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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 영애 집착을 시작합니다 (40)화 (40/130)

40화

‘흥미 떨어진 장난감이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갑자기 좋아 보이는 것뿐이잖아.’

그도 아니면 양손에 나와 라페슈를 다 쥐고 싶은 것이든지. 에사디엔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겠지만 나는 장난감이 아니다.

“다음 인연이 생기면 솔직히 표현할 수 있겠네요. 저도 황자님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아예 영혼도 없이 읊는 내 말을 듣고 황태자는 잠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내 마음도 확고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래……. 에디가 너무 많이 늦었구나.”

한숨을 내쉰 황태자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미뉴엘, 너는 내 친우의 동생이고, 이 약혼 문제를 떠나서 나는 너를 정말로 아낀단다.”

아니, 이 밑밥은.

‘뭔가 부탁할 분위기인데……?’

“그런 네게 이런 말을 하자니 면목이 없다만, 저런 에사디엔 녀석도 내 동생이라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구나.”

‘역시나.’

두 번째 ‘역시나’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내게 마침내 본론이 들려왔다.

“되도록 부드럽게 헤어져다오.”

버티겠다는 에사디엔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이기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게 동생은 없지만, 만약 언니들만큼 사랑하는 동생이 있다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이렇게 부탁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더라도 이해와 확답은 다른 문제였다.

내 본능은 뭔가를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차마 장담하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한 걸 보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황태자는 고마워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아니 루미에르 언니. 이렇게 불러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지요.”

“아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를 아낀다고. 엘가의 동생은 내 동생과도 같으니.”

“그렇다면 언니.”

밖에 있을 에사디엔의 청력은 얼마나 될까.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차라리 듣고 배신감을 느껴서 이만 나를 놔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아났다.

“비밀을 지키기로 했지만, 저는 이제 황자님의 약혼녀가 아니니……. 그리고 이게 그분을 돕는 길인 듯해 말씀드립니다.”

“비밀이라니?”

“이황자님이 아직도 삼황자님에게 암살자를 보냅니다.”

나를 놓지 않으려는 이유를 한 가지 없애줄게, 에사디엔.

* * *

‘저 사람이 원래 이렇게 집요했나?’

황태자에게 부탁해 황성 도서관에 들어온 나는 도통 책에 집중할 수가 없어 당혹스러웠다.

그야 뒤통수를 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을 계속 받고 있으니 당연했다.

‘왜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건데!’

에사디엔과 마차를 같이 타기 싫다고 했더니 황태자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냥 여기 버리고 가거라. 에디 녀석이야 걸어가든 말든 의지가 있다면 저 알아서 하겠지.’

내게 부탁도 했겠다, 그 외에는 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져서 마음이 가벼웠던 것도 잠시.

얼마나 책을 찾고 있었을까. 어쩐지 옆얼굴이 따가워서 돌아보니 에사디엔이 서 있었다.

‘헉!’

깜짝 놀라서 그만 옆구리에 끼웠던 책들이 우르르 떨어져버렸다.

황급히 몸을 숙여 주우려고 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에사디엔의 손이 나보다 먼저 책에 닿았다.

‘내가 하지.’

에사디엔의 이마에는 땀이 조금 배어 있었다. 게다가 가슴도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아무래도…….

‘뛰어온 거야?’

마차로 이십 분이나 걸렸는데? 그 거리를 사람이 뛰어올 수 있다고?

‘진짜 제정신인가?’

심각하게 의심스러웠지만 내가 그것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미이이치이이인…….’

그 결과 지금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어쩐지 일반 좌석에 앉으면 에사디엔이 떡하니 맞은편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아 일 인석에 앉았더니 뒤에 장승처럼 서서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서 흘긋거리는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내 잘못은 없는데 괜히 내 얼굴만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책만 훑고 돌아가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다가와 물었다.

“뭘 찾는 거지?”

“…….”

“함께하면 훨씬 나을 것이다.”

“하.”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그만 일어섰다.

‘이 책이고 저 책이고 이제 됐어! 포기야!’

“미뉴엘.”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책들을 모두 북 카트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출구를 향하려던 내 팔을 에사디엔이 다급히 붙잡아 돌려세웠다.

“최소한 내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야기는 무슨……!”

순간적으로 열이 확 치받으며 빽 소리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스로 한 가닥 남은 이성이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황태자의 부탁 또한 함께.

‘되도록 부드럽게 헤어져다오.’

부드럽게, 상냥하게……. 두 단어를 연신 되뇌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는 내가 나름대로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가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일뜬 느그즈…….”

황태자 언니, 이게 최선입니다.

매섭게 째려보는 눈초리에 움찔한 에사디엔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일단… 나가자는 뜻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찰떡같이 알아들었으니 자리를 피할 겸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는 정도는 해줘야지.

