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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4)화 (34/130)

34화

원작에 나오던 테오도르의 일면이 비로소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을 흘리며 이어 물었다.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대공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가서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면 변경백은 물론이고 폐하께도 좋지 않습니다. 북부의 군벌까지 끌어다 쓴다고 광고하는 셈이니까요.”

여기에 이르러 나와 테오도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네.”

“어렵죠.”

그래. 어렵다.

이렇게 이것저것 재보며 머리 쓰기가 싫어서 신전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로콰이트로 오고 나니 전처럼 무엇에도 얽히지 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볼까, 테오.”

나는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도 느꼈겠지만 나는 우리 집에서 오로지 귀염받기만 담당하는 사람이라서.”

“미뉴엘 양, 어째서 그런 말씀을…….”

몇 초간 눈을 깜빡이던 테오도르가 놀란 듯 입을 열었지만 나는 일단 손을 들어 막았다.

“들어봐.”

지금 이 위치에 엄청 만족하고 있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잘 몰라. 어떻게, 뭘 도와야 할지도, 얼마나 도와야 할지도.”

테오도르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런데도 내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한번 만나볼래?”

“누구를, 말입니까?”

“우리 엄마하고 언니들.”

만약 테오도르가 나를 로비용 사다리로 취급했다면 당연히 참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정말로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남부 지역, 나아가 프레세리아 제국의 앞날을, 진지하게.

‘역시 만고의 충신 남주답다.’

그런데 대체 바람은 왜 피웠는지. 나라에는 충성하면서 아내한테는 왜 충성 못 해?

“고, 고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테오도르는 격하게 반응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정도로 흥분한 그를 진정시켰다.

“자리는 마련해 줄 테지만 긍정적인 답을 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일단 그분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입니다.”

즉답이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눈을 굴리던 테오도르가 물었다.

“저, 무슨 선물을 들고 가야 할까요? 귀한 시간을 내주시는데.”

선물은 무슨.

뇌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분명 알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을 정도로 기쁜 게 분명했다.

‘전생식으로 생각하면 워런 버핏과의 식사쯤으로 느껴지는 거려나.’

그런 대단한 사람들과 같은 핏줄이다, 내가.

나는 새삼스럽게 내가 문 티타늄 수저를 자각하며 말했다.

“그냥 몸만 와.”

“예? 그래도……. 하긴, 제가 가진 게 별로 없으니…….”

머쓱하게 중얼거리던 테오도르가 문득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그런데 아까 그거, 장가오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씀이겠어? 넌 내 타입 아냐.”

몇 번 말해야 하니?

“우와.”

테오도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장난이었습니다만? 제가 감히 황자님께 덤빌 생각을 하겠습니까?”

‘요즘 일부러 에사디엔 생각은 안 하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테오도르를 만나며 에사디엔의 이름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거였다.

입 안에 남은 차향이 아까보다 쓰게 느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씩 웃었다.

“그런 장난 또 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마음이 다소 까끌까끌해졌더라도… 어두웠던 친구의 낯빛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면 남는 장사지, 뭐.

게다가 혹시라도 남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질 경우 테오도르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한 정보원이 되어줄 터였다.

* * *

테오도르 위로하기, 대성공!

덧붙여 테오도르에게 도움이 될 자리까지 주선하기로 했으니 게임으로 치면 3성 달성에 별 하나 더 붙여줄 만한 만남이었다.

그런고로 이후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는데, 문제는 백작저에서 나오기 직전에 일어났다.

테오도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현관홀로 나오자 바깥에서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마차를 기다리는 영애들이 보였다.

“이런, 방금 티 파티가 끝났나 봅니다. 조금 기다리셔야겠는걸요.”

“백작 부인께서 여신 거야? 기다리는 동안 인사라도 드리지 뭐.”

“어머니가 아니라 이종사촌 동생이요. 그 아이도 올해 성인식을 치러서 잠시 저희 집에서 지내고 있거든요.”

“그렇구나…….”

맞장구치는 내 얼굴은 애매하게 굳어 있었다. 백 미터 밖에 있어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강렬한 빨간 머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테오도르의 목소리도 떨떠름해졌다.

“아아, 셀레스테 영애도 왔군요. 인사…할까요?”

“됐어. 그냥 가게 두자.”

껄끄러운 사이에 뭘 굳이. 조금 치사한 짓이었지만 못 본 체하는 게 셋 모두에게 좋았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라페슈가 기다리던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테오도르를 질질 끌다시피 할 정도로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이런 씨…….”

입 안에서 쌍시옷이 마구 굴러다녔지만 가까스로 넘기고, 대신 씹다가 너덜너덜해진 이름을 내뱉었다.

“에사디엔.”

그가 마차 문을 열고 나와 라페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에, 아니! 화, 황자님께서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테오도르마저도 얼떨떨한 듯 말을 더듬었다.

“…….”

우리를 훑어보는 에사디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마 나하고 마주쳐서 기분이 나쁜 거야?’

