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깨를 모두 드러낸 새하얀 드레스에 가슴에는 엘가 언니의 눈 색깔과 맞춘 커다란 루비 브로치를,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를 잔뜩 엮은 은빛 머리 장식을 꽂았다.
“좋아.”
거울 속에는 사랑스러운 미뉴엘이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채, 쓰러진 일 따위 없었다는 듯 생기 넘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크, 내 얼굴에 내가 취한다.’
약혼자 없어도 예뻐! 내가 최고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발딱 일어서며 기운 넘치게 외쳤다.
“자, 이제 가자!”
테오도르는 사촌 동생의 에스코트를 위해 그쪽 대기실로 돌아간 상태. 다만 라망드는 여전히 언니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다, 미뉴엘.”
쥬엘라 언니의 결혼식 날처럼 그렇게 말해 준 라망드가 내 손을 감싸듯 잡았다. 약간의 신성력과 함께 기운 내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배시시 웃었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라망드도 마주 미소 지었을 때였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간만에 흐르던 훈훈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깨졌다 뿐인가. 문을 열어 방문객을 본 순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스러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자님?”
나는 라망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에사디엔의 모습을 떨떠름하게 훑었다.
‘뭐 하자는 거지.’
에사디엔은 조금 전 버렸던 드레스와 비슷한 색조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손에는 그의 뺨을 쳤던 장갑까지 들고 있었다.
“미뉴엘의 에스코트를…….”
“카르이넨 소공작이 미뉴엘 공녀의 파트너로 함께할 겁니다.”
‘오오.’
시키지 않았는데 에사디엔을 잘도 쳐내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에사디엔은 가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비켜라. 직접 이야기하겠다.”
그가 라망드를 밀치고 들어오려 하자 나는 언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거 빨리 치워버리고 가자.’
엘가 언니는 그것만으로도 찰떡같이 내 뜻을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삼황자님, 라망드 사제의 말대로입니다.”
“소공작.”
“조만간 저희 쪽에서 파혼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파혼……?”
멍하게 초점을 잃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물론 나는 에사디엔을 무시했다.
“지금 파혼이라고 했나?”
좀 더 또렷해진 반문이 다시 한번 튀어나왔다. 동시에 내 팔을 낚아채려던 손을 엘가 언니가 단번에 저지했다.
“황제 폐하의 신하 된 도리로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미뉴엘과 잠시라도 이야기할 시간을…….”
“황자님, 좋은 날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언니가 일으키는 싸늘한 기운에 에사디엔도 드디어 말을 들어먹을 의향이 생긴 듯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서면서도 에사디엔의 시선은 내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엘가 언니와 함께 입장한 나를 보며 연회장에는 한바탕 조용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저도 몰랐습니다. 제 성인식이 이렇게 핫할 줄…….’
그러고 보면 테오도르의 사촌 동생이 열었던 티 파티 참석자들도 여기 있을 터였다.
즉 라페슈의 마차에서 깜짝 선물처럼 튀어나온 에사디엔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뜻이다.
“괜찮으냐.”
엘가 언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엄.”
‘좀 수군거려 봤자 자기들이 어쩔 거야.’
성격대로 하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나는 조금 돌려서 표현했다. 어찌 됐건 내 포지션은 사랑스러운 동생이었으므로 언니의 환상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저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건 나는 카르이넨 공녀잖아.”
그동안 황자 만나느라 잊은 감이 있지만 그랬다.
나는 공녀! 귀족들 사이에서는 머리 숙일 필요 없는 피라미드 꼭대기 입주자!
“잘 컸구나, 우리 막내…….”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엘가 언니의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가까이 서 있던 내게만 들릴 정도로.
“어…….”
대체 언니가 어느 포인트에서 감격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저와 춤추시겠어요, 카르이넨 소공작님?”
“일생의 영광입니다, 카르이넨 공녀님.”
위명을 떨치는 기사답게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이는 간단한 동작조차도 각이 잡혀 멋졌다.
‘엘가 언니는 차갑기만 할 것 같은데 은근히 이런 데 잘 어울려준다니까.’
언니와 춤을 춘 뒤로는 부모님의 지인들, 언니의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테오도르의 사촌 동생과도 안면을 트고 테오도르에 싫다고 도망가던 라망드까지 붙잡아 춤을 추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겨우 앉아 숨을 돌리는 내게 한 무리의 영애들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테오도르의 사촌 동생이었다. 그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밝고 티 없어 보이는 영애였으므로 나는 거부감 없이 인사를 건넸다.
“라리크 영애, 즐기고 있나요?”
“네, 카르이넨 대공녀님! 아까는 감사했어요. 소공작님과 춤을 추다니. 꿈만 같아요!”
“저도 언제나 저희 언니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영애, 이름으로 불러주겠어요?”
“어머나! 그러면 저도 르네라고 불러주세요!”
