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라망드는 둘째 치고 내 옷을 보고도 저런 소리가 나오나?’
옷이 신분을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는 시대다. 연회에 참석하는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소재 자체가 평민의 것과는 다를진대.
귀족을 가까이에서 본 적은 있나 싶을 정도로 까막눈이니 더 뭐라고 할 마음마저 사라졌다.
그냥 팔로스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빈칸을 재빠르게 채워 넣던 중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호오, 유가티스한테 이렇게 장성한 딸이 있었나? 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나.”
‘누군데 우리 어머니 이름을 이렇게 막 불러대?’
고개를 들어보자 인자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구레나룻에서부터 이어진 수염이 지저분해 보이지 않고 꽤 멋들어졌다.
“저는 카르이넨 대공의 막내딸입니다. 누구신지요?”
“호오, 호오. 게다가 막내라니. 세월이 벌써 그리 지났구나. 나는 지나가던 마법사인데……. 어디 보자.”
나는 그가 서류를 보는 동안 창구 쪽을 흘긋 살폈다. 어느새 직원이 벌떡 일어선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지나가던 마법사라는 말은 농담일 거고. 교수인가?’
“호오. 팔로스 군은 시험 때 눈여겨봤던 학생이지. 평민이라 입학할 수 있을까 했는데……. 그래. 자네가 후원하기로 했구먼. 좋은 일일세.”
마법사가 알은척해 준 덕인지 직원은 더 구시렁대지 않고 순순히 서류를 접수해 줬다.
‘다른 교직원들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결정이기는 했지만 팔로스를 후원하게 된 사람으로서 마법 학교의 운영 상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애한테 갑질하기만 해 봐. 더 큰 갑질을 끼얹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바로 다음 순간, 또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헉. 방금 그 생각, 너무 악역 같은데?’
이러면 안 돼, 나야. 착한 생각, 좋은 생각만 하자!
“뭐 해, 미뉴엘?”
“아, 아냐.”
고개를 휘휘 내젓고 벌써 정문 앞에 다다른 라망드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아까부터 멍하니 있고 말이야. 발목, 괜찮은 거 맞아?”
“그렇대도. 이제 집에 가자!”
걱정하는 라망드를 안심시키려 평소보다 더 힘을 실어 정문 바깥쪽 땅을 내디뎠을 때였다.
쩌엉!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미뉴엘.”
라망드가 내 팔을 붙잡았다. 바짝 힘이 들어간 손이 얼마나 그가 긴장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표정만 봐도 라망드가 하려는 말을 알 수 있었지만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네 뒤에 있으라는 말은 하지 마.”
자기도 성기사가 아니라 일반 사제면서 뭘 뒤에 있으래.
하지만 찬찬히 주위를 둘러봐도 우리를 기다리는 건 마차뿐. 갑자기 칼을 든 사람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기분 탓인가?”
그러기만을 바라며 중얼거렸지만 라망드가 곧장 부정했다.
“아냐. 나도 느꼈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기사 호출기를 눌렀다. 하지만 분명 다들 근처에 있을 텐데 좀처럼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할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아직 인적이 끊기기에는 이른 시각인데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으, 응.”
라망드가 마차 문을 열며 채근했다. 얼떨떨하게 그의 뒤를 따르려던 순간, 우리를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 방금 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 뿅 하고 나타난 사람이.
“나라면 그 마차를 타지 않을 것이네.”
“…지나가던 마법사님?”
“허허허. 내 이름은 브라시다스라네.”
드디어 이름을 알려준 갈색 수염의 마법사, 브라시다스가 어디서 꺼냈는지 기다란 지팡이를 땅에 두 번 찧었다.
쿵, 쿵.
둔중한 소리가 울리자마자.
쾅!
기이할 정도로 격하게 문이 닫힌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어……?”
다각, 다각.
경쾌하게 울리던 말발굽 소리가 곧 달리는 소리로 변한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 앞에 검은 통로 같은 것이 나타나 마차를 꿀꺽 삼키고는 사라졌다.
소름이 쫙 끼쳤다.
‘아니, 무슨 저승 버스야?’
다리가 달달 떨렸다. 내가 무슨 왕위 계승권자도 아니고, 방심한 사이에 이런 위협이 훅 들어와!
숨을 몰아쉬는 사이 우리를 짓누르던 공기가 서서히 가벼워지더니 당황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사제님!”
‘진짜’ 우리 마차도, 기사들도 바로 라망드와 내 뒤에 있었다. 정말이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못 들으시는 것 같아 놀랐지 뭡니까. 뭐에 막힌 것처럼 다가설 수도 없고. 그런데 마법사님이 오셔서…….”
그제야 나는 정신을 수습하고 마법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브라시다스 마법사님. 함께 저희 집으로 가시겠어요? 어머니도 반기실 겁니다.”
“허허. 아닐세.”
“하지만 은혜를 입었는데…….”
“처음으로 제자 삼고 싶었던 아이를 입학시켜 줬으니 되었네.”
내내 휘어져 있던 깊은 초록빛 눈이 나를 꿰뚫듯 바라보았다.
“불씨가 커지고 있군.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 후원자 아가씨.”
“……!”
마법사의 눈에는 내 안에 깃든 것이 보이는 걸까.
