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8)화 (38/130)

38화

기묘한 분위기에 라페슈는 어색해하면서도 순순히 다가왔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접은 부채로 에사디엔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쪽, 당신 파트너 데려가요.”

“푸흡.”

장갑과 황자의 취급이 다를 것 없는 상황에 누군가가 견디지 못하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게 효시가 된 듯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전 상황을 모르는 라페슈는 영문을 모른 채 안절부절못했지만 나서서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에사디엔이 내게 거짓말을 해가며 만난 여성이 누군지 알아챈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에사디엔은 하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들고 있던 장갑을 홱 낚아채 다시 자신의 품에 넣었다.

“싫어졌다면, 마음이 변했다면 차라리 말로 하지 그랬나.”

그 말에 나는 정말로 놀라서 눈을 댕그랗게 떴다.

바로 한두 시간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도 비슷했으니까.

“황자님, 지금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아까 두 분이 제게 보여주셨던 건 퍽 다른 장면이었는걸요.”

라페슈가 홀딱 벗고 있었다는 말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상상력이란 게 무서운 법이지.’

누군가는 순진한 입맞춤을, 또 누군가는 나서서 말하기도 부끄러울 애정 행각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지금만 해도 뒤쪽에서 울리는 수군거림이며, 간혹 터지는 호들갑스러운 감탄사들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에사디엔은 그 조용한 소란 속에서 한참이나, 한참이나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왜 본인이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난리야?’

누구는 피 토하고 코피 흘리고 기절까지 했구먼.

라페슈는 에사디엔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영애들의 등쌀에 밀려 자리를 빼앗기고 원 밖으로 톡! 떨궈졌다.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릴 정도로 우아하기 짝이 없는 어깨빵이었다.

하기야 권력도 이쪽이 세, 명분도 이쪽에 있어, 게다가 라페슈는 어느 영애라도 경계할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지금 분위기로는 아무나 잡고 라페슈한테 술을 한 통 부으라고 시켜도 얼씨구나 하고 따를 것 같았다.

‘권력이 달긴 달구나.’

이 상황이 재미있는 걸 보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뿐 역시 나는 악역 체질인가 보다.

하지만…….

‘분풀이는 이 정도로만 할까.’

원작 속 미뉴엘의 결말을 반면교사로 삼아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사실 남자 좀 뺏겼다고 상대방 집안을 모래처럼 날려버리는 것도 우스운 짓이니까.

‘사람이 교양 있게 살아야지. 흠흠.’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사라진 쪽으로 빅 엿을 날려준 뒤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

엘가 언니와 라망드가 다가온 건 잠시 후, 영애들이 수다 떠는 것을 듣다가 간혹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질린다고 생각했을 때쯤이었다.

“미뉴엘, 이제 돌아갈까.”

“슬슬 네가 피곤해할 것 같아서.”

둘 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하면 내 착각일까?

“미뉴엘 양, 이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워요.”

“어머나! 나도 마찬가지인데. 마음이 통했네요? 하지만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들어갈게요. 초대장을 보내도록 해요.”

영애들이 붙잡았지만 나는 적당히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정말로 그들의 초대에 응할 거냐고? 글쎄.

르네라면 조금 고민해 보겠지만 나는 저들 사이에 평민들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지껄이던 사람이 섞여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특히 루시엔 레비머의 초대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이제 정말로 성인이 되었다!

한동안 연회며 파티가 우후죽순으로 열릴 시기다.

전생에서는 새해가 밝자마자 스무 살이 된 사람들이 신나서 술집을 찾았는데, 여기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나도 원하기만 하면 사오백 년 된 귀한 술을 뿌리고 다니며 파티 퀸으로 거듭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부지런한 사람이나 하는 거다.

태생이 집순이에 게으른 나는 평소처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시간이 슝슝 흘러갔다.

그렇게 집 안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에사디엔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에 대한 건 전혀 신경을 못 썼어.”

하나에만 죽어라 몰입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듣던 라망드가 심상찮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그래서?”

“그래서 목표를 세워봤다는 말씀!”

[앞으로의 목표]

1. 건강해지자!

2. 미남을 모으자!

“…….”

짠! 하고 눈앞에 들이민 종이를 훑어본 라망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2번… 뭔데……?”

나는 한쪽 손으로 허리를 짚고 나머지 손으로는 테이블 위를 탕 내리치며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라망드, 나는 비뚤어질 거야.”

“그러니까 그거랑 미남이 무슨 상관이냐고.”

사실 2번은 반쯤, 아니 68%쯤 장난이었지만 의외로 라망드의 반응이 격했다.

‘오호라?’

소꿉친구가 장난에 넘어가면 아예 넘어뜨려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말했다.

“당연히 상관이 있고말고. 이제 난 한 사람만 바라보지는 않을 거라는 말씀!”

하지만 연애는 하고 싶다.

아니, 진지한 연애는 피곤하니까 그냥 연애하는 기분 정도만 내고 싶었다. 물론 미남이어야 하고, 미남은 다다익선이다.

“어때?”

내 설명을 들은 라망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미뉴엘 너는 정말… 나날이 새로워. 기발해.”

