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여기가 마지막이라며 들어간 가게는 겉보기와 다르게 내부가 넓었다.
‘불법 확장 마법이군.’
내부를 확장하는 마법은 건축물의 내구성을 저하하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그 외에 다른 위반 사항은 없는지 둘러보던 에사디엔의 귀에 노인 특유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걸 보고 계셨구려.”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에사디엔이 놀라 몸을 틀었다.
에사디엔에게 말을 건 사람은 허리가 굽어 키가 그의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노파였다.
그녀는 홀홀 웃으며 다소 떨리는 손으로 선반에 있던 유리병 중 하나를 집어 에사디엔에게 건넸다.
딱히 이 병만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파의 말에는 정체 모를 힘이 있어 얼결에 받아 든 에사디엔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무엇으로 만든 겁니까.”
방금 닦은 것처럼 먼지 한 톨 없는 유리병에는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노파는 키들키들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인지는 묻지 않으시는구려. 그건 사랑의 묘약이라네.”
“사랑의, 묘약?”
“선물이니 가져가요. 백 일 동안 하루에 한 방울씩 마시면 사랑이 이루어질 테니까. 단.”
노파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낮아졌다.
“한 방울보다 더 많이 마시면 부작용이 있으니 잊지 말고.”
에사디엔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이런 종류의 ‘묘약’이란 것은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런 경고를 들으니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입구가 넓은데 어떻게 딱 한 방울씩만 덜어낸다는 말인가? 효과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서 괜한 말을 덧붙이는 것이 뻔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군소리 없이 품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무언가 수상한 것을 집어넣었음이 분명했다.
“여기도 허탕이네요. 이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요.”
돌아서자 에사디엔을 기다리고 있던 라페슈가 풀 죽은 얼굴로 말하며 먼저 가게를 나섰다.
그러나 허탕이라는 말과 달리 이번에도 에사디엔은 그녀의 옷 안에 또 다른 주머니가 들어가는 장면을 본 뒤였다.
조금 더 짙어진 의심과 함께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에사디엔에게 노파가 인사를 건넸다.
“잘 가시게나, 막내 황자님. 이제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날을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게요.”
“무슨…….”
일부러 모습을 감추고 다녔는데, 어떻게?
놀란 에사디엔이 돌아봤지만 노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음 날, 에사디엔은 기사단을 끌고 마법가를 휩쓸었다. 전날 돌아보며 위법 사항을 발견했던 상점의 주인들을 한 명 한 명 잡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단 한 군데, ‘사랑의 묘약’을 받았던 곳만큼은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황자님, 말씀하신 위치에는 건물이 없습니다.”
“뭐라? 분명 이곳에…….”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겼지만 에사디엔은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억지로 끼인 것처럼 보이던 작은 가게는 어떤 흔적조차 없었다.
밤사이 무언가로 들어낸 것처럼 잡초가 무성한 공터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 * *
황자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라망드를 마차 안에 두고 혼자서 내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항상 내리던 자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다.
‘우리 마부는 언제나 한 발자국의 차이도 없이 세우는 주차의 달인인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어?”
생각했던 말이 귀로 들려오자 당황해서 땅을 디디려던 발이 순간적으로 삐끗했다.
‘으악! 넘어진다!’
뒤따를 충격을 각오하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익숙한 향기가 끼쳐오며 단단한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미뉴엘.”
아, 이 향기. 이 온기. 이 목소리.
“에사디엔……!”
정말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동안 서운해하고 눈물지었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구나.’
단단한 등을 꽉 껴안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맞닿은 몸이 뜨거워졌다.
‘사람 몸이 무슨 버튼형 핫팩도 아니고, 아무리 늦여름이라도 이렇게 갑자기 열이 날 수가 있나?’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잔뜩 밝혀진 조명들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림자가 드리워진 탓에 그의 표정조차 흐릿하게만 보였다.
“해가 졌는데. 이런 시각에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이 되어서 왔어요. 아까…….”
마법 학교 앞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에사디엔은 나를 떼어내며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자택이 아니라 여기로 왔다고? 어째서?”
“어째서냐니? 그럼 당신은 반대 상황이면 그냥 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그건…….”
“참고로 정답은 아니다, 예요. 반대 상황이 생기면 꼭 대공저로 오세요. 황자궁에서 혼자 맞서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미뉴엘.”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약속해 주세요.”
“…그러지.”
별다른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에사디엔이 내 말에 고마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걸 깨야 한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갈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랬다가는 또 후회할 게 뻔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황자궁 시종이 전부 바뀌었던데요.”
“원래 있던 사용인들은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다.”
“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에사디엔과 사이도 나빠 보인 적 없다. 그런데 갑자기 근신 처분이라니?