이 와중에도 내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라페슈를 에스코트하기 싫어서 억지로 나온 것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심해.’

나를 보고도 라페슈의 손을 떼어놓지 않은 꼴이 눈앞에 뻔히 펼쳐졌는데 그따위 희망이나 품는 내가 한심했다.

나는 보란 듯이 테오도르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

“대체 누구 약혼자이신지 모를 지경이네요.”

아니, 약혼자라도 이렇게까지 극성을 부리지는 않는다.

티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에서 서프라이즈! 하고 튀어나오는 남자라니? 아주 그냥 달콤하다 못해 혀가 녹아버릴 지경이다.

“황자님께서는 제가 드린 말씀은 모조리 흘려버리셨군요?”

손이 모멸감으로 파르르 떨렸다.

모멸감. 그래.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배신감보다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크게 느껴졌다.

원작의 미뉴엘이 테오도르의 외도를 알아채고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저, 이건 제가…….”

라페슈가 뭐라 끼어들려고 했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마저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에사디엔은 내 눈길이 닿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그녀를 마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빈정거렸다.

“사제에 이어서 이번에는 테오인가. 그대도 어지간하군.”

“황자님!”

경악한 테오도르가 에사디엔을 크게 불렀지만 그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그 침착함이 옮은 것처럼 나도 점점 더 차분해졌다.

“에사디엔.”

삭이고 남은 울분은 눈물샘에 고여 에사디엔이 나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 툭 떨어졌다.

다 트인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세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흘린 눈물은 이토록 망신스러웠다.

이왕 흙탕물을 뒤집어썼는데 비를 맞는다고 더 열받을 필요는 없는 법이다. 나는 내친김에 지난번에 묻지 못했던 것을 확인하기로 했다.

“아니죠?”

“뭐가 말인가.”

“셀레스테 영애하고 당신… 그런 거 아니죠?”

“…….”

긍정도, 부정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에사디엔의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깊은 곳에서는 차갑게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떨리는 내 목소리가 바보 같았다.

“나를 좋아했잖아요. 아니, 최소한 호감은 있었잖아요. 아닌가요?”

이번에는 조금 오래,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모르겠군.”

짧은 대답 후 에사디엔은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마차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탕.

마차 문 닫히는 소리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 * *

플렌드나 신의 축일이 밝았다.

그 말인즉슨 오늘이 내 성인식 날이라는 뜻.

‘귀찮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새해가 밝으면 법적으로는 성인이라 심드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감성은 그게 아니라서 이날이 지나야만 진짜 어른 대접을 해준다.

황태자가 에사디엔에게 ‘성인식이 지나기 전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엄포를 놓을 정도로.

“아, 이런.”

에사디엔을 생각했더니 가슴 한쪽이 또 따끔따끔했다.

여전히 그는 연락이 없었다. 그날 이후 테오도르조차 걱정하는 편지와 꽃을 보내왔는데도.

‘역시 끝난 건가.’

처음에는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에사디엔의 뜻은 명확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자 옆에서 단장을 돕던 하녀가 울상을 지었다.

“아가씨, 머리카락이 당겨지셨나요?”

“아,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래. 다른 생각이나 하자.

나는 눈을 감고 애써 추억을 떠올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축일 준비, 성인식 행사 준비, 밤에는 연회 준비에 바빴는데.’

올해는 성년이라고 손을 놓고 있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어색함을 덜어준 건 사제 수련생의 복장과 비슷한 디자인의 하얀 원피스였다.

입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나도 라망드처럼 그냥 사제나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신성력이 없는 게 오늘만큼 아쉬웠던 적도 없었다.

서멘더에 있을 대사제님까지 덩달아서 그리워졌지만 내가 성인식을 치를 곳은 수도 로콰이트에 소재한 플렌드나 신전이었다.

행사는 남녀가 나뉘어 진행되기에 라망드와 나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져야만 했다.

“이따가 봐.”

“그래. 사고 치지 말고. 좋은 날이니까 얌전히. 알았어?”

으으, 잔소리.

이런 날까지도 잔소리를 하시는 라 첨지께 나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넌 아직도 내가 열두 살 같지?”

“설마.”

라망드가 코웃음 쳤다.

“잘 봐줘야 열 살쯤?”

그러고는 꽁지가 빠지게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야, 라망드 플렌드나!”

돌아보지도 않는 남색 뒤통수를 끝까지 지켜보는 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 쪽에서는 다소 소요가 일고 있었다.

“저분이 삼황자님이시라고?”

“보통은 연회 같은 데 참석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래도 지난번 카르이넨 대공가 결혼식에는…….”

수군거리는 소리는 명백히 에사디엔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괜히 미적거렸잖아.’

할 말도 없는데 만나면 어색해질 뿐이다. 모른 척 자리를 뜨려 했지만 나보다 에사디엔의 걸음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랐다.

“미뉴엘.”

흐아. 왜 알은척이람.

이름까지 불렸으니 어쩔 수 없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돌아서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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