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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6)화 (36/130)

36화

굳이 원작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라페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나를 감히 테오도르와 이어 보려는 깜찍한 짓에 실패한 뒤로는 밖에서 따로 만난 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이런 요청은 라페슈가 할 법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플렌드나 님의 가호가 닿기를. 그리하여 일생 아름다운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라페슈를 쫓아 보낸 후 뒤죽박죽인 머리로 멀거니 앞만 바라보는 동안에 행사가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청명하게 울리는 사도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잠에서 깬 듯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성인식을 이렇게 보낼 줄은 몰랐는데…….’

그냥 아침부터 내내 기쁠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고 성가대 공연마저 놓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깊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일어나 이미 많이 빈 자리들 사이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에사디엔… 그리고 라페슈?’

문으로 나가는 방향과는 반대쪽, 사람들의 시선이 그다지 닿지 않는 기둥 뒤편에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그저 서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중한 채 속닥거리고 있었다.

‘뭐야…….’

라페슈는 이쪽을 향해 서 있었지만 나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심히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

멈칫했던 나는 그쪽으로 향했지만 그들이 헤어져 각자 다른 출구로 사라지는 것이 더 빨랐다.

졸지에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만나러 가줄게, 라페슈.”

성인식 행사를 다 놓칠 정도로 고민했던 것이 바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단번에 결론이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피하지 않겠어.”

라페슈가 나더러 헤어지라고 하든, 주스를 끼얹든. 그리고 에사디엔의 솔직한 마음을 물을 생각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끝을 본다, 내가.”

대외용 약혼자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오면 반역이고 나발이고 그 빛나는 머리채를 몽땅 뽑아버릴 테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렀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땋아 올리는 것도 순식간에 끝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충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복도 거의 끝에 위치한 라페슈의 대기실 앞까지 다다른 것도.

“내가 이렇게 걸음이 빠른 사람이 아닌데…….”

긴장감을 잊고자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에사디엔의 연회복과 비슷하게 맞췄던 푸른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어라.”

노크하려고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낮은 말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내용은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목소리로 ‘아.’ 한마디만 하더라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에사디엔.’

정체를 깨닫는 순간 모든 긴장과 망설임이 휘발되듯 깨끗하게 사라졌다. 나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환복할 때 치는 가림막을 확 젖혔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이란.

“……!”

누군가와 몸을 밀착한 채로 고개를 한껏 기울인 에사디엔의 뒷모습이었다.

넓은 등에도 가려지지 않는, 물결치는 듯한 붉은 머리칼은 상대가 라페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하… 하.’

가슴 한가운데를 도려내 길바닥에 내던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에사디엔과 눈을 마주쳤던 모든 순간이,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한 가닥 남아 있던 희망과 미련이 끊어지며 저 어두운 곳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일까. 딱딱하게 굳은 나와 눈이 마주친 라페슈가 파랗게 질린 채 에사디엔의 어깨를 밀어냈다.

“미, 미, 미뉴엘 님!”

라페슈는 심지어 옷도 걸치지 않은 코르셋 차림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애인이 환복하는 걸 채 기다리지 못하고 난입해 애정을 나누던 상황이다.

내게는 단추 풀린 것도 보여주기 싫어하던 에사디엔이었는데. 라페슈에게는 대체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기에.

“미뉴엘이라고?”

에사디엔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을 건 듯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나를 돌아보며 놀라고 그 표정이 당황으로 점철된 뒤 라페슈를 노려보는 그 모든 변화가.

그 얼굴을 보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하.”

나는 천천히 장갑을 벗어 세게 내던졌다.

에사디엔이 선물했던 장갑은 마치 결투를 신청하는 것처럼 그의 뺨에 정확히 맞고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듯 크게 벌어지는 에사디엔의 눈을 보며 나는 더없이 활짝 웃었다.

내가 이 꼴을 보고도 너 좋다고 매달릴 줄 알았다면 착각이다 이거예요.

“응. 너 아웃.”

나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 말까지 내뱉은 나는 빙글 돌아 라페슈의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미뉴엘!”

뒤에서 에사디엔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봤을까?’

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손바닥을?

‘…봤겠지.’

그러니까 쫓아오지 않는 거겠지.

“이제 정말 끝이구나.”

원작의 미뉴엘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열렬히 빠져들었다가 여주인공 라페슈에게 빼앗긴다는 점.

괴로워하면서도 상대에게 집착한다는 점.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하……. 그러네. 나 집착했구나, 에사디엔에게.”

그런 점이 싫어진 건가?

“그렇게 싫었으면 넘어오는 척이라도 하지 말지. 나쁜 자식…….”

하지만 물론 원래 미뉴엘과 다른 점도 있었다.

나는 끝난 관계를 붙들지 않는다.

“불태웠으니까 됐어.”

만난 그 순간부터 내 모든 애정을 에사디엔에게 바쳤다. 그야말로 완전 연소였으니 그래. 그걸로 된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엇박자로 덜걱거리는 것만 같을까?

“흑…….”

