데려다주신 것이로군요.”

“어차피 별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내부를 살피던 내 시선이 엉망으로 구겨진 채 바닥에 떨어진 종이에 닿았다. 그걸 용케도 알아차린 라망드가 바로 그것을 주워 잘 펴서 건네주었다.

“마법 학교 등록 원서? 아까 그 아이가 입학시험에 통과했나?”

“예. 붙기만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소년의 이름은 팔로스라고 했다.

원장을 도와 시장에 함께 나갔다가 우연히 지나던 마법사의 눈에 띄어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모아서 겨우겨우 시험을 치르게는 해주었습니다만.”

막상 팔로스는 떡하니 붙었는데 원장은 후원자를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다 보니. 팔로스에게는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랬군.”

구깃구깃한 원서를 내려다보았다. ‘팔로스’라고 꾹꾹 눌러 쓴 이름 끄트머리에 둥글게 번진 물방울 자국을 본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이것도 플렌드나 님의 뜻이겠지. 이 원서는 내가 가져가겠네.”

“예?”

“내가 후원자로 이름을 올리겠다는 뜻일세.”

나는 놀라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원장에게 미소를 던지고 돌아섰다.

“귀한 분의 존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되었네. 팔로스에게는 다른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만큼 배우고 익히면 된다고 전해 주게나. 배웅은 사양하지.”

고아원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와, 나 지금 좀 멋있었다.’

하지만 뿌듯해하는 것도 잠시,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때까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라망드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팔찌 한 바구니를 다 산 것 정도야 그렇다고 쳐. 위험하니까 데려다주는 것도 이해해. 그런데 마법 학교 원서는 왜 가져 와?”

“아깝잖아. 입학시험까지 통과했다면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한데……. 팔로스도 진심으로 바랐던 것 같고.”

무엇보다도 전생의 내가 생각나서 그랬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기는 했지만 장학금을 탈 성적은 아니었다. 자취를 할 여력도 없었다.

우리 원장님도 나에게 저렇게 많이 사과했다.

그러나 내 과거를 알 리 없는 라망드는 이마를 짚었다.

“미뉴엘, 너는…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게 취미야? 내가 아무한테나 그렇게 호의 베풀지 말라고 했지?”

“야, 그래도 아무나는 아니지…….”

맞나?

“모르는 사람이면 아무나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래. 내가 너를 해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아니, 그 옛날 일을 가지고 아직도 그러냐.”

라망드는 팔로스보다 사정이 더 나빴다. 서멘더의 뒷골목 출신이었으니까.

소매치기에 실패해서 잔뜩 매질 당한 채 버려져 있는 걸 데려왔더니 신성력이 있다고 판별되어서 그대로 신전에 눌러앉게 된 경우다.

“그래서 잘된 거잖아. 라망드 넌 날 해치기는 무슨, 제일 친한 친구가 되어줬잖아. 해피 엔딩. 안 그래?”

“언제나 해피 엔딩일 수는 없어, 미뉴엘.”

이런 걱정 부자 같으니.

나는 라망드를 안심시키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알아. 그런데 뭐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니고. 가끔 이 정도 변덕은 부릴 돈이 있잖아? 아까 보석상에서 쇼핑 안 한 대신 후원했다고 치면 돼.”

아무리 나라도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나라님도 가난은 구제하지 못한다는데.

그저 옛날의 내 모습이 잠깐, 아주 잠깐 떠올라서 변덕을 부렸을 뿐이다.

“원래 우울할 때는 돈 지… 아니, 돈을 팡팡 쓰는 게 도움 된댔어. 응? 응?”

방―긋!

만면의 근육을 이완시키며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밝게 웃었다.

내 얼굴에서 빛이 나요! 이 정도면 450루멘은 되겠네!

“미뉴엘, 너…….”

“으으응?”

부족하니? 그렇다면 1,000루멘으로 간다아!

생글, 생글, 생글.

“…….”

꽃받침까지 하며 방싯방싯 웃자 라망드는 그제야 커다란 한숨과 함께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어휴. 내가 너를 어떻게 이겨.”

목적 달성. 나는 방만한 자세로 쿠션에 기대며 불량스럽게 투덜거렸다.

“쳇. 그럴 거면서 괜히 잔소리는.”

“미뉴엘 카르이넨, 너 정말!”

“아이고, 말이 잘못 나왔네!”

그렇게 겨우 라망드를 달래(?) 마법 학교 앞에 내렸을 때였다.

‘응?’

별다른 장식이 없는 마차가 반대편에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냥 평민들이 모는 소박한 마차라 무심코 눈을 돌리려던 나는 순간적으로 스친 붉은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라페슈?’

햇빛 때문에 눈썹을 살짝 찡그리는 라페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맞은편에서 남자의 손이 뻗어 나왔고.

‘……!’

커튼을 치기 직전, 남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일이 초 남짓한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에사디엔.’

그는 나와 라망드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 모습은 똑똑히 내 두 눈에 박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휘청거린 모양이었다. 라망드가 나를 단단히 붙잡으며 물었다.

“미뉴엘, 괜찮아? 왜 그래?”

“아, 아니야. 아까 지나간 마차 창문에 햇빛이 반사돼서……. 응. 그래서 그래. 잠깐 발을 헛디뎠나 봐.”

“발목은? 시큰거리지 않고?”

라망드는 당장 발목을 내밀어보라고 할 태세였다.

“아니, 괜찮다니까! 빨리 가자!”

앞장서서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 내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장면이 느릿느릿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둘이서. 문장도 없는 마차를 타고.’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 저 밑바닥, 차가운 곳으로 무언가가 납덩어리처럼 가라앉는 기분.

결코 유쾌하다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

* * *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재수가 없으니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달까.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그 일뿐만이 아니었다.

“안 됩니다.”

“뭐라고?”

“안 된다고요. 본인이 직접 와야 합니다.”

마법 학교의 접수원은 생각보다 굉장히 빡빡했다.

주위를 휘 둘러봤지만 때마침 우리 외에는 접수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게 뭡니까? 대체. 우리 마법 학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원.”

그는 구겨진 원서를 손가락으로 탁탁 치며 우리 쪽으로 쭉 밀어냈다.

“아무튼 안 되니까 본인 데리고 다시 오세요.”

“한 가지 묻지. 귀족들도 본인이 직접 와서 등록하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팔로스는 평민이지만 후원자인 내가 귀족이다.”

“그럼 후원 서류를 작성해 주시죠.”

태도가 당당하니 일단 서류는 받아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면서도 얄미운 입은 계속 나불거렸다.

“귀족 사칭은 중죄인 거 아시죠?”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픽 나왔다.

“사제복을 입고 나올걸 그랬어.”

라망드가 퍽 불쾌한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젓고는 창구에서 떨어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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