활발한 르네는 함께 온 친구들까지 내게 모두 소개해 주었다. 그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공녀님은 삼황자님과 약혼하셨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소공작님과 오셨나요?”
“루, 루시엔 양?”
당황한 르네가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물론 루시엔 레비머라는 이름은 꼭 기억해 두기로 했다.
“에사디엔 황자님께서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을 마음에 두셨더라고요. 뒤늦게 알고는 놓아드렸지요.”
어느새 내 주변에는 사람이 꽤 모여들어 있었다. 덕분에 술렁거림이 크게 퍼져나갔다.
“약혼을 깨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고지식하기는.
속으로는 혀를 찼지만 얼굴은 반대로 생긋 웃음을 머금으며 반문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을 계속 사랑해 줄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뭐가 모자라서.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내리신 결정인데. 폐하께서 노하지 않으실까요?”
글쎄. 과연 황제가 대공을 향해 진노할 수 있을까? 고작 애들 약혼을 두고? 게다가 그쪽 과실인데.
피식 웃으며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미뉴엘.”
둘러선 사람들 사이를 뚫고 에사디엔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다른 영식들보다 비교해도 확연히 큰 키에 혼자 반사판을 댄 듯한 미모를 직면한 영애들의 부채가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운데 꽃술처럼 앉아 있던 나는 마지못해 일어나 무릎을 살짝 굽혔다.
“삼황자님을 뵙습니다.”
아무리 은둔자처럼 지낸다고 하더라도 황실의 핏줄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옷자락을 들며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그 모두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왜 자꾸 나타나고 난리람.’
정이 떨어진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었다. 예전에는 반가웠을 그 시선이 지금은 고깝게만 느껴졌으니까.
“미뉴엘, 조금 전 소공작의 말… 그대의 의사도 같은 건가?”
“네.”
간단히 대답하며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허락이야 하든가 말든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서 있는 것도 여간 체력을 잡아먹는 일이 아니었다.
에사디엔은 짐짓 침중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보는 내 눈은 점점 가느다래지기만 했다.
‘분위기 망치지 말고 가라, 좀. 훠이, 훠어이!’
“진심인가?”
에사디엔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양반이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했지만 곧 조금 전 들었던 말이 머리를 스치며 체한 속이 뚫리듯 시원해졌다.
‘폐하께서 노하지 않으실까요?’
대공가는 대대로 황실에 충성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수단만 있다면 더 단단한 동맹을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런 의미에서 혼약은 참 좋은 수단이었다.
애초에 에사디엔이 내게 원했던 것도 딱 정략혼을 유지할 정도의 사이였고. 그러니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카르이넨의 이름과 세력일 터였다.
‘그 외에는 있을 수 없겠지.’
그게 참 괘씸하면서도 고마웠다.
‘거리낌 없이 못되게 굴 수 있겠어.’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이어진 물음에 상냥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대의 진심인가? 미뉴엘?”
“그럼요.”
뻣뻣하게 서 있는 에사디엔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조금 아팠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이런 것을 헤아릴 정도의 세심함조차 없는 남자였다. 그동안 얼굴에 홀려서 눈에 3cm도 넘는 콩깍지가 씌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조하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러니 이제 제 이름은 부르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황자님.”
“…진심이라고.”
움켜쥔 에사디엔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죠.”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놀라워하는 시선들이 내게 쏠렸다.
‘인민재판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급격하게 피곤해졌지만 이미 걸어온 싸움이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장 청초해 보일 법한 각도로 고개를 틀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황자님, 당신은 다른 사람을 만나시며 저에 대한 마음은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수군수군.
“그 사람과의 관계를 여쭈었을 때는 대답조차 않으셨고요.”
속닥속닥.
쑥덕공론하던 청중의 시선은 이제 에사디엔을 천하의 바람둥이로 보고 있었다.
“그, 그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게 거짓말을 하며 다른 여성과 만난 이유를요.”
잠시 기다렸지만 에사디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애들의 부채가 다시 격렬하게 파닥거렸다. 나는 한껏 슬픔을 속으로 삭이는 듯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와인도 코르크가 열린 채 두면 변하는 법이랍니다.”
에사디엔은 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몇 번인가 크게 숨을 몰아쉰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만은 가져가다오. 그대에게 준 것이니까.”
그놈의 장갑이었다.
‘환장하겠네.’
저기에 뭐라도 묻혀놨는지 돌려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깨지면서 전 남친에게 돌려준 선물을 다시 가져가란다. 이 상황에서 대체 누가 그걸 대뜸 받겠어?
“…그러죠.”
네. 제가 받았습니다.
“여기.”
그리고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
“이거, 버려주렴.”
환장할 장갑을 넘겨버렸다.
“지금 이게 무슨……!”
발끈한 에사디엔의 뒤로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라페슈의 모습이 걸렸다.
나는 반갑게 웃으며 그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셀레스테 영애! 여기예요.”
주변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