하지만 미처 뭘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설이는 사이에 브라시다스는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긴 뒤 자리를 떠났다.
“또 보세나.”
또?
‘아, 입학식에 오라는 말인가.’
그런 학교 행사에까지 얼굴을 비출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마법사님하고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키다리 이모가 되려고 했는데 완전히 실패다. 마차에 타서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는 내게 내내 침묵하던 라망드가 사과했다.
“미안해, 미뉴엘.”
“응? 뭐가?”
“아까 그분이 아니었다면 그 마차를 탔을 거 아냐.”
어쩐지 말이 없다 했더니 라망드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무릎 위에서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타자고 했는데, 나 때문에 이상한 곳에 끌려가기라도 했으면…….”
라망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세게 물었다. 얇은 피부가 본래의 빛을 잃을 정도로.
이 애가 이 정도로 동요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 무서웠지만 라망드가 미안해하는 건 싫었다.
“에이, 일어나지 않은 일로 속상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진짜로 에사디엔을 함정에 빠뜨리기도 했는데, 뭐…….
“응? 라망드.”
옆으로 자리를 옮겨 볼을 쿡쿡 찔러봤지만 라망드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기만 했다. 나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졸랐다.
“정 미안하면 오늘 일은 가족들한테 말하지 말아 주라.”
“기사들을 부른 건 어쩌고?”
“뭐,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혹시 물어보시면 그냥 잘못 눌렀다고 하면 되지.”
“너 방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 거 섭섭한 소리를.
“라망드.”
나는 그의 손을 꼭 쥐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만큼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거야.”
내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 혹은 집단이라고 해봐야 가면남 이하 암살자들밖에 더 있겠냐고.
곱씹을수록 나를 노릴 수도 있다던 에사디엔의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오싹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에게는 아무 일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알았어. 말씀드리지 않을게.”
웃음기가 싹 사라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라망드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곧바로 창문을 열어 옆에 다가온 기사에게 말했다.
“삼황자궁으로 갈 거야.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두고 돌아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기사는 의아해할지언정 바로 명령에 따랐지만 라망드는 달랐다.
“이 시간에?”
벌써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라서 가는 거야.”
에사디엔이 아무리 종일 자리를 비워도 저녁에는 돌아올 테니까.
“이 일은 황자님하고도 관계가 있어. 그래서 그래.”
걱정도 걱정이지만 겸사겸사 라페슈하고 뭐 하러 다니는 거냐고 추궁할 거라는 말은 물론 곱게 숨겨두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방문한다고 부끄러워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그만큼 답답해했으면 충분해.’
그야 아까 그런 장면까지 목격했는걸.
믿자, 믿자, 하면서 눌러놓기는 했어도 사실 내 인내심은 한참 전에 바닥났다.
에사디엔은 내가 아예 황자궁에서 먹고 자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 * *
북쪽 마법가는 남쪽에 있는 것보다 더 음침한 곳이었다. 남쪽 마법가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여기서는 판매자만 잘 잡으면 구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언제나처럼 에사디엔은 검은색 후드를 쓴 채 라페슈를 따라다녔다.
그를 뒤에 단 라페슈는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며 사람을 찾기도 하고 주인에게 무언가를 묻기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폐하께서 괜한 의심을 하신 것인가.’
에사디엔은 한숨을 삼키며 피로에 전 미간을 문질렀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라망드와 함께 있던 미뉴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제복도 걸치지 않고 여느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서로에게 기대 있던 모습이.
‘폐하의 밀명을 받드는 중인데 이 무슨.’
에사디엔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라페슈는 주인에게 주먹만 한 주머니를 받아 옷 안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헉.”
“…….”
“아, 그. 다, 다음 가게로 가지요.”
라페슈가 놀란 새처럼 에사디엔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렇게 티 나게 놀라는 것은 의도한 행동인가.’
‘연애에는 원래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거예요.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매일 만나면 질린다잖아요. 연인 사이에는 적당히 숨기는 것도 필요해요.’
‘미뉴엘 님은 잘 때도 장갑을 끼신다던데. 혹시 황자님께서는 이유를 아시나요?’
‘두 분께 오래된 친구가 있다는 게 부러워요. 황자님께는 트레고스난 경이 있고, 미뉴엘 님한테는 잘생긴 사제님이 있잖아요.’
미뉴엘에 대해서 속살거릴 때는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럽더니, 제 발 저린 것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 오히려 수상했다.
‘조금만 더 지켜본 뒤에 보고를 올려야겠군.’
라페슈가 무엇을 구입했는지 슬쩍 확인한 에사디엔은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술렁이는 분위기와 함께 마법가의 상점 주인들이 짠 듯이 밖으로 나와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 마력은.”
“대마법사가 로콰이트로 들어왔다더니 정말이었나?”
그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영문을 모르는 에사디엔과 달리 라페슈는 잽싸게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이게 대마법사의 마력이라고요?”
“그래. 쯧, 당분간 몸 좀 사려야겠구먼.”
상점 주인이 휙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지만 라페슈는 아랑곳없이 흥분한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근처에 있었어. 근처에……!”
‘마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라페슈와 함께 다닌 후로 언제나 그랬듯 에사디엔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감시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