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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3)화 (33/130)

33화

그날 이후,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얌전히 집 안에만 있으려 했지만 그 다짐은 며칠 가지 못했다.

엘가 언니에게서 로콰이트로 귀성한 테오도르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테오가 이끈 부대가 대패했다고?”

“사막 접경지의 사정이 대단히 나쁘다더구나.”

“기사단이 도적단한테 그렇게까지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원작에서 테오도르가 남부 사막 지대에 파견 나가는 건 미뉴엘과 결혼한 이후였다. 그나마도 도적 토벌이라 거의 라페슈와 만나기 위한 장치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테오도르의 부대가 박살이 났고, 그는 상심한 나머지 두문불출하는 중이라니.

‘술독에 빠져 있으려나.’

얄팍한 관계지만 신전에서 나온 뒤 사귄 첫 친구라고 걱정은 되는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사들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니까.

“엘가 언니, 언니도 그런 경험이 있어?”

“물론.”

“언니가?!”

무 대신 곰을 깍둑썰기하고 당근 대신 몬스터를 채 써는 언니가?

카르이넨 대공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인정받은 언니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엘가 언니는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손가락 하나로 톡 쳤다.

“너는 항상 나를 과대평가하는구나.”

그야… 내 기준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건 우리 엄마고, 엘가 언니는 엄마 다음으로 센 사람이니까.

아니, 이게 가족 버프가 들어가서 그런 게 아니에요. 진짜 세다니까?

“옛날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언니는 웃는 얼굴 그대로 늘씬하게 꼰 다리 위에 손을 늘어뜨렸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냉랭한 표정이라고 여길 테지만 나는 그게 언니 나름의 편안한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오랜 고뇌 끝에 그 패배의 날을 털어냈다는 것도.

“음, 어땠어? 그때 기분이.”

“굉장히 힘들었지. 병사들이며 휘하 기사들이 전사한 건 다 나의 책임이니까. 판단을 잘못 내린 탓에 많은 생명을 잃었으니.”

겨우 살아남은 병력을 그러모아 복귀한 언니는 어머니 앞에서 칼을 바치며 목을 쳐달라고 했단다.

당연히 어머니는 단칼에 거절하셨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 심지어 전쟁의 신조차 ‘불패’라는 수식어를 쓰지 못했다고.”

그러므로 미물인 인간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훈련, 정찰, 수많은 작전.

그 모든 것을 그러모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

상대가 몬스터든 인간이든 서로 목숨을 걸 뿐. 그 끝에 패배가 찾아오더라도 결과를 받아들인다.

책임감은 수많은 목숨을 휘두르는 자가 당연히 짊어지는 것이니 죽음으로 도망칠 생각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렇게 말씀하셨단다.

전해 듣기만 했는데도 어마어마한 박력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와……. 우리 엄마 강철 멘탈…….’

북부를 평정한 카르이넨 대공, 많은 이가 우러르는 지배자의 일면을 본 기분이었다.

‘엘가 언니도 엄마 못지않고.’

그때가 열아홉 살이었다는데,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패장의 목을 쳐주십시오!’라고?

으아아.

나였다면 살려달라는 말도 못 꺼내고 엉엉 우는 게 다였을 거다.

“언니…….”

“음.”

“존경해. 우리 언니 최고.”

엘가 언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애교 부리는 거냐.”

“진심이거든? 형부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가 언니랑 같이 잘래.”

“쥬엘라가 질투하겠군.”

“질투만? 말 안 해줘도 알아서 올 거 같은데 뭐.”

어지간히 바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쥬엘라 언니가 자매들끼리 보내는 시간을 놓칠 리 없었다.

동의한다며 낮게 웃은 엘가 언니는 곧 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사단 오후 훈련 시각이다.”

“수고해.”

“밤에 보자, 아가.”

내 머리를 쓰다듬은 언니가 돌아섰다.

열린 문틈으로 발뒤꿈치를 착 붙이며 부동자세를 취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카르이넨 가문의 기사들은 대단하기로 이름났지만 언니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압도적이었다.

숏컷에 가깝게 짧게 자른 머리칼 덕에 곧은 목과 곧게 편 어깨, 등이 아름답게 돋보였다.

“단련한 몸에 아름다움이 깃드는 거지. 암, 역시 플렌드나 님은 뭘 좀 아신다니까.”

* * *

언니가 떠난 뒤에도 나는 잠시 나른한 햇살 아래 앉아 있다가 이내 트레고스난 백작저로 향했다.

“전쟁의 신조차 불패라는 수식어를 쓰지 못했다…….”

그 말을 잊지 않도록 읊조리면서.

정말 멋진 말이다. 죽음으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은 물론 차마 못 하겠지만.

그리고 백작저에 도착해 테오도르를 보자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절대로 하면 안 되겠다.’

테오도르의 얼굴은 초췌했지만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깊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테오도르는 내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다. 잔뜩 갈라진 입술을 들어 올리며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시도할 때는 찡하기까지 했다.

