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네?”
생각지도 못한 화제 전환에 나는 살짝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했다.
“장갑을 벗고 내게 손을 보여주겠나.”
“갑자기 손을요? 왜…….”
“내게 숨기는 게 없다고 하지 않았나.”
숨이 턱 막혔다.
‘안 돼, 이것만은.’
신성력으로도 흐려지지 않는 화상 자국은 미뉴엘 카르이넨의 아름다운 몸에 단 하나 존재하는 커다란 흠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아. 절대로.’
특히나 에사디엔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흉터를 보는 순간 그의 눈매가 일그러지고 경멸하는 빛을 띨까 무서웠다.
극심한 공포는 몸 전체를 누비던 열기마저 잡아먹었다. 오로지 코끝만 여전히 뜨거웠다.
“미뉴엘.”
나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중에… 나중에요. 지금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도중 뜨끈한 것이 인중을 가로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미뉴엘!”
에사디엔의 눈썹이 선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화…내는 건가?’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에 숨을 훅 들이켜던 때였다.
아까와는 반대로 내가 애써 벌려둔 거리를 에사디엔이 단숨에 좁혔다. 뒤이어 코끝에 부드러운 손수건이 닿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알았으니 진정해라. 다음에 보여줘도 괜찮으니까.”
어두웠지만 에사디엔의 진녹색 손수건이 검정에 가깝게 젖어 드는 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놈의 몸뚱이.’
결국 또 피를 봐버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쉬다가 돌아가라.”
“황자님께서는요?”
대답 대신에 에사디엔의 시선이 라페슈가 탄 마차로 돌아갔다.
하하…….
“그렇군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맥이 탁 풀렸다.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그러면서 날 돌아보며 하는 말에, 마지막 남은 참을성마저 휘발되어 버렸다. 내가 무슨, 소박맞은 안방마님도 아니고!
“아뇨. 됐습니다.”
손수건째로 에사디엔의 손을 떼어냈지만 곧 다시 피가 주르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피는 많이 토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생소한 증상이었다. 또 들썩이려는 불안감을 꾹 누른 나는 손수건만 빼내 코를 눌렀다.
“손수건, 세탁해서 돌려드려요?”
“상관없다.”
아. 그러시겠지. 손수건 핑계로 만나지 않는 편이 편하겠지, 당신은.
“황자님의 고귀한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사디엔의 눈썹이 눌리듯 일그러지는 걸 보니 왜 비꼬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 혹시 정신을 잃기라도 하면.”
“아뇨.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네요.”
나는 에스코트도 없이 마차의 계단을 성큼 올라 문을 열어젖혔다. 안쪽에 앉은 라망드를 보고 에사디엔의 얼굴이 더없이 선명하게 굳었다.
“플렌드나의 사제.”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님.”
둘이 인사를 하건 말건 나는 라망드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에사디엔과 내 눈치를 살피던 라망드가 덧붙였다.
“늦은 시각이라 걱정되어 따라왔습니다. 미뉴엘의 상태를 보니 그러길 잘한 것 같네요.”
라망드의 신성력이 몸을 감싸자마자 코피가 멎고 열기가 가라앉았다.
“하……. 고마워, 라망드.”
비로소 편안한 숨을 내쉬는 내게 에사디엔이 추궁하듯 말했다. 조금 전 라망드가 설명했던 건 그에게 전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뉴엘, 그대는 내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그대의 마차에도 다른 사람이 타고 있잖은가?”
“뭐라고요? 지금 누구한테 라망드를 갖다 붙이시는 거예요?”
“뭐가 다르지? 플렌드나의 사제도, 셀레스테 영애도 각자의 친구이지 않나.”
그리고 잊었다는 듯 덧붙이는 말이 굴러 나왔다.
“둘 다 이성이고.”
“그게 무슨……. 친구라고요? 라페슈 셀레스테가 황자님의 친구라고요? 진심이세요?”
내가 또 잔뜩 열을 올리는데도 에사디엔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절부절못하던 라망드가 나를 다독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황자님, 미뉴엘이 지금 감정적으로 구는 건… 조금 지나면 분명 후회하고 사과드릴 겁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나와 에사디엔의 시선이 동시에 라망드에게 꽂혔다.
“왜 네가 용서를 빌어?”
“사제여, 그대가 감히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놀랍게도 에사디엔은 라망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망드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하.”
이제는 나도 정말로 화가 났다.
실망스러워서도, 불안해서도 아니었다.
에사디엔은 자신에게 수작 부리는 사람도 못 알아보면서 그 여자와 내 생명의 은인인 라망드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았다.
‘감히’라고? 그가 한 짓이야말로 ‘감히’였다.
“좋아요. 가세요, 황자님. 그 소중한 친구한테 가버리시라고요!”
빽 소리친 나는 에사디엔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계단에서 내려갔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고 마부석 쪽 벽을 세게 두들겼다.
“짜증 나. 짜증 나…….”
마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나는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으며 발을 굴렀다.
‘영락없이 속 좁은 여자가 되어버렸잖아.’
다들 이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수군거릴 것이다.
친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이제 황자님 곁에 누가 다가가겠느냐고.
“미뉴엘, 그만.”
라망드가 천천히 내 손을 머리에서 떼어내고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이거였다.
“미안해, 미뉴엘.”
