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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5)화 (35/130)

35화

“황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상체를 편 내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웬일로 에사디엔 옆에 라페슈가 없었다.

‘하.’

나는 실소했다. 어느새 나조차도 두 사람을 바늘과 실처럼 엮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 뵈었습니다만. 친구분은 어디 가고 혼자 오셨나요?”

내 목소리는 화살촉처럼 뾰족했다.

나는 성녀처럼 참고 감내하는 삶을 살 생각이 0.01g도 없었다. 그런 삶은 전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마음에 안 들면 파혼해 버리라고 말해 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친구?”

“셀레스테 영애요. 약혼녀인 저보다 더 약혼한 사이처럼 붙어 다니는 라페슈 셀레스테.”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담담하게 나를 관찰했다.

그런 시선에 나는 더 짜증이 났고, 그럴수록 에사디엔을 동요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툭 내던지듯 덧붙였다.

“저는 라망드하고 같이 왔는데.”

- 미뉴엘은(는) ‘도발’을(를) 투척했다!

곧바로 에사디엔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뒤이어 귀 아래에서부터 이어지는 날카로운 턱선이 도드라졌다.

- 효과는 뛰어났다!

“…….”

원한 대로 에사디엔이 특이한 반응을 보였지만 어쩐지 찝찝했던 나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왜 화를 내는 것 같지?’

게다가 잠시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 같던 에사디엔이 꺼낸 말마저 전부 의외의 연속이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어, 어라.

“그대의 소중한 사람에게 심한 말을 했다.”

어라라?

“그대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언제고 설명할 때가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사과가 생소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지금껏 있었던 일들, 특히 자신의 감정을 모르겠다고 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여전히 경계를 지우지 않는 내게 에사디엔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나와 반대로 그의 표정은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그럼 내가 그대를 에스코트해도 괜찮겠나?”

“요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데요?”

“비록 그렇더라도, 나는 그대의 약혼자이니까.”

그 말을 듣자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갑자기 라페슈를 정리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놓치지 않겠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나는 그냥 대외용 약혼자로 쓰겠다는 것인지.

지금 이러는 것도 에사디엔이 원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의무감 때문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미뉴엘.”

하도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가, 에사디엔이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차!’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려 했지만 이미 단단히 잡힌 뒤였다.

‘이런 젠장.’

“어서… 가죠. 늦겠어요.”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나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한숨을 삼키는 내게 다시 에사디엔이 말을 걸었다.

“미뉴엘.”

“네?”

웬일인지 오늘따라 그는 말이 많았다.

“오늘도 이 장갑을 꼈군.”

“아, 네.”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하도 애용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녀들도 자연스럽게 에사디엔이 선물한 장갑을 내밀었으니까.

또 벗어보라고 할까 봐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도 평범한 소감이 이어졌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다.”

“항상 잘 착용하고 있어요.”

“집에서도?”

별것 아닌 질문인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려 했지만 여전히 에사디엔은 단단히 잡은 손을 놔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어쩐지 집요하게 느껴졌다.

“그대는 자택에서도 장갑을 끼고 있었다.”

“놔, 놔주세요…….”

이것 때문이었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에사디엔의 눈에는 동요 한 점 없었다.

문득 그가 이대로 장갑을 찢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추측을 뒷받침하듯 에사디엔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이 아래, 대체 뭐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안 거지?

그런 의문보다도 경멸하듯 내 손을 내려다볼 에사디엔의 표정이 더 먼저 떠올랐다.

그 순간 모든 이성이 휘발되며 손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이거 놓으라고요!”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면 괴력을 발휘하게 된다더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각도 없이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며 에사디엔을 밀쳤다. 그리고 도망치듯 뛰어가는 나를 그는 뒤쫓아오지 않았다.

* * *

본격적으로 성인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플렌드나의 신전답게 성년을 맞은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생을 기원하는 세례를 받았다.

물론 이것도 신분 순이라 여자 중에는 내가 맨 처음이었다.

즉, 남자 중에는 에사디엔이 첫 번째라는 뜻이다. 어쩐지 옆얼굴이 간질간질했지만 꿋꿋이 앞만 보는 내게 사도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오랜만이구나, 막내 공녀님.”

“사도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프레세리아 제국의 대도시마다 고위 성직자들이 머무른다. 말하자면 교구 개념인데, 수도 로콰이트는 사도님이 담당하고 계셨다.

내 물음에 사도님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듣기로는 백 살이 넘으셨다는데 내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가 눈부셨다.

“그런데 우리 공녀님은 영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구나. 바람 앞의 강아지풀처럼.”

“등불이나 갈대가 아니고요?”

“나는 강아지풀이 귀엽더라.”

정말 사도님도 여전하시네.

“티가 많이 나나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그나마 다행…….”

“환히 들여다보인단다.”

아, 진짜.