한 일 분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더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티 나지 않게 힐끔 돌아보자, 앞장선 내 뒤를 에사디엔이 밝아진 얼굴로 총총 따라오고 있었다.

“자. 이제 말씀해 보세요.”

도서관 뒤쪽 정원, 인적이 드문 구석에 도착해 팔짱을 단단히 끼며 버티고 섰다.

그런데 에사디엔은 빨리 말을 시작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 하세요?”

“앉을 데가 없어서. 미뉴엘, 그대가 힘들 텐데…….”

“됐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하지만…….”

“용건만 간단히!”

꾹꾹 눌러두었던 성질이 끝내 살짝 터져버렸다.

또 피 냄새가 훅 치미는 것 같아서 코끝을 막는 사이 움찔한 에사디엔이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미뉴엘. 셀레스테 영애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절대로, 티끌만큼도 부정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

“그간 함께 다녔던 것은 황제 폐하의 밀명 때문이었다.”

에사디엔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며 내게 몸을 숙였다. 아직도 몸이 기억하는 그의 시원한 향이 퍼져 피 냄새를 지웠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던 나를 다음 말이 붙들었다.

“자작가를 조사하라셨다.”

예상치 못한 말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셀레스테 자작가를?’

짚이는 것이 없어 눈매를 찡그리는데 에사디엔의 변명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셀레스테 영애와 붙어 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 외에도 조사할 것이 많았고.”

“그랬군요. 제가 오해한 거군요.”

“그래. 나는…….”

“속옷만 입은 라페슈 셀레스테하고 황자님께서 껴안은 모습을 봤는데 말이죠.”

“그건!”

잔뜩 험악해진 눈과 마주쳤다. 에사디엔이 이토록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에사디엔도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손으로 눈을 덮으며 긴 한숨을 내뿜었다.

“후……. 그때 나는, 미뉴엘. 나는 셀레스테 영애를…….”

그리고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닫으면서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말씀 못 하시겠으면 이만 파하죠.”

“미뉴엘!”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에사디엔이 재빠르게 내 팔을 붙들었다. 한껏 인상을 쓰며 내려다보자 곧 떨어지는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면 어서 말씀하시든지요.”

“미뉴엘, 나는… 두렵다.”

내 이름 닳겠다, 닳겠어.

“뭐가요?”

심드렁하게 묻는 말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대가 나를 인간 이하로 볼까 봐.”

“뭐, 셀레스테 영애를 죽이려고 하기라도 했나요?”

설마 하고 던진 말에는 더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

“……?”

뭐, 뭐야. 왜 시선을 피해? 왜 아니라고 하지 않는 거야?

당황해서 눈이 파르르 떨리는 게 나 자신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사디엔이 내 옷자락 끝을 지그시 붙잡았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자작가의 자금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찾아갔다가 본의 아니게 그런 모습을 보였다.”

에사디엔은 ‘본의 아니게’라고 했지만 라페슈의 의도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성인식 날, 어쩐지 라페슈가 나를 자기 휴게실로 부르더라니.

‘앙큼하기도 하셔라.’

내가 흥, 콧방귀를 뀌는 동안에도 에사디엔은 천천히 사과를 이어가고 있었다.

“정말로 미안했다. 그대가 오해할 일을 만들면 안 됐는데.”

“네. 그랬죠.”

“그러면 미뉴엘……. 나를 용서해 주겠나?”

나는 딱 잘라 답했다.

“아니요.”

에사디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완벽한 모양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보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불쌍하게도.

라페슈의 대기실에서 목격한 모습은 분명히 우리에게 치명타, 즉 라스트 팡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한 가지 사건 때문에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하잖아요. 황자님은 그 ‘때’를 놓친 거예요.”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아직 에사디엔을 사랑했을 때.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을 때.

에사디엔이 라페슈 셀레스테와의 관계를, 최소한 나에게만은 부정해야 했을 때.

그리고 내가 그에게 나에 대한 감정을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황자님, 시간처럼 지나간 인연은 되돌릴 수 없어요.”

에사디엔은 세 번이나 나에 대한 마음을 부정했고 많은 것을 감췄다.

전에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그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만 절 놔주세요.”

에사디엔은 한참, 아주 한참 동안 나를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무심코 지나쳤던 벽지에 이런 얼룩이 있었던가, 하고 고심하는 사람처럼.

나는 기꺼이 기다렸다. 에사디엔이 머릿속에서 그를 사랑하는 미뉴엘의 모습을 이만 지우기를 바라며.

이렇게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아니, 잠깐만. 슬슬 다리가 아픈데.’

얼마든지 기다릴 수는 있는데, 좀 빨리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에사디엔은 내 바람과 달리 다리가 아픈 것을 넘어 저릴 때까지도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러려고 앉으라고 그런 거니?!’

참다못해 이를 갈기 직전이었다. 마침내 에사디엔이 천천히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파혼장, 좀 더 정확히 말해 파혼 동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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