“미뉴엘 양,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나는 그럭저럭 지냈는데…….”

네가 너무 안쓰러워!

울상을 짓자 테오도르가 웃는 시늉을 포기하고는 턱을 살짝 긁었다.

“들으셨군요. 하긴, 소문이 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지요.”

“아니, 아니, 아니야! 그래서가 아니라!”

냅다 손을 저었지만 테오도르는 이미 우울의 늪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거기서 몸이라도 지질 기세였다.

‘대체 어떻게 위로를 시작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먼저 이렇게 운을 띄웠다.

“저기 테오, 혹시 우리 큰언니를 알아?”

“제국에서 카르이넨 소공작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뭐……. 주로 북부에서 활동하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나도 모르게 테오도르가 그랬던 것처럼 턱끝을 살며시 긁었다.

“있잖아, 테오. 우리 언니도 처음 부대를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대. 다 자기 탓 같아서 한참이나 괴로워했대.”

하지만 엄마는 사랑하는 장녀라고 해서 마냥 보듬지만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따끔하게 조언했다.

“…하하.”

전쟁의 신에게도 ‘불패’라는 수식어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멍하니 듣던 테오도르가 마른 웃음을 흘렸다.

‘여, 역시 평범한 위로를 해야 했을까?’

이제 와서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화를 내지도 않고 덤덤하게 물었다.

“다음은요?”

“으, 응?”

“다음 이야기도 있겠지요.”

어떻게 알았지?

“언니는 귀환하자마자 어머니께 목숨을 거둬달라고 했대.”

그리고 이어진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테오도르는 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제가 바라던 말이었습니다.”

“어?”

기사들이란 다들 이렇게 박력 넘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까?

당황한 나를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니 이제야 원래 내가 알던 그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런 말은 부끄럽지만, 외아들, 게다가 유일한 트레고스난 검법의 계승자라고 떠받들기만 해서 말입니다.”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막내인 나도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면서 어화둥둥 해주는데, 유일한 후계자에 지금껏 무패였던 중부의 유망주였다니 그럴 만도 하지.

“테오, 자라나는 새싹이었구나?”

쟁쟁한 장군이나 군벌로 유명한 영주들은 다 중년을 넘어섰다.

엘가 언니도 올해 서른, 게다가 이미 인정받은 지 오래이니 테오도르와 완전히 같은 세대로 묶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또래 중 에사디엔이 있다지만 황제, 황태자 이외의 황족은 관직을 받을 수 없다는 법이 그를 얽매고 있었다.

그러니 테오도르야말로 다음 세대를 이끌 유망주였다.

“그럼요.”

이제 웃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졌다.

테오도르는 사막을 떠올리는 것인지 시선을 먼 곳으로 두었고, 나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잘 풀려가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기사가 아니니 많은 목숨을 짊어진 무게를 알 수는 없지만 친구로서 언제라도 달려와 위로해 줄 수는 있었다.

“아아. 손님을 두고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군요.”

“그냥 손님이 아니라 친구잖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삼황자님하고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역시 커플은 어쩔 수 없군요.”

장난스레 던져진 말에 반사적으로 뺨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그런 나를 보고 테오도르가 의아하게 물었다.

“미뉴엘 양? 황자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냐. 이, 일은 무슨.”

“흐음.”

테오도르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내가 손을 팔랑거리며 내젓자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어흠. 로콰이트에서 남부 끝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마법사들이 열어준 게이트로 이동하더라도 꽤 피로하긴 합니다만.”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변경백의 후계자가 전사했고, 본인도 큰 부상을 입어 와병 중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한두 번 도우러 가면 끝날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변경백의 상처는 쉽사리 낫질 않았다. 사제를 불러와야 그나마 느리게 차도가 보일 뿐.

그러는 사이에 다른 영지에도 하나둘씩 ‘불의 교단’이라는 무리가 출몰해서 각자 앞가림하기 바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남부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고 했지.’

“놈들은 ‘불’에 바치겠다고 파괴를 일삼고, 그 자리에서 큰불을 냅니다.”

이미 터전을 잃은 백성이 많아서 변경백을 대행하는 가신들은 그들을 수용하는 데만 해도 골머리를 썩인다고 했다.

“지금까지 저는 트레고스난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파견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형식을 취했습니다만.”

테오도르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한지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그들의 소행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정말 그곳에 상주하게 될지도 모릅, 아니 솔직히 말해서 조만간 이삿짐을 싸게 될 것 같군요.”

“저기 테오, 이런 거 나한테 말해도 되는 거야?”

지휘관 전출, 이런 건 보통 기밀 아닌가?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안 됩니다. 하지만 미뉴엘 양은 제 친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테오도르는 날 보며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말끄트머리가 완전히 잘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친구는 카르이넨 대공가의 일원이죠.”

어느새 웃음은 자취를 감추었다. 테오도르는 진지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라페슈에게 차여서 술이나 마시겠다고 하던 사람하고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괴리감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래야 남자 주인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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