“네 탓이 아닌데 왜 사과를 해?”
그래. 이건 에사디엔이 나쁜 거다. 라페슈를 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사람이 나쁜 거라고!
“멍청이! 라페슈가 자기를 탐내는 줄도 모르는 바보 천치!”
다시 발을 쾅쾅 구르자 라망드는 난감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니 내가 더 미안했다.
‘우리 라망드는 미래에 대사제님이 될 몸인데. 감히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나 듣게 하고…….’
하아. 또 한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라망드.”
“뭘?”
“내 용서를 대신 비는 거, 하지 말라고.”
그건 매 맞는 시동이나 할 법한 일이라 아직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곧바로 반문하는 라망드의 얼굴이 마치 소태라도 씹은 사람 같았으니까.
“그러면 안 돼?”
“뭐?”
“친구잖아. 아니야?”
라망드는 가끔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 맹목적으로 변하고는 했다. 물론 나도 라망드에게 뭐든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소중했지만…….
“아니, 내 말은.”
나는 잠시 손을 설레설레 내젓다가 라망드의 손등 위로 포갰다.
“우리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잖아. 안 그래?”
그제야 라망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손을 뒤집어 내 손을 꼭 잡은 그가 내 쪽으로 가만히 얼굴을 기울였다.
“미뉴엘, 나는 너를 응원하니까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뺨 위로 라망드의 미지근한 한숨이 닿았다.
“네가 정 힘들다면 소공작님이나 작은 공녀님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듯해.”
“…파혼하라고?”
라망드는 가타부타 더 말이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조용한 위로에 더욱더 속이 쓰렸다.
* * *
그날 이후로 에사디엔은 연락이 없었다.
‘항상 내가 먼저 찾아갔는데. 너무하네, 정말.’
나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그만 쓰게 웃어버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냥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결국 에사디엔이 옳았던 걸까.’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랑은 유효 기간이 짧아서 믿을 수 없다던 그 말이.
우울해져서 설탕도 넣지 않은 찻잔을 의미 없이 휘젓던 내게 어머니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미뉴엘, 마법 학교에 입학할 학생을 후원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아, 네.”
“인재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잘했다.”
청구서가 벌써 날아갔나? 갸웃거리는 내게 곧 답이 건네졌다.
“어제 우연히 대마법사님을 뵈었다.”
“대마법사님이요?”
갑자기 대마법사는 왜?
원작에서 대마법사는 중반부터 등장하는데, 라페슈의 스승이 될 사람이었다.
나와 전혀 접점이 없다는 말씀. 그러니 나는 더 아리송해졌다.
“브라시다스 님이 오래 은둔하기는 했구나. 내가 어렸을 때는 그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브라시다스. 그 이름을 듣고 나는 예의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렸다.
‘그 마법사가… 아니, 그 사람은 팔로스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했는데?’
그럼 라페슈는?
‘와, 원작이 또 이렇게도 꼬이네.’
원작과 다른 길을 가면서 지금껏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이번에는 조금 미안했다.
…는 무슨.
아주 그냥 깨소금 맛이었다. 헹.
‘라페슈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악역인가 봐!’
그 애는 자기가 대마법사의 제자가 될 운명이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지만 남의 앞날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미뉴엘.”
“네, 엄마?”
“내게 이야기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더구나.”
당장 눈앞에서 어머니가 드물게도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북부에 쌓인 눈처럼 시린 웃음을.
‘으악.’
뜨끔한 나는 찻물을 단번에 삼키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해요. 대마법사님께서 해결해 주신 덕에 아무런 피해도 없었으니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아무 피해가 없었지. 하지만 네가 모르는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작전 지시를 하듯 경직된 말투로 브라시다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그때 저승 버스 같던 마차에는 타지 않았지만 내게는 강력한 현혹 마법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어도 뿌리를 내리고 나면 환각에 시달리다가 결국 홀린 듯이 시전자를 찾아가게 되는 마법.
“그런 것도 가능해요?”
“나도 들은 것뿐이다만. 요즘 선호되는 방식은 아니라고 하시더구나.”
다시 한번 오싹해졌다.
어쩐지 마차가 사라지고 끝난 것이 너무 허술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니. 정말 브라시다스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와,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봐야 해.’
이걸 라망드도 들어야 하는데. 짜식, 팔로스 도와준다고 그렇게 뭐라 하더니.
“그런데 엄마, 혹시 배후로 짚이는 데가 있으세요?”
“확실해지면 말해 주마.”
어머니의 ‘확실해지면’은 범인을 가루로 만든 후라는 뜻이었다. 벌써 등 뒤로 검은 불꽃이 넘실대는 것 같았다.
“후보라도 좋으니 알려주세요.”
괜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들은 후보는 둘.
이황자와 불의 교단이었다.
‘불의 교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전의 통신문에 간략한 경계 주의만 적혀 있었는데, 벌써 어머니가 지목할 정도로 성장한 걸까.
“아가.”
“네.”
“이제 네가 외출할 때는 최고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붙일 것이다. 우리는 너를 집에 가둬두려고 신전에서 데려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하고 말을 잇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저 무사하기만 해다오.”
묵직한 진심에 말문이 턱 막혔다.
“엄마…….”
나는 어머니가 꽉 안아주고 방을 나간 후에야 가까스로 중얼거릴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히려 더 못 나가죠.”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