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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39)화 (39/130)

39화

아리송했지만 사도님이 허튼소리를 하실 리 없었기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내면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가씨,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몸이 결려요.’

내면을 관조하려고 할 때마다 족족.

‘우리 막내, 언니랑… 어머.’

잠이 들어버렸다!

“흐아아암.”

그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명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라망드와 언니들이 날 병든 닭 보듯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편안히 누워서 온몸을 이완하니까 잠이 솔솔 오는 건데…….”

에이, 참.

게다가 책에서 불의 정령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벽에 부딪혔다. 종일 도서실에서 살며 오만 가지 책을 뒤져봐도 정령에 대한 설명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너무 큰 힘을 가진 탓에 스스로 존재를 봉인했고, 그들이 활동할 때는 대재앙이 일어나고… 어쩌고저쩌고.

자세하게 나와 봐야 정령들이 깨어나 활동할 때 일어났던 자연재해에 관한 서술 정도?

“무슨 정령들이 단체로 중2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여기서는 지진이 지각 변동이나 마그마가 아니라 땅의 정령 때문에 일어나는 건가?”

정령 대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나는 대충 주먹 모양으로 묶어 올린 머리를 긁적거리며 도서실에서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곱을 떼기는커녕 세수도 안 하고 도서실에 처박힌 참이었다. 이젠 좀 사람답게 씻어야지.

나는 방으로 향하며 정령에 대해 더 찾아볼 만한 곳을 추렸다.

“황성 도서관이나 마법 학교 도서관, 그도 아니면 우리 영지에 있는 도서관이라도 찾아봐야 하려나?”

마법 학교야 어떻게든 들어갈 방법을 찾는다고 쳐도 황성은 아직 조금 껄끄러웠다.

“역시 우리 영지 본성이 제일 낫겠지? 불의 정령 담당이니까 그나마 자료가 있지 않으려나…….”

중얼중얼.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현관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층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황자님!”

황자니임?

우리 집에서 들릴 리 없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헉. 진짜 에사디엔이잖아?’

기사들이며 집사가 막무가내로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쩔쩔매는 도중 아버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삼황자님을 뵙습니다.”

아버지는 예를 갖추며 허리를 굽혔지만 이어진 말은 전혀 정중하다고 할 수 없었다.

“지난번 뵈었을 때 카르이넨의 뜻은 충분히 전해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며칠 전 가문에서 황실로 정식 파혼장을 발송했다는 이야기는 부모님께 들었다.

에사디엔은 아무래도 그 뒤 방문했다가 내가 모르는 사이 돌려보내졌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황태자 전하의 서신을 전달하러 온 것뿐이다.”

“서신입니까. 제게 주시면 대공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대공이 아니다.”

문득 에사디엔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 시선은 난간을 짚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내게 곧장 날아와 박혔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숙일 뻔했지만, 이어진 말이 나를 뻣뻣하게 붙들었다.

“미뉴엘, 그대에게 보내셨다.”

황태자가 내게 서신을 보낼 일이 뭐가 있지?

엘가 언니의 친구이고 나를 예뻐해 주기는 했어도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꼭 이런 몰골일 때 찾아올 게 뭐람. 하여간 미운 짓만 골라서 해요.’

‘자니?’보다 더 싫은 게 ‘집 앞이야, 나와.’라고요.

나는 불만스러운 속마음을 감추고 에사디엔 앞에서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편 후 조심스럽게 봉투의 봉인을 떼어냈다.

[지금 바로 나를 보러 와다오.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다.]

…목적이 적혀 있질 않았다.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이쪽의 표정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황태자 전하의 요청이니 이유가 있겠지.”

일단 다녀와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금방 단장하고 나올 테니까 문장 없는 마차만 준비시켜 주세요, 아빠.”

그런데 아버지가 미처 집사를 부르기 전, 에사디엔이 끼어들었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 마차는 내가 작은 것을 타고 왔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씻지도 않은 상태로 이제 볼일 없을 줄 알았던 파혼 상대와 단둘이 같은 마차에?

서서히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딸이 아무 사이도 아닌 신사와 둘이서 나서는 것은 아버지로서 저어됩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리며 나를 보는 에사디엔의 시선은 마치 길 잃은 아이 같았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시선을 잘라내듯 등을 돌렸다.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에 대충 옷을 갈아입고 모자라도 쓸 셈이었다.

그러나 에사디엔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 파혼장,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뭐라고요?”

경악한 내가 휙 돌아보고, 아버지가 눈을 좁히며 살벌한 기운을 피워 올리고 있는데도 에사디엔은 꿋꿋했다.

“그러니 그대는 여전히 내 약혼자다, 미뉴엘.”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 * *

나는 에사디엔을 노려봤고, 그는 꿋꿋했지만 황태자가 기다리는 마당에 계속 대치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둘 다 조금씩 양보해서, 나는 수수한 옷을 챙겨 입고 에사디엔의 마차에 함께 탔다. 아직 약혼 사이가 유지되고 있다는데 더 거부할 핑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딱 이 인승 마차라 라망드라도 있었다면 건강을 핑계로 따로 탈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기사들 훈련에 파견 나간 바람에.’