평소와 다르게 심장이 덜컥거릴 때마다 열기가 홧홧 치솟으며 코끝에 피비린내가 스쳤다. 지난번 황자궁 앞에서 에사디엔과 다퉜을 때처럼.

“우욱.”

나는 울컥 치솟는 구역질에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니, 잠… 웁!”

내 생각이 틀렸다. 지난번보다 훨씬 심각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술에 취한 듯 세상이 비틀렸다.

- 부숴버릴까?

누가 귓가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 마당에 연회고 뭐고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구석에 처박혔던 이성도 지지 않았다.

‘실연했다고 다 부숴버리면 세상이 남아나질 않겠네.’

옳은 말이었다.

“부수는 건, 헉… 패스하더라도, 우욱.”

연회장에서 토하는 꼴을 보이는 것보다 그냥 귀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흘 동안 뱃멀미한 것처럼 울렁거리는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며 내 대기실의 문고리를 잡자마자 다리에서 픽 힘이 풀렸다.

그리고 분명 발아래에 있던 바닥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내게로 쏟아졌다.

‘아니지. 내가 쓰러진 거지.’

나는 피를 토하며 미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완전히 엉망진창인 와중에 또 뜨끈한 액체마저 코에서부터 입술 위로 흐르는 게 느껴졌다.

“무슨 소리가… 아니, 미뉴엘 양!”

“미뉴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뉴엘!!”

엘가 언니의 외침도.

냉정한 언니가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건 처음 들어보았기에 나는 또 웃었다.

‘다행이다.’

라망드가 있으니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기절하기로 했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몸을 태울 것 같던 열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역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활력이 넘쳤다.

‘다섯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해도 멀쩡할 것 같은 기분이네.’

대체 신성력을 얼마나 쏟아부은 건지.

엘가 언니와 라망드, 테오도르는 내 머리맡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들 심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내가 맨 처음 뱉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쓰러지기 전에 몇 번이고 되새겼던 말. 에사디엔에게 장갑을 던지며 떠올렸던 말이었다.

“언니, 나 파혼할래.”

뒤에서 라망드와 테오도르가 동시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엘가 언니는 나를 일으켜 앉히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았다.”

군더더기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조금 당황할 정도로.

“안 말려?”

“그게 네 결정이라면. 쥬엘라도 말했겠지만 너는 무엇을 행함에 망설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 그렇지.

나는 카르이넨 가문의 공식 응석받이니까. 더욱더 마음껏 응석을 부리기로 했다.

“연회에는 언니랑 입장할래.”

“그러자.”

언니가 드레스는 입지 않고 제복 차림을 고수하는 것이 오늘따라 고마울 따름이다.

“고마워. 역시 우리 언니가 최고야.”

나는 언니에게 싱긋 웃어준 후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촌의 파트너로 참석한 테오도르는 여전히 놀라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엉망진창인 에사디엔과 나 사이를 목격했어도 파혼은 꽤 큰일인데 이렇게 선언해 버릴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리고 라망드는.

“라망드?”

그는 반평생을 함께 붙어 지냈던 나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랄까. 환희와 걱정, 분노가 정확히 땅따먹기를 하면 딱 저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표정이었다.

“미뉴엘, 어지럽지 않아?”

그러면서도 내 상태를 묻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아서, 어색해진 나는 몇 초가 지나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어, 응. 고마워……. 네가 있어서 안심하고 쓰러졌어.”

“그거, 내가 없어야 안 쓰러지겠다는 얘기야?”

“아니거든?”

펄쩍 뛰자 라망드가 비로소 웃었다. 내게 익숙한, 바로 그 짓궂은 얼굴이었다.

“트레고스난 경도 사제님들을 불러오느라고 고생하셨어, 미뉴엘. 갑자기 불이 붙었는데…….”

“뭐, 뭐어? 불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불인데. 특히나 요즘 들어서 더더욱!

허공에 코를 킁킁대 봤지만 매캐한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누가 촛대라도 넘어뜨렸나?’

그런데 왜 사제님들을 불러와?

안심하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보기에는, 미뉴엘 양에게서 불이 뻗어 나온…….”

“트레고스난 경.”

엘가 언니가 금세 끊어버렸지만.

“확실하지 않은 말은 꺼내는 것이 아니네.”

찍어 누르는 듯한 눈빛에 옆에서 보는 나까지 조금 겁을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농담을 좋아할지언정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려고 했지만 엘가 언니가 내 옷자락을 들어 올리는 게 더 빨랐다.

“미뉴엘, 연회에 이 옷을 입고 참석할 거냐.”

“아…….”

나는 가만히 치맛자락을 쓸었다. 고심하며 골랐던 연푸른색 드레스는 이미 구겨지고 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끝나 버린 나와 에사디엔의 관계처럼.

“아니지, 물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연회에는 꼭 스페어 드레스를 챙겨 가라던 쥬엘라 언니에게 치얼스.

나는 싱긋 웃었다.

“이건 그냥 버려줘.”

그 한마디에 피 묻은 드레스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새로운 단장도 신속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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