사도님은 내가 입을 삐죽 내밀건 말건 경건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성수로 내 이마에 하트와 비슷한 플렌드나의 문양을 그려주신 사도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돌아보면 아름다웠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있을 거야. 분명히.”

“…그럴까요.”

에사디엔만 보면 바람 앞의 강아지풀 혹은 등불, 갈대처럼 감정이 널을 뛰어대는데.

나도 모르게 매달리듯 올려다봤지만 사도님은 온화하게 딱 세 음절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다음 분.”

쳇.

엄연히 다음 사람이 기다리는 게 사실이니 더 조를 수도 없었다.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자리에 돌아와 앉자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귓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아,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요?”

“영애도 느꼈어요? 저도요.”

너도? 야, 나도!

내 뒷자리에 앉은 영애들은 사이좋게 대동단결 중이었다.

“평민들하고 같이 행사를 치를 줄은 몰랐네요. 플렌드나 신전에 오래 다녔지만……. 흐응.”

“제 동생도 내년에 성인이 되는데, 다른 신전으로 가라고 해야겠어요.”

그래. 제발 가라. 오지 마. 플렌드나 님도 너희 싫어해.

나는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냄새는 무슨…….’

황금과 신용의 신마저 존재하는 이곳에서는 종교계에서도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수도 로콰이트에 있는 신전이다. 여기 들어올 수 있는 건 헌금을 많이 한 집안사람들이다.

즉 이곳에서 성인식을 치르는 사람들은 일반 평민이 아니라 법조계나 상계 종사자, 혹은 의사의 자제들이라는 뜻이다.

‘소송 걸렸는데 변호인 없고, 상단에서 거래 끊고 아파도 봐주는 사람이 없어져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런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평민이니 냄새 운운하는 건 영애들의 심기가 불편해서일 터였다.

예배를 볼 때도 귀족과 평민의 자리 사이에 단차를 두는데, 이번 행사 중에는 단지 두어 줄만 떼서 앉았으니까.

‘그런 거에 예민할 나이인 건 알겠는데… 그렇더라도 저따위로 굴면 안 되지. 당장 신전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나?’

수군거림은 점점 더 들어줄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쯧.”

입 좀 다물어라, 존재감이라고는 점묘화에 찍힌 점 한 개짜리만 한 영애들아.

심기가 불편해져서 세게 혀를 차자 곧 뒤쪽의 부산스러움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제 좀 낫네.’

나는 만족스럽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당분간은 잠잠할 것이다. 신분 때문에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주지 않으면 저들은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할 테니까.

…한 사람만 빼고.

“미뉴엘 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나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아아……. 라페슈 셀레스테가 있었지.’

라페슈는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 내 옆자리로 옮겨 걱정스러움을 한껏 가장하고 있었다.

“글쎄요.”

“저번에 에사디엔 황자님과 제가…….”

“셀레스테 영애.”

‘삼황자’도 아니고 ‘에사디엔 황자님.’ 심상찮은 사이라고 광고를 해라, 아주.

‘뒤에서 귀 쫑긋거리는 게 안 봐도 느껴진다.’

혀 한 번 찼다고 입 다문 거 보면 모르겠니? 다들 안 그런 척하면서 이쪽에 집중하고 있잖아!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라페슈 셀레스테를 이 신전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성이 있는 인간이니 얌전히 말로 물리치기를 시도했다.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네요.”

물론 라페슈를 들 만한 근력이 없었다는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라페슈는 직접적인 거절도 튕겨내는 티타늄 멘탈의 소유자였다.

“미뉴엘 님, 최근 있었던 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아니, 됐다니까?

“저는 안 들어도 괜찮답니다.”

“제 마지막 부탁이라고 여겨주시고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제 대기실로 잠시만 와주세요.”

성인식을 축하하는 연회도 신전에서 열리기 때문에 참석자들에게는 단장을 할 수 있는 대기실이 주어진다.

“…….”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라페슈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그쪽에서 찾아오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대체 이 여자 주인공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래쪽으로 처진 채 일그러진 눈썹이나 일렁이는 금빛 눈, 살짝 튀어나올락 말락 하는 입술에 한번 눈길을 뺏기자 활화산 같던 짜증이 조금 잠잠해지는 듯했다.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나는 그 매력적인 얼굴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며 단호하게 말했다.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 낭비일 테니까.”

“부탁드려요.”

“셀레스테 영애, 이곳은 자작가 영애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돌아가세요.”

차갑게 말했지만 라페슈는 또 한 번 부탁한다는 말을 되풀이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치겠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왜일까? 라페슈가 주인공이라서?

출구 없는 고민은 결국 흐릿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에사디엔하고 헤어져달라고 하고 싶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면 아까처럼 간절하게 따로 초대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원작의 라페슈는 ‘미뉴엘’과 남의 눈을 피해 단둘이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뉴엘이란 테오도르에게 집착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었으니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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