“잘 지냈나.”

“네. 죄송하지만 머리가 아파서 대화 상대는 해드리지 못하겠네요.”

단호하게 차단한 후로도 에사디엔은 계속 내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지만 나는 전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았다.

결국 에사디엔도 포기하고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만 울리기를 얼마간. 황성에서는 처음 보는 작은 입구로 들어선 마차가 곧 멈췄다.

“미뉴엘.”

먼저 내려간 에사디엔이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 꿋꿋하게 혼자 내려선 후 기다리고 있던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미뉴엘.”

우리가 내린 곳은 황태자의 개인 사냥터였던 모양이다. 키 큰 나무로 빼곡한 저쪽과 다르게 이쪽은 휑뎅그렁할 정도로 땅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달랑 하나만 세워진 막사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개인적인 일로 부른 거구나.’

아마도 에사디엔에 대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이러는 거겠지.

황태자는 나를 그리로 이끌었고, 우리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려는 에사디엔에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너까지 들어오는 게냐?”

“누님.”

“독대할 것이다. 나가거라.”

“…….”

대답 대신 이쪽을 바라보는 에사디엔과 눈이 마주쳤다.

‘왜 저렇게 혼자 애절해?’

아까부터 묘하게 매달리는 듯한 눈빛이 거슬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황태자가 손수 빼준 의자에 앉았다.

잠시 묵묵히 서 있던 에사디엔이 몸을 돌려 나가는 기척이 들린 후, 그제야 황태자도 한숨과 함께 내 맞은편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눈치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너스레였다.

황태자를 민망하게 할 수는 없으니 나도 예의 바른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저 둔한 녀석 때문에 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전하.”

“이야기는 대충 들었단다. 성인식 연회 때 네가 에사디엔을 혼쭐내 주었다지.”

윽. 사람들 앞에서 무안 준 일까지 귀에 들어갔을 줄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아니다. 저 아이에게는 그런 충격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황태자는 나를 만류하고 직접 차를 우렸다.

시계 안의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자 주전자 안에 은 막대를 넣어 젓고 찻잔에 차를 따르는 일련의 행위가 유려했다.

“미뉴엘, 너는 에사디엔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느냐?”

“황자님은 많이… 혼란스러워하셨습니다.”

내게 휘둘리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런 적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도 감정이 흐려져서인지 그 기억도 부옇기만 했다.

“금방 사라질 감정을 믿지 않는다고도 했고요.”

“그래. 여전히 그렇구나.”

찻잔은 화려했다. 손잡이 바깥이며 찻잔 받침 가장자리가 모두 금으로 둘려 있었다.

다만 입이 닿는 찻잔의 가장 위쪽 가장자리며 바닥에는 은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주전자를 젓던 가느다란 은 막대와 함께 황제와 그 후계자의 삶 일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옛날, 에사디엔이 황성에 들어오기 전에는 친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예. 돌아가신 마야 황녀님이시지요.”

나는 그 저택에 반쯤 강제로 방문해 본 적도 있었다.

‘이곳을 지키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곳의 지붕에서 들었던 말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땅을 치던 기분이 지하도를 파려던 순간, 황태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나를 일깨웠다.

“그래. 그분은… 연인이 사라지고 황성에서 쫓겨난 후 명료한 정신을 영영 잃으셨다고 한다.”

폐황녀는 사라진 연인에 대한 원망을 에사디엔에게 쏟아부었다. 심지어 그를 감싸려던 하인들까지 매질하고 내쫓았다는 이야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황성에 들어와서는 이황자에게 시달리고? 애가 제대로 크는 게 더 희한할 환경뿐이네.’

“그래서 그 애는 울타리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그 안으로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지. 폐하나 나조차도.”

황제와 황태자는 감사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일 뿐.

“그 안에 들어선 사람은 미뉴엘, 너뿐이란다.”

“…….”

“솔직히 놀랐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너를 받아들였다는 것부터.”

“그건 저희 가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긁적였다.

“녀석이 그러든? 하하. 정말 내 동생이지만 답이 없는 놈이야.”

그러나 손을 내린 후로도 웃음은 여전했다. 심지어 표정이 밝아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다. 카르이넨 가문에서 파혼장이 날아왔을 때 며칠이나 방에 틀어박혔던 녀석이 나와서 처음 한 말이 뭔지 아니?”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끝난 마당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계급이 깡패였다.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가리며 얌전히 듣는 수밖에.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단다.”

‘역시나.’

반전은 없었다. 아까 우리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선언하셨겠지, 아무렴.

에사디엔이 어릴 적 겪었던 일들은, 그래. 안쓰럽고 딱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연민일 뿐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학대당해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잖아?

아무리 옛날 일이 가엾은들 에사디엔의 울타리인지 벽인지, 아무튼 그걸 넘지 못하고 내가 튕겨나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파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이기적으로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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