“그렇지? 좋은 생각이지?”

“칭찬 아니거든? 플렌드나 님도 기절하시겠다!”

“떼잉, 쯧. 시대의 흐름은 역하렘이거든? 고지식해서는.”

“또, 또 희한한 소리.”

하아. 라망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뒤로 몸을 젖혔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라망드가 그 상태 그대로 물었다.

“헤어진 뒤가 더 힘들어?”

“어? 아니. 멀쩡한데.”

여기는 사진 같은 게 없어서 그나마 잊기 쉬웠다. 주로 만나던 곳도 우리 집이 아니라 황자궁이었으니 그를 떠올릴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물론 아직은 문득문득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하게 어리던 미소 같은 것이 생각날 때도 있었다. 다행히 잠깐 속이 아리는 것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 사실을 고백하는 대신 나는 가볍게 말했다.

“괜찮아. 생각해 보니까 첫사랑은 원래 안 이루어진댔어.”

“누가 그래?”

돌연 라망드가 자세를 바로 하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대체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고.”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 보통 그렇게들 말하잖아.”

“플렌드나 님도, 사도님도, 대신관님들도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뭐, 그렇기는 한데…….”

라망드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내게 몸을 숙였다. 그러더니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으르렁대는 게 아닌가.

“네가 황자하고 헤어진 건 첫사랑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둘이 안 맞아서겠지.”

그러고는 자리를 박차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얼마나 세게 문을 닫았는지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

장난치다가 괜히 두들겨 맞은 나는 혼자 남은 채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야, 인마. 집 무너지겠다…….”

뭐지? 쟤 지금 누구 좋아하나?

십 년 내내 붙어 있었지만 라망드가 누군가를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목석같은 애를 함락시킨 사람이 과연 누굴까?

“와! 궁금해! 너무 궁금해!”

안절부절 방 안을 맴돌던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라망드가 나서서 알려줄 확률은 0에 수렴해. 일단은 점잖은 친구답게 조용히 주변을 관찰… 아니, 기다려줘야지.”

내 첫사랑은 망사랑이었지만 라망드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친구니까.

“녀석, 다 컸네.”

바싹 마른 채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눈만 형형하게 빛내던 라망드를 만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인이 되어서 누군가를 마음에 품다니.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종이를 톡톡 쳤다.

[1. 건강해지자!]

넘치는 재산도, 옵션으로 미남도 침대에 누워 골골거리면서는 즐길 수 없는 법이다.

그러려면 일단 내 몸 한구석을 무단으로 점거 중인 정령의 힘 부스러기를 내몰아야 했다.

그리고 또 신경 쓰이는 것은 불의 교단이었다. 이황자야 에사디엔과 헤어졌으니까 더는 나를 노리지 않을 테고.

“‘불 그 자체를’ 받든다는 게 제일 거슬려.”

만약 그게 정령을 뜻한다면 분명 사혼의 구슬 조각 모으듯 내 몸에 있는 것도 쏙 빼먹으려고 할 터였다.

그리고 그 과정이.

‘아이고,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아, 아파요.’

‘네, 네. 조금만 참으시면 끝납니다.’

‘이럴 거면 왜 말하라고 했어요?’

뭐 이렇게 하하 호호 웃으며 진행될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남부 지방에서 애꿎은 사람들의 집이며 전답을 다 태워먹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래서 나는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을 불의 교단으로 상정하고 일단은 정령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고로 내 행동 범위는 자연스럽게 저택 도서실과 플렌드나 신전으로 고정되었다.

* * *

“그래. 결국에는 너도 정령에 대해 알게 되었구나.”

사도님은 흔쾌히 나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다.

“성인식 날 네가 불을 뿜어냈느냐고? 내가 그 순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전 안에서 다른 기운을 느끼지는 못했단다.”

“그랬군요…….”

조금 실망하려는 찰나, 사도님은 강조하듯 다시 말씀하셨다.

“마법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불인 것 같다. 하지만 불을 일으킨 매개도 없었지.”

걸음이 절로 멈췄다.

‘역시 테오도르 말이 맞았어.’

쓰러지기 직전이라 기억이 흐릿했지만 열기가 몸 밖으로 방출되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조절할 수 없는 힘, 그런 건 골칫덩이일 뿐인데.

“직접 발출할 수 있다면 유용하게 쓸 수도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위협을 당했을 때 제 몸을 지킬 수 있잖아요.”

“어머나.”

사도님은 쿡쿡 웃으며 입을 가렸다.

“내가 생각한 건 불꽃놀이였는데 말이야.”

“그것도 좋죠. 하지만… 위험할 때마다 누군가의 뒤에 서기는 싫어요. 혼자 서고 싶어요.”

“미뉴엘, 인간은 서로 기대서는 존재란다.”

초봄의 햇볕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사도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부에서 또 다른 연락이 올라오거든 알려주마. 너무 조바심 느끼지 말고 네 내면과 대화를 해보렴. 생각지 못한 길이 보일 수도 있단다.”

내면과 대화?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네에…….”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시무룩하게 웅얼거리는데도 사도님의 다정한 웃음은 변하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