에사디엔은 망설였지만 내가 다그치는 것을 견디다 못해 결국 실토했다.
“실은 손님이 먹은 음식에서 독이 발견되는 문제가 있었다.”
“독이요? 에사디엔, 당신도 먹은 건 아니죠?”
에사디엔은 그의 얼굴을 쓸며 떨리는 내 손을 잡고는 살짝 웃었다.
“나는 괜찮다. 시종들도. 그저 손님만 잠시 복통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근신 정도로 처분이 내려진 것이로구나.’
정말 독이었다면 황족을 보필하는 데 소홀한 죄로 다들 목이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이 지나가자 다른 부분이 걸렸다.
황자궁의 손님이라고 해봐야 나 아니면 테오도르인데, 나는 에사디엔을 만나지 못했고 테오도르는 로콰이트를 떠난 상태다.
그러니까 즉, 그 손님이라는 게.
“셀레스테 영애로군요?”
“…그래.”
부정할 생각도 없구나.
“요즘 계속 셀레스테 영애와 함께 다니셨던 건가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말할 수 없다.”
“황태자 전하께 받은 임무 때문인가요?”
“그래.”
하. 기가 막혀서 웃음이 다 나왔다.
“전하께서는 당신한테 맡긴 일이 없다고 하시던데요.”
“그걸 전하께 직접 확인한 건가?”
에사디엔은 잡았던 손을 뿌리치듯 놓고 뒤로 물러섰다.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얼음장 같은 얼굴이었다.
‘뭐야. 지금 화내는 거야? 자기 말 안 믿었다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거짓말을 하지 말든가!
“언니하고 함께 뵈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에요.”
나는 에사디엔이 멀어지는 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지만 그는 그보다 더 물러섰다.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멀어지는 짓이 두어 번 반복되니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나!
“대체 뭐예요? 애정이 없더라도 신뢰는 있어야 한다면서요. 저는 당신이 셀레스테 영애하고 다니는 거 싫단 말이에요!”
빽 소리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리고 예쁜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자님, 아직이신가요?”
에사디엔의 마차 창문 밖으로 라페슈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몇 발짝 떨어지면서 그제야 에사디엔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황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수수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마치 신분을 숨기고 돌아다니다 온 것처럼.
…우리가 호수에 갔던 그 날처럼.
우리 마차가 원래 자리에 주차하지 못한 것도 먼저 서 있던 에사디엔의 마차 때문이었다.
“어, 어머나.”
라페슈는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뉴엘 님께서 계신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물론 나는 라페슈의 사과가 필요 없었다.
에사디엔도, 나도 라페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라페슈는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마차 안으로 고개를 쏙 집어넣었다.
예법에 맞지 않는 짓이었지만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그럴 겨를도 없었다.
“윽.”
열기가 확 올라오면서 눈앞이 핑 돌았다. 코끝에는 비린 쇳내가 감도는 것도 같았다.
‘이놈의 울화병, 진짜!’
“하아.”
씁쓸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제안했다.
“셀레스테 영애는 저희 기사를 대동해서 귀가시킬 테니까 황자님은 같이 가지 마세요.”
“그대, 지금 내게 명령하는 것인가?”
에사디엔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열이 오르면 오를수록 에사디엔은 반대로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다니지 말라는 게 명령으로밖에 안 들리세요?”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머리가 둥둥 울리며 뭐라도 집어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동시에 물어 무엇하겠느냐는 자포자기적인 심정도.
“그대는 요즘 내게 화내는 모습만 보여주는군.”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웃는 모습을 보여줄 틈은 줬고?’
밀어내고 감추기만 하면서. 절로 시선이 뾰족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황자님은 제게 뭘 숨기는 모습만 보여주시는군요.”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불안해하던 에사디엔은 어디 바다 건너 먼 나라로 떠난 것만 같았다.
“그대는 내게 숨기는 것이 없나?”
그 질문.
그 떠보는 듯한 질문은 이미 홧홧하게 뜨거운 가슴 속에 다시 불을 놓는 것 같았다. 메마른 겨울 산에 불길이 번지듯 손끝이며 눈시울까지 확 뜨거워졌다.
언성이 절로 올라갔다.
“제가 숨길 게 뭐가 있어요? 다 드러내서 보여드리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부!”
좋아한다고 했잖아.
사랑한다고, 내게 오라고 했잖아.
그렇게 다 보여줬는데도 왜 이렇게 된 걸까? 에사디엔은 날 의심하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것과 함께 얇은 장갑 아래 감춰진 손바닥이 덴 듯 화끈거렸다. 꽉 말아 쥔 손이 떨어지는 것을 따라 에사디엔의 푸른 시선도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선물한 장갑이군.”
“…그래요.”
에사디엔이 준 거라고 몸에서 떼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조차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한번 벗어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